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武帝太康中
에 王戎
이 爲司徒
요 이 爲尙書令
이요 이 爲河南尹
하여 皆善淸談
하여 宅心事外
하니 朝野
가 爭慕效之
하고
衍
이 與
으로 好題品人物
하며 澄及阮咸‧
‧
等
이 皆以任放爲達
하여 醉狂裸體
를 不以爲非
하더라
初
에 何晏等
이 祖述老莊
하여 立論以爲天地萬物
이 皆以無爲本
이니 無也者
는 하여 無往不存者也
라한대
衍等이 愛重之하니 由是로 士大夫가 皆尙浮誕하여 廢職業이어늘
裴頠
가 著崇有論
하여 以釋其蔽
하나 然習俗
이 已成
이라 亦不能救
注+未㡬, 惠帝立, 晉室大亂, ‧遂據中原.러라
13-9-가3
晉 武帝 太康 연간(280~289)에 王戎이 司徒가 되고 王衍이 尙書令이 되고 樂廣이 河南尹이 되어 모두 淸談에 뛰어나 세상사 밖에 마음을 두니 朝野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흠모하고 본받았다.
王衍은 동생 王澄과 인물을 품평하기 좋아하였다. 王澄과 阮咸‧謝鯤‧畢卓 등이 모두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통달하다고 여겨 술에 취해 미쳐서 벌거벗는 것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당초에 何晏 등이 老莊의 학설을 祖述하여 입론하기를 “천지 만물이 모두 無를 근본으로 하니 無라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드러내 밝혀 세상의 일을 성취시켜서 어디를 가든지 없는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王衍 등이 그를 사랑하고 중히 여기니,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들이 모두 허황된 것을 숭상하여 제 할 일을 폐기하자,
裴頠가 〈崇有論〉을 지어 그 폐단을 밝혔다. 그러나 풍조가 이미 굳어졌기 때문에 또한 바로잡을 수 없었다.
注+얼마 안 되어 晉 惠帝가 즉위하였는데, 晉室이 크게 혼란해져서 劉聰과 石勒이 마침내 中原을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