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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5)

대학연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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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公 作無逸注+① 周公作無逸:作此以戒成王.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注+② 君子所其無逸:所, 猶居也.이니라 先知稼穡之艱難注+③ 先知稼穡之艱難:種曰稼, 成曰穡.이오사 乃逸하면 則知小人之依注+④ 小人之依:依, 謂小人所恃以爲生也.하리이다
相小人혼대 厥父母 勤勞稼穡注+⑤ 相小……稼穡:相, 也.이어든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하고 乃逸하며 乃諺注+⑥ 乃諺:諺, 鄙語也.하며 旣誕注+⑦ 旣誕:誕, 妄言也.하나니 否則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注+⑧ 昔之人無聞知:昔之人, 指父母也.라하나니이다
周公曰 嗚呼 我聞호니 曰 昔在殷王注+① 殷王中宗:卽太戊也.하사 嚴恭寅畏注+② 嚴恭寅畏:四者, 皆敬也.하사 天命自度하시며 治民祗懼하사 不敢荒寧하시니 肆中宗之享國 七十有五年이시니이다
其在하산 舊勞于外하사 爰曁小人注+③ 爰曁小人:曁, 及也. 高宗爲太子時, 父乙令居民間習民事.이러시니 作其卽位注+④ 作其卽位:作, 起也.하사 乃或三年 不言注+⑤ 乃或……不言:亮, 信也. 陰, 默也.하시니 其惟不言하시나 言乃雍注+⑥ 言乃雍:雍, 和也.하시며 不敢荒寧하사 嘉靖殷邦하사 至于小大 無時或怨하니 肆高宗之享國 五十有九年이시니이다
其在하산 不義惟王이라하사 舊爲小人이러시니 作其卽位하사 爰知小人之依하사 能保惠于庶民注+⑦ 能保惠于庶民:保, 安也. 惠, 愛也.하시며 不敢侮鰥寡하시니 肆祖甲之享國 三十有三年이시니이다
自時厥後 立王 生則逸注+① 自時……則逸:謂商之後王也.하니 生則逸이라 不知稼穡之艱難하며 不聞小人之勞하고 惟耽樂之從하니
自時厥後 亦罔或克壽하여 或十年하며 或七八年하며 或五六年하며 或四三年하니이다
周公曰 嗚呼 厥亦惟我周 克自注+① 克自抑畏:抑, 也.하시니이다 으로 卽康功․田功하시니이다
徽柔懿恭注+② 徽柔懿恭:徽, 美也. 懿, 亦美也.하사 懷保小民하시며 惠鮮鰥寡하사 自朝 至于日中昃 不遑暇食하사 用咸和萬民하시니이다
文王 不敢盤于遊田注+③ 文王……遊田:盤, 樂也.하사 以庶邦惟正之供注+④ 以庶邦惟正之供:供, 貢也.하시니 文王受命 惟中身이러시니 厥享國 五十年이시니이다
周公曰 嗚呼 繼自今으로 嗣王 則其無淫于觀․于逸․于遊․于田注+① 其無……于田:淫, 過也.하사 以萬民惟正之供하소서 無皇曰 今日 耽樂이라하소서
乃非民 攸訓이며 非天 攸若이라 時人 丕則有愆하리니 無若殷王受之迷亂하사 酗于酒德哉하소서


31-8-가
주공周公이 〈무일無逸〉을 지어注+周公이 이 〈無逸〉편을 지어 周 成王을 경계시켰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군자는 ‘안일하지 않음[무일無逸]’을 처소로 삼습니다.注+‘所’는 ‘居(처소로 삼다)’와 같다. 먼저 농사의 고생스러움을 알고 나서야注+곡식을 파종하는 것을 ‘稼’라고 하고, 다 익은 곡식을 수확하는 것을 ‘穡’이라고 한다. 안일하면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注+‘依’는 백성들이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이른다.
백성들을 살펴보건대, 그들의 부모가 농사에 부지런히 애쓰면,注+‘相’은 ‘보다’라는 뜻이다. 그 아들은 농사의 고생스러움을 알지 못하고 안일하며 비루한 말을 하며注+‘諺’은 비루한 말이다. 망언을 하게 됩니다.注+‘誕’은 망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 부모를 업신여겨 ‘예전 사람들은 듣고 아는 것이 없다.’라고注+‘昔之人(예전 사람)’은 부모를 가리킨다. 말합니다.”
주공周公이 말하였다. “아. 제가 들으니, 옛날 나라 왕 중종中宗注+‘殷王 中宗’은 곧 殷나라 太戊이다. 때 장엄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注+‘嚴’, ‘恭’, ‘寅’, ‘畏’ 네 가지는 모두 敬이다. 천명天命으로 스스로를 검속檢束하며 백성을 다스림에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방탕하고 안일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중종의 재위 기간이 75년이었습니다.
고종高宗 때에는 오랫동안 바깥에서 수고하여 이에 백성들과 함께하였는데,注+‘曁’는 ‘및’이라는 뜻이다. 高宗이 태자로 있을 때, 부친 祖乙이 고종을 민간에 살게 하면서 백성의 일을 익히게 하였다. 떨쳐 일어나 왕위에 올라서는注+‘作’은 ‘일어나다’라는 뜻이다. 거상居喪하는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注+‘亮’은 ‘믿다’라는 뜻이다. ‘陰’은 ‘침묵하다’라는 뜻이다.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말을 하면 온화하였으며,注+‘雍’은 ‘온화하다’라는 뜻이다. 감히 방탕하고 안일하지 않아서 은나라를 훌륭하고 안정되게 만들어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혹시라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종의 재위 기간이 59년이었습니다.
조갑祖甲 때에는 왕이 되는 것이 의롭지 않다 하여 오랫동안 백성의 신분으로 있었는데, 떨쳐 일어나 왕위에 올라서는 이에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을 알아서 서민들을 능히 안정시키고 사랑하였으며,注+‘保’는 ‘안정시키다’라는 뜻이다. ‘惠’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홀아비와 과부들을 감히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조갑의 재위 기간이 33년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 즉위하는 왕들은 태어나면 곧 안일하였으니,注+‘自時厥後 立王生則逸’은 商나라 후대 왕들을 두고 한 말이다. 태어나면 곧 안일하였기에 농사의 고생스러움을 알지 못했으며 백성들의 노고를 듣지 못하고 오로지 향락에 빠지는 것을 좇았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 또한 혹 능히 장수했던 사람이 없어서 혹은 10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혹은 7년에서 8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혹은 5년에서 6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혹은 3년에서 4년 동안 재위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이 말하였다. “아! 그 또한 우리 나라의 태왕太王왕계王季께서는 능히 스스로 억누르고 두려워하였습니다.注+‘抑’은 ‘억누르다’라는 뜻이다. 문왕文王께서 변변치 않은 의복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업과 농사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름답게 유연하고 아름답게 공손하여注+‘徽’는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懿’ 또한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힘없는 백성들을 품어서 보전하였으며, 홀아비와 과부에게 은혜를 베풀어 살게 하여,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떠서 기울 때까지 먹을 겨를도 없이 분주하여 만백성을 모두 화합하게 하였습니다.
문왕께서 감히 유락遊樂과 사냥을 즐기지 않고서注+‘盤’은 ‘즐거워하다’라는 뜻이다. 여러 나라에서 정당하게 바치는 공물貢物만 받았습니다.注+‘供’은 ‘貢物’이라는 뜻이다. 문왕께서 천명을 받으신 것이 중년이었는데, 그 재위 기간이 50년이었습니다.”
주공周公이 말하였다. “아! 지금부터 계속하여 사왕嗣王께서는 구경, 안일安逸함, 유락遊樂, 사냥에 지나침이 없는 것을 본받아注+‘淫’은 ‘지나치다’라는 뜻이다. 만백성이 정당하게 바치는 공물貢物만 받으소서. 겨를이 있다고 여겨 오늘만 향락에 빠지겠다고 말하지 마소서.
백성들이 본받을 바가 아니며 하늘이 순하게 여기는 바가 아니어서 동시대 사람들이 그 잘못을 크게 본받을 것이니, 나라 왕 (주왕紂王)가 미혹되었던 것처럼 하여 주덕酒德에 탐닉하지 마소서.”


역주
역주1 31-8-가 : 《書經》 〈周書 無逸〉에 보인다. 孔安國과 蔡沈에 따르면, 周 成王이 親政을 시작했을 때 성왕이 안일에 젖을까 우려했던 周公이 〈무일〉을 지어 성왕을 훈도했다고 한다. 《尙書注疏 周書 無逸 孔安國傳》 《書集傳 周書 無逸》
역주2 : 대전본에는 ‘親’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3 中宗 : 생몰년과 재위 기간은 자세하지 않다. 은나라 제7대 임금 太戊로, 6대 임금인 雍己의 아우이다. 즉위한 후에 伊尹의 아들 伊陟을 相으로 삼았으며, 은나라를 중흥시켜 제후들이 귀의했기에 ‘중종’이라고 하였다. 《史記 卷3 殷本紀》
역주4 : 대전본에는 ‘命’으로 되어 있으나, 宋 宣祖 趙弘殷을 피휘한 것이다. 사고본에는 ‘商’으로 되어 있다.
역주5 高宗 : 생몰년과 재위 기간은 자세하지 않다. 은나라 제22대 임금 武丁으로, 21대 임금인 小乙의 아들이며, ‘고종’은 死後에 廟가 세워지고 붙여진 칭호이다. 즉위 직후에는 자신을 보좌할 적임자를 찾지 못하여 3년 동안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정사를 冢宰(총재)가 처결하게 하다가 현인 傅說(부열)을 등용하여 相으로 삼았으며, 정사를 일신하고 덕을 베풀어 쇠퇴해가던 은나라를 다시 부흥시켰다. 《史記 卷3 殷本紀》
역주6 : 사고본에는 ‘小’로 되어 있다.
역주7 亮陰 : 孔穎達에 따르면, ‘양암’은 王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居喪하는 3년 동안 冢宰를 믿고 침묵을 지켜서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이다. 《尙書注疏 商書 說命 上 孔穎達疏》
역주8 祖甲 : 생몰년과 재위 기간은 자세하지 않다. 殷나라 제24대 임금으로, ‘帝甲’이라고도 하며, 23대 임금 祖庚의 아우이다. 《書經》에서는 현군으로 묘사되었으나, 《國語》와 《史記》에 따르면 그가 음란하여 은나라가 다시 쇠퇴해졌다고 하였다. 《國語 周語 下》 《史記 卷3 殷本紀》
역주9 : 사고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역주10 太王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古公亶父(고공단보)를 가리킨다. 后稷의 12대손으로 公叔祖類의 아들이며, 周 文王의 조부이다. 덕을 쌓고 의를 실천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었다. 薰育의 戎狄이 핍박해 오자, 豳(빈) 땅을 떠나 岐山 아래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그의 인덕을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太伯, 虞仲, 季歷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계력의 아들 昌(文王)에게 상서로움이 있음을 알고 기대를 걸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이 스스로 荊蠻 지역으로 달아나자, 마침내 계력을 후계자로 삼았다. 《史記 卷4 周本紀》
역주11 王季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季歷’, ‘公季’라고도 한다. 古公亶父의 아들이자 文王의 부친이다. 太任이라는 어진 부인을 아내로 맞아 昌을 낳았으며, 의리를 실천하는 데 돈독하여 제후들이 순종하였다. 《史記 卷4 周本紀》
역주12 : 대전본에는 ‘仰’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13 : 사고본에는 ‘謙’으로 되어 있다.
역주14 文王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성은 姬, 이름은 昌으로, 古公亶父의 손자이자 王季의 아들로, 武王의 부친이다. 조부와 부친의 법을 본받아 어진 정사를 베풀자 여러 인재들이 귀의하였다. 崇侯 虎의 참소로 인하여 殷나라 紂王의 명으로 羑里(유리)에 수감된 적이 있으며, 풀려난 후에는 주왕에게 청을 올려 炮格(기름칠을 한 구리 기둥 밑에 숯불을 깔고 죄인에게 기둥 위를 걸어가게 했던 형벌)을 없애게 하였다. 西伯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려, 서백에게 獄訟의 판결을 부탁하러 온 虞나라 사람과 芮나라 사람이 주나라 경내로 와서 농부들이 밭두둑을 양보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끄러움을 느껴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또한 제후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문왕이야말로 천명을 받을 군주라며 칭송하였다. 말년에는 豐邑을 건설했으며, 풍읍으로 천도한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史記 卷4 周本紀》
역주15 卑服 : 孔安國과 蔡沈에 따르면, ‘卑服’은 文王이 검소했음을 가리킨다. 채침은 더 나아가 문왕이 궁실이나 음식 등과 같이 스스로를 봉양하는 수단들도 모두 검박하게 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尙書注疏 周書 無逸 孔安國傳》 《書集傳 周書 無逸》

대학연의(5)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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