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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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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武帝太康中 王戎 爲司徒 爲尙書令이요 爲河南尹하여 皆善淸談하여 宅心事外하니 朝野 爭慕效之하고
으로 好題品人物하며 澄及阮咸‧ 皆以任放爲達하여 醉狂裸體 不以爲非하더라
何晏等 祖述老莊하여 立論以爲天地萬物 皆以無爲本이니 無也者 하여 無往不存者也라한대
衍等 愛重之하니 由是 士大夫 皆尙浮誕하여 廢職業이어늘
裴頠 著崇有論하여 以釋其蔽하나 然習俗 已成이라 亦不能救注+未㡬, 惠帝立, 晉室大亂, 遂據中原.러라


13-9-가3
晉 武帝 太康 연간(280~289)에 王戎이 司徒가 되고 王衍이 尙書令이 되고 樂廣이 河南尹이 되어 모두 淸談에 뛰어나 세상사 밖에 마음을 두니 朝野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흠모하고 본받았다.
王衍은 동생 王澄과 인물을 품평하기 좋아하였다. 王澄과 阮咸‧謝鯤‧畢卓 등이 모두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통달하다고 여겨 술에 취해 미쳐서 벌거벗는 것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당초에 何晏 등이 老莊의 학설을 祖述하여 입론하기를 “천지 만물이 모두 無를 근본으로 하니 無라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드러내 밝혀 세상의 일을 성취시켜서 어디를 가든지 없는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王衍 등이 그를 사랑하고 중히 여기니,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들이 모두 허황된 것을 숭상하여 제 할 일을 폐기하자,
裴頠가 〈崇有論〉을 지어 그 폐단을 밝혔다. 그러나 풍조가 이미 굳어졌기 때문에 또한 바로잡을 수 없었다.注+얼마 안 되어 晉 惠帝가 즉위하였는데, 晉室이 크게 혼란해져서 劉聰과 石勒이 마침내 中原을 차지하였다.


역주
역주1 13-9-가3 : 《資治通鑑》 卷82 〈晉紀4 惠帝 上之上〉 元康 7년(297) 조에 보인다.
역주2 王衍 : 256~311. 자는 夷甫로, 西晉 琅琊 臨沂 사람이다. 王戎의 從弟이다. 玄言을 잘하고 老莊의 학술에 대한 담론을 좋아하였다. 義理가 일정하지 않아 상황에 따라 잘 바꿨기에 사람들에게 ‘口中雌黃’이라 일컬어졌다. 처음에 太子舍人이 되었다가 黃門侍郞에 올랐다. 처음 八王의 난이 일어나 趙王 司馬倫이 賈后를 살해하고 그를 가후의 戚黨이라고 하여 구금하자,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목숨을 구했다. 이후 尙書令‧司空‧太尉 등의 顯職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經國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保身에만 급급했다. 司馬越이 太傅軍司로 삼았는데, 懷帝 永嘉 5년(311) 사마월이 죽자 石勒에게 사로잡혔다. 그에게 稱帝할 것을 권하면서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살해되었다.
역주3 樂廣 : ?~304. 자는 彦輔이다. 삼국시대 魏나라의 南陽 淯陽 사람이다. 淸言을 잘해 위나라의 征西將軍 夏侯玄의 총애를 받았다. 名敎를 숭상하여 당시의 放誕한 풍속을 비난하였다. 당시 王衍과 함께 명성이 높았다. 王戎의 천거로 秀才가 되었다. 이후 侍中‧河南尹을 거쳐, 尙書令이 되었다. 사위인 成都王 司馬穎이 長沙王 司馬義와 알력이 생기자 사마의의 의심을 받았는데, 이를 근심하다 죽었다.
역주4 弟澄 : 269~312. 자는 平子로, 당시에 阿平으로 불렸다. 西晉 瑯邪 臨沂 사람이다. 王衍의 동생이다. 成都王 司馬穎의 從事中郞으로 있을 때 孟玖가 陸機 형제를 음해하자 맹구를 죽일 것을 성도왕에게 권했다. 惠帝 말에 荊州刺史에 제수되었는데, 주색에 빠져 정무를 돌보지 않았고, 巴蜀의 流民들을 마구 학살하여 杜弢(도)의 난을 초래하였다. 나중에 軍諮祭酒가 되어 豫章을 지나다가 王敦을 만났는데, 왕돈에 의해 살해당했다.
역주5 謝鯤 : 281~323. 자는 幼輿로, 陳郡 陽夏 사람이다. 魏晉시대 세족인 謝氏의 일족으로, 謝安의 백부이다. 《老子》와 《易經》을 즐겨 읽었고 玄學을 숭상하였다. 성품이 활달하여 소소한 예의에 얽매이지 않았다. 王衍‧嵇紹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았고, 畢卓‧王尼‧阮放‧羊曼‧桓彝‧阮孚‧胡毋輔之 등과 함께 ‘江左八達’로 불렸다. 永昌 원년(322) 王敦이 ‘淸君側’을 명분으로 거병할 때 그의 長史로 있으면서 이를 만류하였다. 이후 왕돈에 의해 豫章太守가 되었으나 중용되지 않았다. 저서로 《謝鯤集》이 있다.
역주6 畢卓 : ?~?. 자는 茂世이다. 東晉 新蔡 鮦陽 사람이다. 元帝 太興 말에 吏部郞이 되었으나 술을 즐겨 직무를 돌보지 않았다. 溫嶠의 平南長史가 되었다. 謝鯤‧阮放 등과 교유하여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웃통을 벗은 채 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씩 내리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역주7 開物成務 : 《周易》 〈繫辭傳 上〉 제11장에 “易은 만물의 이치를 드러내 밝혀 세상의 일을 성취시키고 천하의 도를 포괄하니 易은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夫易 開物成務 冒天下之道 如斯而已者也]”라고 하였다. 주희는 《周易本義》에서 ‘開物成務’에 대해 “사람으로 하여금 卜筮를 통해 길흉을 알아서 사업을 이루게 하는 것을 이른다.[謂使人卜筮 以知吉凶而成事業]”라고 풀이하였다.
역주8 劉聰 : 위진남북조 시대 漢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310~318)이다. 자는 玄明이다. 匈奴 劉淵의 4남이다. 鹿蠡王을 지내고 부친 유연을 보좌하여 大司馬大單于가 되었다. 晉 懷帝 永嘉 4년(310)에 유연이 죽고 형 劉和가 즉위하자, 그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이어서 劉曜 등을 파견하여 낙양을 함락시키고 晉 懷帝를 죽였다. 晉 愍帝가 長安에서 즉위하자 역시 장안을 함락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역주9 石勒 : 後趙의 초대 황제(재위 319~333)로, 시호는 明帝, 묘호는 高祖이다. 자는 世龍이고, 上黨 武鄕 사람이다. 羯族이다. 20살 무렵 서진 병사에게 잡혀 山東에 노예로 팔렸다가 群盜의 수령이 되었다. 흉노의 劉淵이 漢나라를 건국하자 장군으로 임명되고, 永嘉 원년(307)에 산동과 河南의 경영을 맡았다. 晉나라 장군 王浚을 격멸하고 즉위하여 趙나라를 세웠다. 光初 11년(328)에 前趙의 劉曜를 洛陽에서 격파하여 전조를 멸망시킨 뒤 華北 일대에 세력을 떨쳤다. 나중에 佛僧 佛圖澄에 귀의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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