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13-9-나(按)
[臣按] 淸談의 폐단이 曹魏에서 시작되어 蕭梁에서 끝났습니다. 처음에는 老子와 莊子로 宗主를 삼았고,
종국에는 老子와 莊子를 위해 일하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던 자가 있었으니 저들은 老氏가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有生於無]”라고 한 것만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何晏과 王弼의 무리가 玄虛의 이론을 만들어서 형체가 있는 사물을 모두 芻狗처럼 여겨 옳음과 그름, 생성과 사멸을 조금도 개의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신하는 반드시 충성할 필요가 없으며 자식은 반드시 효도할 필요가 없으며 예법을 반드시 일삼을 필요가 없으며 威儀를 반드시 강구할 필요가 없고,
오직 공허하고 얽매이는 마음이 없어 사물에 물들지 않는 자만이 곧 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선왕의 가르침에서 허여하는 것도 아니며 老氏의 本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原注
老氏는 “천하의 사물이 有에서 생겨나는데,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처음에는 없었다가 지금은 생겼다는 것인데 何晏 등은 마침내 만물을 모조리 無로 귀착시켰으니, 이것이 어찌 老氏의 本旨이겠습니까.
우리 儒家의 입장에서 말하면, 형이상의 것은 이치이고 형이하의 것은 사물입니다. 이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이 사물이 있는 것이고 이 사물이 있으면 이 이치가 갖추어져 있으니, 이치와 사물 이 두 가지는 애당초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아직 사물이 있기 전에 ‘無’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지만 이치가 이미 여기에 갖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無’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老氏의 설이 이미 잘못된 것인데, 청담을 하는 자들이 또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原注
우리 儒家의 道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은 하나라도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에게 있는 이치 또한 하나라도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세우는 것은 실제로 의지를 두는 것을 위주로 하며,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실제로 시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학문을 講磨하는 것은 실제로 보이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며,
일을 행하는 것은 실제로 쓰는 것을 공효로 여깁니다. 이것은 堯임금‧舜임금‧周公‧孔子가 서로 전수한 올바른 법입니다.
原注
何晏‧王戎‧王衍에서부터 殷浩까지 이 모두가 비록 공허하고 오묘한 이치를 고상하게 담론하였지만 세상의 명성‧총애‧권세‧이익에 그 마음을 깊이 두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안은 삼공의 지위를 도모하였고, 왕융은 상아로 만든 주판을 잡고서 재물을 모았고, 왕연은 영화를 누리면서도 화를 피할 궁리를 했고, 은호는 빈 서찰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비루하고 추잡하고 탐욕스럽고 인색한 마음이 보통 사람보다도 더욱 심하였으니, 하안의 무리가 명성‧총애‧권세‧이익을 ‘有’라고 여긴 것인지, ‘無’라고 여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토록 좋아하여 깊이 추구하였으니 이는 틀림없이 ‘有’라고 여긴 것입니다. 어찌 세상의 만물을 전부 無라고 하면서도 유독 이것만은 참으로 ‘有’라고 한단 말입니까.
그들을 초연히 만물의 밖을 벗어난 老氏의 無爲와 無欲, 千金의 예물과 三公의 지위로 불렀을 때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던 莊子와 비교해보면 과연 어떻습니까.
이것은 이른바 ‘老子와 莊子를 위해 일하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던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