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23-7-나(안按)
[신안臣按] 참소하는 자가 군자를 해치는 데는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송경宋璟은 개원開元 연간의 어진 재상이었습니다. 기강을 잡고 요행을 억제하였으니, 이것은 현종玄宗을 가까이서 모시는 소인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을 이용하여 우인優人들로 하여금 발희魃戲를 벌이도록 하여 송경을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풍자와 농담이 의도가 없는 데서 나온 듯하자 현종은 이를 믿어 대번에 송경의 재상직을 파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시킨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이것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시대적 상황으로 고찰해보면, 양사면楊思勉은 내시의 신분으로 지위가 높고 총애를 받았는데 송경이 그와 말도 주고받지 않았고,
강교姜皎는 옛 공훈으로 총애를 받고 현종과 가까웠는데 송경이 그 지나친 권세를 배척하였으며, 왕인교王仁皎는 황후의 아버지였는데 그의 분묘를 조성할 때에 제도를 넘게 하려고 하자 송경이 이를 간쟁하였고,
왕인침王仁琛은 현종이 번저藩邸에 있을 때 옛 관리였는데 왕인침을 관직에 임명한 것이 제도를 넘자 송경이 또 이를 간쟁하였으니, 이 몇 사람들은 모두 송경을 불편하게 여긴 자들이었습니다. 우인들의 놀이는 틀림없이 이들이 실로 시켰을 것입니다.
原注
현종玄宗이 비록 즉위한 초기에는 밝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방敎坊의 음악에 빠져서
注+개원 2년(714)에 교방敎坊을 설치하여 속악을 가르쳤다. 악인樂人과
우인優人, 잡기를 가진 자들이 좌우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술수로 어진 재상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까이서 모시는 저 소인들은 군주의 뜻을 엿보는 데 뛰어나서, 사람을 천거할 때는 일찍이 직접적으로 천거한 적이 없고 흘리는 말로 추켜세울 뿐이었으며, 사람을 비방할 때는 일찍이 직접적으로 비방한 적이 없고 암암리에 해칠 뿐이었습니다.
환관
위홍간魏弘簡이
원진元稹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시를 궁중에서 외웠으니
注+당 목종唐 穆宗 때 위홍간魏弘簡은 환관으로서 총애를 받은 자였는데, 원진元稹은 이자를 통해 재상의 지위를 얻었다. 이것은 천거하지 않은 천거였으며,
우인優人의
발희魃戲는 이것은 또 비방하지 않은 비방이었습니다.
그 깊은 함정과 그 교묘한 술수가 어떤 것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가까이서 총애를 받는 소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송나라 휘종 선화徽宗 宣和(1119~1126) 연간에 왕보王黼와 채유蔡攸가 대신의 신분으로 궁중에 들어가 모시면서 매번 해학하는 자와 환관을 통해 자신들의 계략을 쓰지 않음이 없었으니,
간사한 신하와 참소하는 신하들이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오랜 옛날부터 똑같습니다. 인군이 이것을 의도가 없는 것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唐人宮樂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