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1)

대학연의(1)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原注
3-10-나(按)
3-10-나(按)
按 宣帝之詔 以陰陽風雨之未時 由其不明六藝‧闇於大道라하시니 蓋人君 不明經‧不知道 則無以正心而修身이라
【臣按】 宣帝의 조서에서 陰陽과 風雨가 제때에 맞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신이 六藝에 밝지 않아 大道에 어둡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經에 밝지 않아 道를 알지 못하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자신을 수양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一念之不純‧一動之失中 皆足以奸陰陽之和
순일하지 않은 생각 하나, 中道를 잃은 행동 하나가 모두 음양의 조화를 해칠 수 있습니다.
故洪範 以雨‧暘‧燠‧寒‧風之時之應하고 五者之不時之應하니 人主之一心 與天地相爲流通하여 而善惡吉凶之符 甚於影響 蓋如此호대
이 때문에 《書經》 〈洪範〉에서 비‧햇볕‧더위‧추위‧바람이 제때에 맞느냐를 가지고 엄정함[肅]‧조리 있음[乂]‧지혜로움[哲]‧법도 있음[謀]‧통달함[聖]의 징험으로 여겼으며, 다섯 가지 징후가 제때에 맞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망령됨[狂]‧어긋남[僭]‧태만함[豫]‧급박함[急]‧몽매함[蒙]의 징험으로 여겼으니, 임금의 한 마음이 天地와 함께 流行하여 善惡과 吉凶의 징험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른 것이 대체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後世人主 鮮或知者어늘 而帝 獨知之하시니 可謂卓然有見矣
후대의 임금들은 혹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선제가 홀로 이를 알았으니 탁연히 식견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然其所吏民厥身修正‧通文學‧明先王之術者 乃寂無聞焉하니
그러나 선제가 등용한 관리와 백성 가운데 그 자신을 수양하여 올바르며 문학에 통달하고 선왕의 도에 밝은 자 가운데 마침내 寂然히 알려진 경우가 없습니다.
夫正身明道之士 誠世之所鮮有 使帝 果以誠求之 豈無一二近似者 出爲帝用이리오
자신을 바르게 하고 도에 밝은 선비가 참으로 세상에 드물기는 하지만, 만일 宣帝가 정말 성심으로 찾았다면 어찌 그에 가까운 사람 한두 명이라도 나와서 선제에게 등용되지 않았겠습니까.
原注
夷攷當時 惟一 粗欲建萬世之長策하여 而擧明主於三代之隆이어늘 已視爲迂闊矣
그 당시를 고찰해보면 오직 王吉 한 사람만이 그런대로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세워서 명철한 임금을 융성했던 三代의 임금 수준으로 올려놓고자 했는데, 선제는 그런 것을 벌써 오활하다고 여겼습니다.
使子思‧孟子 生乎其時하여 皇皇於仁義하고 而不汲汲於功利 其與帝 枘鑿 將有甚焉者
만약 子思와 孟子가 그 시대에 태어나 仁義를 시급히 여기고 功利에 급급해하지 않았다면, 둥근 장붓구멍에 모난 장부를 끼우듯 선제와 맞지 않는 것이 왕길보다 더 심했을 것입니다.
然則正身明道之士 窺見此指하고 其肯輕爲帝出哉
그렇다면 자신을 바르게 하고 도에 밝은 선비가 선제의 이런 뜻을 엿보고서 선뜻 선제를 위해 출사하려고 했겠습니까.
德을 가지고 仁을 실천하는 것은 王道이며, 무력을 가지고 仁을 가탁하는 것은 霸道입니다.
其爲道 若白黑之異色‧淸濁之異流 不可雜也 雜則黑與濁者 終勝矣리니
이 왕도와 패도의 길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이 색을 달리하는 것과 같고 맑은 물과 탁한 물이 물줄기를 달리하는 것과 같아서 섞일 수가 없으니, 섞인다면 검은색과 탁한 물이 끝내 이길 것입니다.
乃以覇‧王道雜으로 爲漢家之制度 可乎
그런데 선제는 패도와 왕도를 병용하는 것을 漢나라의 제도로 여겼으니, 이것이 옳겠습니까.
原注
且帝 嘗受論語矣시니
뿐만 아니라 宣帝는 일찍이 《論語》를 배웠습니다.
曰 道之以政하고 齊之以刑이면 民免而無恥
《논어》에 이르기를 “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려고 들 뿐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이라하시고 又曰 이리오하시니 則夫子之意 正欲人君 純任德敎也
德으로 인도하고 禮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또 善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였으며, 또 “그대가 정사를 행함에 있어 어찌 죽이는 형벌을 쓰겠는가.”라고 하였으니, 孔夫子의 뜻은 바로 임금이 순전히 德敎에 의지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선제는 또 일찍이 《書經》과 《春秋》를 學官에 세웠습니다.
孔子 定書 紀文‧武‧成‧康之政하사 爲後世法하시고 而春秋 尊王道‧黜覇術하시니 是夫子之意 正欲人君 純用周政也어시늘
공자는 《서경》을 編定할 때 文王‧武王‧成王‧康王의 정치를 기록하여 후세의 법이 되게 하였으며, 《춘추》에서는 王道를 존숭하고 覇道를 배척하였으니, 공부자의 뜻은 바로 임금이 순전히 周나라 德政을 행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乃曰 德敎 不可任이며 周政 不可用이라하시니
그런데도 선제는 마침내 “德敎는 의지할 수 없으며 周나라의 德政은 행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則是論語 不必受 書‧春秋 不必立也
그렇다면 이것은 선제가 《논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며 《서경》과 《춘추》를 학관에 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原注
俗儒 是古非今 固不足用이어니와 獨不當求眞儒而用之乎
俗儒가 옛것만 옳다 하고 지금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쓸 수 없다지만, 마땅히 眞儒는 찾아서 등용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以俗儒不達時宜 而幷儒之通世務者棄之而廢食也
俗儒가 時宜에 어둡다고 하여 儒者 중에 時務에 능통한 자들까지 아울러 버려둔다면, 이는 목이 메인다 하여 음식을 먹지 않는 격입니다.
以高材好學之君으로 而擇術 如此하니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하는 임금으로서 治術을 선택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是以 精爲政하여 雖能致一時之治하여 卒不免基後來之禍하니 惜哉로소이다
이 때문에 혼신을 다해 정치를 하여 비록 한때의 治世를 이룩할 수는 있었지만, 환관을 周公과 召公처럼 여기고 법률을 《詩經》과 《書經》처럼 여겨서 끝내 훗날의 재앙에 기반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으니, 안타깝습니다.
原注
以上 叙漢高‧文‧武‧宣之學이라
이상은 고조高祖 문제文帝 무제武帝 선제宣帝의 학문을 서술하였다.
역주
역주1 肅乂哲謀聖 : 蔡沈의 《書集傳》에 따르면 ‘肅’은 ‘엄정하다[嚴整]’, ‘乂’는 ‘조리가 있다[條理]’, ‘哲’은 ‘지혜롭다[智]’, ‘謀’는 ‘법도가 있다[度]’, ‘聖’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다[無不通]’라는 뜻이다.
역주2 狂僭豫急蒙 : 蔡沈의 《書集傳》에 따르면 ‘狂’은 ‘망령되다[妄]’, ‘僭’은 ‘어긋나다[差]’, ‘豫’는 ‘태만하다[怠]’, ‘急’은 ‘급박하다[迫]’, ‘蒙’은 ‘몽매하다[昧]’라는 뜻이다.
역주3 : 대전본에는 이 뒤에 ‘之’가 있다.
역주4 : 대전본에는 없다.
역주5 王吉 : ?~기원전 48. 자는 子陽으로, 琅邪 皐虞 사람이다. 五經에 달통했는데, 특히 《騶氏春秋》에 능하였다. 宣帝 때 그를 불러들여 博士‧諫大夫로 삼았다. 왕길은 선제에게 잘잘못을 논한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元帝가 즉위하여 다시 그를 諫大夫로 삼았으나 長安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죽었다.
역주6 以德……者覇 : 《孟子》 〈公孫丑 上〉 제3장에 보인다.
역주7 道之……且格 : 《論語》 〈爲政〉 제3장에 보인다.
역주8 子爲政焉用殺 : 《論語》 〈顔淵〉 제19장에 보인다.
역주9 又嘗……官矣 : 學官에 博士를 둔 것은 漢 文帝 때부터로, 文帝는 《魯詩》‧《齊詩》와 함께 晁錯‧張生의 《尙書》를 학관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春秋》는 景帝 때 《公羊春秋》가 《齊詩》 박사와 함께 처음으로 학관에 세워졌다. 그 뒤 武帝 때 와서는 《詩》‧《書》‧《易》‧《禮》‧《春秋》의 5經에 7家 박사를 두었는데, 《詩》는 《魯詩》‧《齊詩》‧《韓詩》를, 《書》는 歐陽和伯의 學을, 《易》은 楊何의 學을, 《禮》는 后倉의 學을, 《春秋》는 公羊學을 학관에 세웠다. 그러다가 宣帝 때 와서 박사를 증설하여 모두 14박사를 두었는데, 《詩》는 《魯詩》‧《齊詩》‧《韓詩》 3家의 學을 학관에 그대로 두고, 《書》는 《大夏侯尙書》‧《小夏侯尙書》 2家를 증설하여 《歐陽尙書》와 함께 모두 3家를 새로 두었으며, 《易》은 楊何에서 분화된 施讐‧孟喜‧梁丘賀 3家의 學을, 《禮》는 后倉에서 분화된 《大戴禮》‧《小戴禮》‧《慶氏禮》 3家의 學을, 《春秋》는 公羊學에서 분화된 嚴彭祖‧顔安樂 2家의 學을 새로 학관에 두었다. 宣帝는 이밖에 《穀梁春秋》도 학관에 세웠는데, 東漢 때 폐지되어 14박사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漢書 卷30 藝文志, 卷88 儒林傳》
역주10 : 대전본에는 ‘壹’로 되어 있다.
역주11 : 사고본에는 ‘勵’로 되어 있다.
역주12 刑餘……詩書 : 이 내용이 蓋寬饒가 宣帝에게 올린 封事에 보인다. 이때 宣帝가 한창 刑法을 시행하여 中尙書의 환관을 신임하자, 갑관요는 “지금 聖人의 道는 점점 폐기되고 儒學의 學術은 시행되지 않으며, 환관을 周公과 召公처럼 여기고 법률을 《詩經》과 《書經》처럼 여기고 있습니다.[方今聖道寖廢 儒術不行 以刑餘爲周召 以法律爲詩書]”라는 내용의 봉사를 올렸다. 《漢書 卷77 蓋寬饒傳》
역주13 : 대전본‧사고본에는 없다.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