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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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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思得重臣하여鎭之러시니
忠直注+鎰, 同爲相者.하고 爲上所重하여 欲出之於外하고 得專朝政하여 乃對曰
하고 鳳翔將校 班秩 已高하니 非宰相信臣이면 無以鎭撫 臣請自行하노이다
俛首未言이러시니 又曰 陛下 必以臣貌寢不爲三軍所伏인대 固惟陛下神算이니이다
乃顧鎰曰 才兼文武하고 望重中外하니 無以易卿이로다 知爲杞所排而無辭以免하여 因再拜受命이러니
至鳳翔하여 未幾 爲泚將 所殺하다


20-8-가
덕종德宗유주幽州의 군대가 봉상鳳翔에 있다고 하여 중신重臣을 구해 주차朱泚를 대신하여 안정시키도록 할 것을 생각하였다.
노기盧杞장일張鎰이 충직하고注+장일張鎰노기盧杞와 함께 재상이 된 사람이다. 덕종에게 중한 대우를 받는 것을 시기하여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고 자신이 조정의 정사를 혼자서 총괄할 수 있기를 바라서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주자는 명성과 지위가 본래 높은 데다 봉상의 장교도 관계官階가 이미 높으니, 재상으로 믿을 만한 신하가 아니면 이들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직접 가겠습니다.”
덕종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노기가 또 말하였다. “폐하께서 반드시 신이 못생기고 키가 작아 삼군三軍에게 복종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참으로 폐하의 묘책을 따를 뿐입니다.”
덕종이 이에 장일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경은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하고 명망이 조정 안팎에 무거우니, 경을 대신할 사람이 없도다.” 장일은 노기에게 배척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를 피할 말이 없어 그대로 재배하고 명을 받았다.
장일은 봉상에 이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의 장령 이초림將領 李楚琳에게 살해되었다.


역주
역주1 20-8-가 : 《資治通鑑》 권227 〈唐紀43 德宗2〉 建中 3년(782) 4월 조에 보인다.
역주2 幽州兵在鳳翔 : 代宗 大曆 9년(774) 6월에 幽州盧龍節度使 朱泚가 아우 朱滔(746~785)를 보내 入朝하게 하고, 주자 자신 역시 防秋兵 5천 명을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하여 대종의 허락을 받았는데, 여기에서는 주자가 데리고 들어온 방추병이 鳳翔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을 말한다. ‘防秋兵’은 가을에 서북 유목 민족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 군대이다. ‘鳳翔’은 지금의 섬서성에 있었으며 옛날에 雍州로 불리던 곳이다.
역주3 朱泚 : 742~784. 당나라 때의 將領이자 逆臣이다. 지금의 北京市 昌平 남쪽인 幽州 昌平 사람이다. 幽州의 將領으로 盧龍節度使 李懷仙(?~768)과 朱希彩(?~772)를 앞뒤로 섬기다가 부하들에 의해 幽州盧龍節度使에 옹립되었다. 代宗 大曆 7년(772) 10월에 檢校左常侍‧幽州盧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대력 9년(774)에 주자는 중앙 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직접 長安에 가서 대종에게 入朝한 뒤 그대로 장안에 머물렀다. 德宗 建中 원년(780)에 涇州의 장수 劉文喜의 반란이 일어나자 涇原節度使에 임명되어 경주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이 공으로 中書令‧太尉의 벼슬을 더 받았다. 건중 3년(782)에 아우인 范陽節度使 朱滔가 반란을 일으키자 병권을 잃고 연금되었는데, 이듬해(783) 涇原兵變이 일어나자 경원의 군사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국호를 秦, 연호를 應天으로 정하였다. 덕종 興元 원년(784) 정월에 다시 국호를 漢, 연호를 天皇으로 고쳤다. 얼마 뒤에 李晟이 長安을 수복하자 지금의 감숙성에 있던 涇州로 달아났으나 涇原節度使 田希鑑이 문을 닫고 받아주지 않아 부득이 계속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중간에 部將에게 살해되었다. ‘涇原兵變’은 20-5-가 ‘德宗’ 주석, 20-11-가 ‘涇師亂’ 주석 참조.
역주4 張鎰 : ?~783. 당나라의 경학가이다. 자는 季權 또는 公道이며, 蘇州 사람이다. 玄宗 때 朔方節度使였던 아버지로 인해 蔭職으로 출사하여 左衛兵曹參軍, 殿中侍御史 등을 역임하였다. 代宗 때 江西‧河中觀察使를 거쳐 德宗 建中 2년(781) 7월 3일 庚申日에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盧杞의 시기를 받아 건중 3년(782) 4월 26일 戊寅日에 鳳翔尹‧隴右節度使에 임명되었으며, 건중 4년(783) 10월에 李楚琳의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 저서에 《三禮圖》, 《五經微旨》, 《孟子音義》 등이 있다.
역주5 : 사고본에는 ‘總’으로 되어 있다.
역주6 朱泚名位素崇 : 朱泚가 代宗 大曆 7년(772) 10월에 檢校左常侍‧幽州盧龍節度使에 임명되고, 德宗 建中 원년(780)에 涇原節度使로서 中書令‧太尉의 벼슬을 더 받은 것을 이른다.
역주7 李楚琳 : 朱泚의 手下로 주자의 신임을 받았다. 德宗 建中 4년(783)에 주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鳳翔節度使 張鎰이 이초림을 제거할 생각으로 그를 隴州(지금의 섬서성 隴縣)에 주둔하도록 보냈으나, 이초림은 도리어 반란을 일으켜서 달아나는 장일을 살해하고 주자에게 귀의하였다. 뒤에 주자가 패배하자 다시 조정에 귀의하여 봉상절도사에 임명되었다. 덕종 興元 원년(784)에 來朝하여 金吾大將軍에 임명되고, 뒤에 僕射로 衛尉卿을 겸하였다.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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