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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1)

대학연의(1)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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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明帝 학문
顯宗孝明帝 十歲 通春秋하니 光武 奇之러시니 旣爲皇太子 師事博士桓榮하여 學通尙書하시고
及卽位 尊以師禮하여
乘輿 하사 令榮으로 設几杖하고 會百官及榮門生數百人하시고 天子 親自執業하사
每言 在是라하시고 旣罷 悉以
官供具 賜之하시다
注+三雍, 謂.이어늘 拜榮爲注+更, 謂而更事者.하고 每大射‧養老禮畢 輙引榮及弟子하여 升堂하시고 執經하사 自爲注+謂下語而講說也.하시고
詔曰
李躬 年耆學明하고 五更桓榮 授朕尙書하니
詩曰 라하니 其賜榮爵하라


명제明帝의 학문
4-2-가
현종顯宗 효명제孝明帝가 10세에 《춘추春秋》에 통달하자 광무제光武帝가 기특하게 여겼는데, 황태자가 되고 나서는 박사博士 환영桓榮사사師事하여 《상서尙書》를 배워 통달하였다.
즉위하자 환영을 스승의 예로 존중하였다.
어가가 일찍이 태상부太常府로 행차하여 환영으로 하여금 앉아서 동쪽을 향하게 하였고 궤장几杖을 진설하게 하였으며, 백관 및 환영의 문생門生 수백 명을 모이게 하고는 명제明帝가 직접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말할 때마다 “태사太師께서 여기에 계시다.”라고 하였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모두에게 태관太官에서 장만한 음식을 하사하였다.
후에 삼옹三雍이 완성되자注+삼옹三雍’은 명당明堂영대靈臺벽옹辟雍을 말한다. 명제는 환영을 오경五更으로 임명하고注+’은 기로耆老로서 일에 대해 경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대사례大射禮양로례養老禮가 끝날 때마다 환영과 그의 제자들을 이끌고 에 올라가서 경전을 들고 직접 강설하였다注+하설下說은 말을 하여 강설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삼로三老이궁李躬은 연로하고 학문이 밝으며, 오경五更인 환영은 짐에게 《상서》를 전수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에 보답하지 않음이 없으며 말에 답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환영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하라.”


역주
역주1 4-2-가 : 《後漢書》 卷2 〈明帝紀〉, 《資治通鑑》 卷44 〈漢紀36 明帝 上〉에 보인다.
역주2 :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역주3 太常 : 종묘와 조정의 제사와 예의‧陵寢 등에 관한 행정, 博士와 박사 제자의 선발 등을 주관했던 벼슬이다. 秦나라 때의 奉常을 漢 景帝 때 개명한 것이다. 王莽 때 秩宗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東漢 때 복구되었다. 《中國官制大辭典 太常》
역주4 坐東面 : 《後漢書》 卷46 〈鄧禹傳〉에 “顯宗은 즉위하자 先帝 때 으뜸가는 공을 세운 사람이라 하여 鄧禹를 太傅에 임명하였으며, 현종을 알현할 때는 동향하게 하여 등우를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였다.[顯宗卽位 以禹先帝元功 拜爲太傅 進見東向 甚見尊寵]”라는 내용이 보인다. 李賢의 注에 “신하는 북면해야 하지만 등우를 빈객처럼 존중하였으므로 동향하게 한 것이다.[臣當北面 尊如賓 故令東向]”라고 하였다.
역주5 : 대전본에는 ‘輔’로 되어 있다.
역주6 : 사고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역주7 太官 : 황제의 음식과 연회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원이다. 본래 춘추시대 楚나라에 있었던 벼슬인데 秦‧漢 때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少府의 屬官으로 太官令‧丞이 있었다. 《中國歷代官制大詞典 太官》
역주8 : 사고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역주9 三雍成 : 《後漢書》에 따르면, 三雍은 59년(永平2)에 처음 완성되었다. 《資治通鑑》에 “永平 2년 정월에 명제는 光武皇帝를 明堂에 宗祀하고, 禮가 끝나자 靈臺에 올라 구름의 색을 살폈다. 3월에 辟雍에 거둥하여 大射禮를 행하고, 10월에 벽옹에 거둥하여 養老禮를 행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胡三省의 注에 이르기를 “명당에 높여 제사 지내는 것은 上帝에 배향하는 것이다. 영대에 올라 구름의 색을 살피는 것은 《春秋左氏傳》에 의하면 春分‧秋分‧冬至‧夏至‧立春‧立夏‧立秋‧立冬에 구름의 색을 살펴 길흉과 천재로 인한 농사의 豊凶을 예측하는 것이다. 辟雍에서 대사례를 행하는 것은 《儀禮》에 의하면 왕이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射宮에서 선비를 가려 뽑아 제사를 돕게 한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養老禮는 자세한 의식이 《資治通鑑》에 보인다. 《後漢書 卷67 桓榮列傳》 《資治通鑑 卷44 漢紀36 明帝 上》 《後漢書 卷2 明帝紀》
역주10 五更 : 五更은 鄕官의 이름으로, 연로하여 致仕한 관원에게 주어졌다. 三老와 함께 二千石의 녹을 종신토록 받고 천자가 父兄의 예로 모시는 사람이다. 《禮記》 〈文王世子〉에 “東序에 가서 선대의 長老에게 釋奠하고 마침내 三老‧五更‧群老의 자리를 마련하였다.[適東序 釋奠於先老 遂設三老五更群老之席位焉]”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鄭玄의 注에 “삼로와 오경은 각각 한 사람이니, 모두 연로한 사람으로 일에 대해 경력이 있고 致仕한 사람이다. 천자는 그들을 부형으로 봉양함으로써 천하의 효성과 공경을 보인다. 三과 五로 이름을 지은 것은 三辰과 五星에서 형상을 취한 것으로, 하늘이 이를 통해 천하를 밝히기 때문이다.[三老五更 各一人也 皆年老更事致仕者也 天子以父兄養之 示天下之孝悌也 名以三五者 取象三辰五星 天所因以照明天下者]”라고 하였다. 《漢書》 〈禮樂志〉에는 “顯宗이 즉위하자 그 예를 행하여 광무제를 明堂에서 제사 지냈으며 삼로와 오경을 벽옹에서 모셨다.[顯宗卽位 躬行其禮 宗祀光武皇帝于明堂 養三老五更於辟廱]”라고 하였는데, 顔師古는 李奇의 말을 인용하여 “王者는 삼로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오경을 형처럼 섬긴다.[王者父事三老 兄事五更]”라고 하였다. 《禮記注疏 文王世子 鄭玄注》 《漢書 卷22 禮樂志 顔師古注》
역주11 : 사고본에는 ‘卞’으로 되어 있다.
역주12 三老 : 敎化를 담당한 사람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지방에 이미 三老가 있었으며 秦‧漢 때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삼로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조정에서도 무척 예우하였으나, 印章만 있고 祿이 없어 정식 관리는 아니었다. 東漢 때에는 이외에도 郡三老와 國三老가 있었다. 《中國歷代官制大詞典 三老》
역주13 無德……不酬 : 《詩經》 〈大雅 抑〉에 보인다. 통행본 《詩經》에는 ‘無言不讎 無德不報’로 되어 있다.
역주14 : 사고본에는 ‘讎’로 되어 있다.
역주15 關內侯 : 爵位 이름으로 춘추시대 齊나라에서 최초로 설치하였는데, 이때에는 附庸小國과 같은 지위였다. 秦代에는 20등으로 되어 있는 軍功爵 중에 19번째 등급으로, 가장 높은 등급인 徹侯의 다음 가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漢나라는 이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中國官制大辭典 關內侯》
역주16 明堂 : 원래는 周나라 천자가 上帝와 文王에게 제사를 지내고 중요한 典禮를 거행하던 건축물이라 한다. 鄭玄의 《周禮注》에는 “명당은 정교를 밝히는 당이다.[明堂者 明政敎之堂]”라고 하였다. 秦나라 때 없어졌던 것을 漢 武帝 元封 2년(기원전 109)에 다시 세우면서 泰一(전설상의 天神)과 五帝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이후에는 政事를 처리하는 기능을 겸하였다. 그 후 명당은 置廢를 거듭하는 가운데 후대의 황제들이 답습하였다. 《中國歷史大辭典 明堂》
역주17 靈臺 : 천문을 관측하는 臺로, 일설에는 周 文王이 세웠다고 하는 靈臺도 이러한 목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西漢 永始 4년(기원전 13)에 靑臺를 세웠는데, 후에 이를 靈臺로 개칭하였다. 이 역시 후대에 置廢를 거듭하였다. 《中國歷史大辭典 靈臺》
역주18 辟雍 : 商나라와 周나라 때 천자가 세웠던 大學이다. 東漢 이후에는 역대로 황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中國歷史大辭典 辟雍》
역주19 耆老 : 《禮記》 〈王制〉에 “耆老들이 모두 庠에 모인다.[耆老皆朝于庠]”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鄭玄의 注에 “致仕한 사람과 고령이면서 어진 고을 사람이다.[致仕及鄕中老賢者]”라고 하였다. 《禮記注疏 王制 鄭玄注》
역주20 : 사고본에는 ‘卞’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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