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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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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立太子러시니 林甫 探帝意하여 數稱道壽王而帝意 自屬忠王注+, 卽肅宗也.이라 壽王 不得立하다
太子 旣定 林甫 恨謀不行하고 且畏禍하여 乃陽善하니
太子妃兄也 使任要職하여 將覆其家하여 以搖東宮하며
又因柳勣父有隣 變事하여 欲以及太子하다가 皆不果하다
未幾 使濟陽別駕魏林으로 誣河西節度使 欲擁兵佐太子라하고 林甫 曰 太子 宜知謀라한대
曰 吾兒 在內하니 安得與外人相聞이리오 妄耳로다
林甫 數危太子호대 太子 自以謹孝聞이라 內外無惎注+惎, 也.하니 故飛語 不得入하니라


19-10-가1
현종玄宗이 태자를 세우려 했는데 이임보李林甫가 현종의 뜻을 살피고서 자주 수왕壽王을 칭찬하여 말하였다. 현종의 뜻은 본래 충왕忠王에게 있었기 때문에注+충왕忠王’은 이름이 (여)이니 바로 숙종肅宗이다. 수왕壽王이 태자가 되지 못하였다.
태자가 정해지고 나자 이임보는 계책이 실현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또 후환을 두려워하여 이에 겉으로는 위견韋堅과 잘 지내는 척하였다.
이임보는 위견이 태자비의 오빠이기 때문에 요직을 맡게 하여 장차 태자비의 가문을 전복시켜 동궁의 입지를 흔들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유적柳勣을 통해 두량제杜良娣의 아버지 두유린杜有隣이 모반을 꾀했다고 아뢰어 태자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하려고 하다가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임보가 제양별가 위림濟陽別駕 魏林을 시켜 하서절도사 왕충사河西節度使 王忠嗣가 군대를 거느리고 태자를 보좌하고자 하였다고 무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임보가 말하였다. “태자가 당연히 역모를 알았을 것입니다.”
현종이 말하였다. “내 아이가 궁중에 있으니 어떻게 외부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터무니없는 말일 뿐이다.”
이임보가 여러 차례 태자를 위험에 빠뜨렸지만 태자는 본래 삼가고 효성스러운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안팎으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注+’는 ‘(헐뜯다)’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유언비어가 현종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19-10-가1 : 《新唐書》 卷223上 〈姦臣列傳 李林甫〉에 보인다.
역주2 忠王名璵 : 16-7-가의 ‘肅宗’ 주 참조.
역주3 韋堅 : ?~747. 자는 子金이다. 唐나라의 대신이다. 京兆 萬年 사람이다. 부친은 兗州刺史 韋元珪이다. 누이동생은 開元 연간에 太子 李亨의 妃가 되었다. 秘書丞, 奉先令, 長安令 등을 역임하고 玄宗 天寶 元年(742)에 陝郡 太守‧水陸轉運使에 올랐다. 民工을 조발하여 渭水의 漕運을 개통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후에 江淮租庸‧轉運‧處置使를 겸임하고 천보 2년 4월에 銀靑光祿大夫‧左散騎常侍‧陝郡 太守‧水陸轉運使가 되었고, 천보 3년에 御史中丞을 겸하고 韋城男에 봉해졌다. 본래 李林甫와 인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친근하였으나, 위견이 宰相이 될 뜻을 품고 이임보의 정적이었던 李適之와 친밀해지자 이임보의 시기를 받았다. 천보 4년(745)에 이임보의 계책으로 형부 상서로 승진하였으나 여러 使職에서 체차되어 권세를 잃었다. 천보 5년(746) 정월에 河西 節度使‧鴻臚卿 皇甫惟明 등과 태자를 옹립하려고 하였다는 이임보의 무함을 받아 縉雲 태수로 폄척되었다가 江夏 別駕로 강등되었다. 다시 이적지 등과 붕당을 이루었다는 무함을 받아 嶺南의 臨封으로 유배되었고 천보 6년(747)에 賜死되었다.
역주4 杜良娣父有隣 : 杜有隣은 唐 肅宗이 되는 忠王 李亨이 총애하던 姬妾인 杜良娣의 부친이다. 太子東宮의 관속인 贊善大夫를 지냈다. 평소 사위인 左驍衛 兵曹 柳勣과 불화하였다. 玄宗 天寶 5년(746)에 유적은 두유린이 圖讖을 망령되게 일컬으며 동궁과 결탁하여 乘輿를 指斥하였다고 무고하였다. 宰相 李林甫는 京兆 士曹 吉溫 등에게 심문을 담당시켜 獄案을 확대하여 李邕‧王曾 등을 연루시켰고 결국 杖殺되었다. 장차 태자 이형에까지 미치려 하자, 화를 입게 될 것을 염려한 태자 이형은 환관 李輔國을 파견하여 두양제와의 이혼을 선포하고 폐서인시켰다.
역주5 良娣 : 唐代의 東宮 內官의 명호이다. 품계는 정3품이고, 지위는 太子妃의 아래였으며, 開國侯에 견주었다.
역주6 王忠嗣 : 706~749. 唐나라의 명장이다. 초명은 訓이다. 華州 鄭縣 사람이다. 玄宗 開元 2년(714)에 부친 左金伍大將軍 王海賓이 吐蕃과의 松州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자, 현종이 그를 假子로 삼고 ‘忠嗣’로 賜名하여 궁중에서 양육하였기 때문에 忠王 李亨과 친분이 두터웠다. 이후 서북 변경의 吐蕃, 契丹, 奚, 突厥, 吐谷渾 등의 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천보 5년(746)에 河西‧隴右‧朔方‧河東 4鎭의 節度使를 겸임하였으며 金紫光錄大夫에 가자되고 淸源縣公에 봉해졌다. 천보 6년(747)에 董延光이 자원한 토번의 石堡城 공략을 반대하였으나 현종의 명령으로 출병하였다가 동연광의 무함을 받았다. 아울러 이임보의 사주를 받은 濟陽 別駕 魏林이 태자를 옹립하고자 한다고 무함하여 極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막하의 哥舒翰이 구원하였으나 漢陽 太守로 폄적되고 이듬해에 漢東郡 태수로 옮겼다. 천보 8년(749)에 죽었다.
역주7 : 대전본에는 ‘問’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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