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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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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5-9-나(按)
按 巧言令色之人 以虛僞勝이라 故鮮仁하고 剛毅木訥之人 以質實勝이라 故近仁하니
仁者 本心之全德이라 必致知하며 必力行然後 能造乎其地하나니 豈剛果樸鈍 所能遽得哉리오
然誠而不僞하며 質而不華 則其本心 未失이라 於仁 爲不遠矣 故曰近仁이라하시고
若好其言하며 善其色하여 致飾於外하여 求以悅人則其僞而不誠하며 華而不實하여 去本心也 遠矣 其能爲仁者 幾希 兩章之言 實相表裏
原注
由後世觀之컨대 安劉氏者 卒以禍漢室焉하니
未得爲仁人也而忠誠徇國하여 惟一無二하니 其質 近乎仁矣로되 惜其不學이라於是焉이요
若賢則不仁之尤者也 然樸忠之 難合而巧佞之士 易親이라
故不仁者 往往得志於世하여 治亂存亡 常必由此하나니 嗚呼 人主 其亦謹所擇哉니이다


原注
15-9-나()
[신안臣按]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은 헛됨과 거짓됨이 승합니다. 이 때문에 이 드뭅니다. 강하고 과단성 있고 질박하고 둔한 사람은 질박함과 성실함이 승합니다. 이 때문에 에 가깝습니다.
’은 본심本心의 온전한 입니다. 반드시 앎을 지극히 하고 반드시 힘써 행한 뒤에야 이 경지에 나아갈 수 있으니, 어찌 강하고 과단성 있고 질박하고 둔한 사람이 대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성실하고 거짓되지 않으며 질박하고 부화浮華하지 않으면 그 본심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에서 멀지 않으니, 그러므로 ‘에 가깝다[근인近仁]’라고 한 것입니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여 외면을 지극히 꾸며서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아마도 거짓되고 성실하지 않으며 부화浮華하고 실질이 없어서 본심과의 거리가 멀게 되니 능히 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드뭅니다. 두 의 말이 실로 서로 표리가 됩니다.
原注
후세의 입장에서 이를 살펴보면 유씨劉氏를 안정시킨 이는 바로 독실하고 우둔하며 질박하고 굳센 주발周勃이었고, 얼굴빛을 곱게 하고 아첨한 동현董賢과 같은 이는 끝내 이로써 한실漢室에 화를 끼쳤습니다.
주발은 한 사람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충성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한결같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았으니 그 질박함이 에 가깝지만 안타깝게도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그쳤습니다.
동현의 경우에는 불인不仁함이 더욱 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순박하고 충성스런 신하는 모이기 어렵고 교활하고 아첨하는 는 친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불인不仁한 사람이 자주 세상에서 뜻을 얻어 치란治亂존망存亡이 항상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는 법입니다. 아! 임금도 인재 선발을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역주
역주1 椎鈍木强之周勃 : 周勃(?~기원전 169)은 漢 高祖 劉邦을 도와 漢 王朝를 건국한 개국 공신이다. 본래 사람됨이 질박하고 굳세며 돈후하였고, 文辭와 예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儒生이나 遊說客을 접견할 때에도 賓主의 예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상석에 앉아 “나를 위해 빨리 말하시오![趣爲我語]”라고 말하곤 했다. 고조는 주발에게 중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여겨 呂后에게 “유씨의 천하를 안정시킬 이는 틀림없이 주발일 것이다.[安劉氏天下者 必勃也]”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高祖가 붕어하자 惠帝 劉盈을 보좌하여 혜제 6년(기원전 189)에 太尉가 되었다. 呂后가 專權을 행하고 呂氏가 발호하자 기회를 엿보다가 여후의 사후에 陳平 등과 모의하여 呂氏 일족을 주살하고 文帝를 옹립하여 漢室을 안정시켰다. 관직이 丞相에 이르렀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주발에 관한 자세한 행력은 앞의 주석 62) 참조.
역주2 令色諛言如董賢 : 董賢(기원전 22~기원전 1)은 자가 聖卿으로 馮翊 雲陽 사람이다. 漢 哀帝 劉欣의 寵臣이다. 처음에 太子舍人으로 있다가 綏和 2년(기원전 7)에 哀帝가 즉위하자 郞官이 되었다. 애제가 그의 아름다운 용모를 매우 좋아하여 黃門郞으로 승진시켰다. 이로부터 동현에 대한 애제의 총애는 날로 커져서 駙馬都尉 侍中으로 삼아 출입할 때 수레에 동승시키고 항상 가까이서 자신을 侍奉하도록 하였다. 한 달 사이에 얻은 賞賜가 1億 錢에 달하기도 하였다. 동현은 성정이 유화하고 애제의 의중에 영합하기를 잘하여 아첨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애제는 동현의 누이를 후궁으로 맞이하여 昭儀로 삼고 동현을 高安侯로 삼아 식읍 1천 호를 봉하였으며 얼마 후에 다시 2천 호에 봉하였다. 심지어 동현을 大司馬에 임명하여 三公의 반열에 두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에 불과했다. 元壽 2년(기원전 1)에 애제가 죽자 얼마 안 되어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자결하였다.
역주3 : 대전본에는 없다.
역주4 : 사고본에는 ‘言’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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