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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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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開元中 宰臣 疾負罪而妄訴不已者하여 付御史臺推治之러니
會天旱有이라 優人 作魃戲於上前하여 問魃何爲出 對曰 奉相公處分이니라
又問何故 魃曰 負寃者百餘人 相公 悉以繫獄이라 故魃不得不出이니라 心以爲然이러시니 未幾 하시다


23-7-가
당 현종 개원唐 玄宗 開元 연간에 재상 송경宋璟이, 죄를 짓고서도 망령되이 고소를 그치지 않는 자들을 미워하여 어사대御史臺에 넘겨서 심문하여 치죄하도록 하였다.
마침 가뭄이 들어서 이 나타났다. 우인優人이 현종 앞에서 발희魃戲를 하여 발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왔는가?” 발이 대답하였다. “상공相公에 대한 처분을 받들고 왔다.”
또 물었다. “왜인가?” 발이 대답하였다. “원통한 사람 2백여 명을 상공이 모두 옥에 가두었기 때문에 내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宋璟宋璟
魃
현종이 속으로 옳다고 여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경의 재상직을 파면하였다.
唐 玄宗唐 玄宗


역주
역주1 23-7-가 : 《資治通鑑》 卷212 〈唐紀28 玄宗 上之下〉 開元 8년(720) 1월 조에 보인다. 문자의 詳略이 있다.
역주2 唐玄宗 : 685~762. 재위 712~756. 武則天을 포함했을 때 당나라 제7대 임금 李隆基로, 시호는 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며 ‘현종’은 묘호이다. 시호로 인해 唐明皇이라고도 칭한다. 제6대 임금 睿宗 李旦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竇皇后이다. 中宗 唐隆 원년(710)에 거병하여 韋皇后와 安樂公主를 제거하고 부친인 예종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같은 해 황태자에 봉해지고, 2년 뒤인 712년 8월 25일에 예종의 양위로 즉위하였다. 太平公主를 제거하고 姚崇‧宋璟‧張說‧張九齡 등을 재상으로 임용하여 漕運 개량과 屯田 개발 등 내정을 정비하고 밖으로는 東突厥‧吐蕃‧契丹 등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여 開元之治를 이루었다. 만년에 楊貴妃에 빠져 국정을 등한시하고 권신 李林甫, 楊國忠 등을 총애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결국 755년 安祿山의 난을 맞아 四川으로 파천하였으며, 이듬해 태자 李亨(肅宗)에게 양위하고 太上皇으로 물러났다. 長安으로 돌아온 뒤 78세를 일기로 病死하였다.
역주3 : 대전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으나, 宋 황실의 시조인 聖祖 趙玄朗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4 宋璟 : 663~737. 당나라의 명재상이다. 자는 廣平이며 邢州 南和 사람이다. 高宗 調露 원년(679)에 進士가 된 후 監察御史‧御史中丞 등을 역임하였다. 中宗 때 吏部尙書가 되고 諫議大夫를 겸하였으며, 睿宗 景雲 원년(710)에 吏部尙書‧同中書門下三品이 되었다. 玄宗이 즉위한 뒤 御史大夫, 刑部尙書가 되었다. 얼마 뒤에 姚崇의 뒤를 이어 侍中이 되었는데, 간신을 내치고 형벌을 관대하게 하며 변경의 장수들이 병력을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엄금하는 등 치적을 쌓아 요숭과 함께 명재상으로 불렸다. 개원 20년(732)에 치사하여 낙양에 살았다. 강직하고 장중한 풍도가 있었으므로 현종이 경외하여 늘 뜻을 굽혀 의견을 받아들였다. 시호는 文貞이다.
역주5 : 가뭄의 신으로, 여기에서는 가뭄을 뜻한다. 《神異經》에 “남방에 사람이 있는데 키가 두세 자이다. 상체를 벗었으며 눈이 정수리 위에 있다. 달리면 바람과 같다. 이름을 발이라고 하는데, 발이 나타난 나라는 크게 가문다.[南方有人 長二三尺 袒身而目在頂上 走行如風 名曰魃 所見之國大旱]”라는 내용이 보인다. 《藝文類聚 災異部 旱》
역주6 : 《資治通鑑》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
역주7 罷璟相 : 唐 玄宗 開元 8년(720) 1월 28일 辛巳日의 일이다. 현종은 宋璟을 侍中에서 면직하고 開府儀同三司로 삼았다.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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