肅宗上元元年
에 하시고 迎上皇
하사 自蜀歸京師
하여 居
하실새
上
이 時自
으로 往起居
하시고 上皇
이 亦間至
이러시니
內侍
이 素微賤
이라 雖暴貴用事
하나 上皇左右
가 多輕輔國
하니
上皇
이 居興慶宮
하사 日與外人交通
하시고 禮
注+上皇侍衛大將.‧
注+內侍, 久事上皇.가 謀不利於陛下
이란대
上이 泣曰 聖皇이 慈仁하시니 豈容有此리오 對曰 上皇이 固無此意하시나 其如群小에 何오
陛下가 當爲社稷大計하사 消亂未萌이니 豈得徇匹夫之孝리오
且興
垣墉
이 淺露
하니 非至
所宜居
요 大內
가 深嚴
하니 奉迎居之
면 與彼何殊
리오
又得杜絶小人의 熒惑聖聽이니 如此면 上皇이 享萬歲之安하시고 陛下가 有三朝之樂하시리니 庸何傷乎리오
上이 不聽하시다 興慶宮에 先有馬三百匹이러니 輔國이 矯敕取之하니 纔留十匹이러라
上皇이 謂高力士曰 吾兒가 爲輔國所惑하여 不得終孝矣로다
上
이 泣不應
하신대 輔國
이 遂矯稱上語
하여 迎上皇遊西內
할새 至
武門
하여 輔國
이 將
五百騎
하여 露刃遮道曰
皇帝가 以興慶宮이 湫隘라하여 迎上皇遷居西內로소이다 上皇이 驚幾墜이러시니
遂如西內하사 居甘露殿하시니 所留侍衛兵이 纔尪老數十人이요 陳玄禮等及舊宮人이 皆不得留左右러라
輔國
이 與六軍大將
으로 見上請罪
한대 上
이 迫於諸將
하여 乃勞之曰 卿等
이 恐小人
이 熒惑
하여 防微杜漸
하여 以
社稷
하니 何所懼也
리오
高力士
는 流巫州
하고 陳玄禮
는 勒致仕
하다 上皇
이 日以不
하사 因不茹葷
하시고 辟穀
하사 浸以成疾
하시다
上이 初猶往問安이러시니 旣而上亦有疾하사 但遣人起居러시니
其後에 上이 稍悔悟하사 惡輔國欲誅之호대 畏其握兵하여 竟猶豫不能決이러시다
7-10-가1
肅宗 上元 元年(760)에 兩京을 평정하고 上皇(玄宗)을 맞이하여 상황이 蜀에서 京師(長安)로 돌아와 興慶宮에 거처할 때의 일이다.
상이 때때로 夾城을 통해 가서 문후를 여쭙고 상황도 간간이 大明宮에 거둥하셨다.
내시 李輔國이 본래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비록 갑자기 귀하게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상황의 측근들은 대부분 이보국을 경시하니,
이보국이 원한을 품었고 또 특별한 공을 세워 총애를 공고히 하고자 하여 상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상황께서는 흥경궁에 거처하시면서 날마다 궁 밖의 사람들과 왕래하시고 陳玄禮와
注+‘陳玄禮’는 上皇의 시위대장이다. 高力士는
注+‘高力士’는 내시이니, 오랫동안 상황을 섬겼다. 폐하께 이롭지 않은 일을 꾸밉니다.”
上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聖皇께서는 자애롭고 어지시니 어찌 이런 일이 있도록 용납하시겠는가.” 이보국이 대답하였다. “상황께서야 참으로 이런 뜻이 없으시겠지만 그 주위의 소인배들의 경우에는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사직의 대계를 행하시어 난이 싹트기 전에 없애야 합니다. 어찌 필부의 효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흥경궁은 담이 낮고 궁 안이 들여다보이니 지존이 거처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대내는 담이 높고 삼엄하니 받들어 맞이하여 거처하시게 하면 저 흥경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소인이 상황을 현혹시키는 것을 막아 근절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면 상황은 만세토록 평안함을 누리시고 폐하는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니 어찌 해 될 것이 있겠습니까.”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흥경궁에는 말 300필이 있었는데 이보국이 조칙을 가탁하여 이를 차지하니 겨우 10필만 남았다.
상황이 고역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아이가 보국에게 현혹당하여 끝까지 효도를 하지 못하겠구나!”
이보국이 또 六軍의 장졸들에게 명령하여 울부짖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상황을 맞이하여 西內에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도록 하였다.
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응하지 않자, 이보국이 마침내 황상의 말씀이라고 속여서 상황을 맞이하여 서내에서 노닐다가 현무문에 이르자 이보국이 射生手 500騎를 이끌고 가서 칼을 뽑고 길을 막아서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흥경궁은 담이 낮고 좁다고 하시어 상황을 맞이하여 서내로 옮겨 거처하시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황이 놀라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마침내 서내로 가서 감로전에 거처하니 남아서 시위하는 군사는 등이 굽고 늙은 수십 명뿐이었고, 진현례 등과 예전부터 모시던 궁인은 모두 측근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이보국이 六軍의 대장들과 함께 상을 알현하고 죄를 청하자, 상이 여러 장군들에게 압박을 받아 마침내 그들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경들이 小人이 현혹할까 염려하여 미약할 때 방비하고 차츰 젖어드는 것을 막아서 사직을 평안하게 하였으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고역사는 巫州에 유배하고, 陳玄禮는 을러서 致仕하게 하였다. 상황이 날로 편찮아져서 인하여 생선과 고기를 들지 않고 辟穀하여 점차 큰 병이 되었다.
상이 처음에는 그래도 가서 문안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상도 병이 들어 다만 사람을 보내 문안할 뿐이었다.
그 뒤 상이 점차 후회하고서 이보국을 미워하여 주살하고자 하였지만 그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