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爲太子
에 는 善書
하고 은 善
라 俱出入東宮
하여 娛侍太子
러니
叔文이 譎詭多計하여 自言讀書知治道라하니 遂大愛幸하여 與王伾로 相依附러라
하사 常深居施簾帷
하시고 獨宦官李忠言‧昭容牛氏
가 侍左右
하여 百官奏事
를 自帷中
奏
러니
하니 大抵計事
에 叔文
은 依伾
하고 伾
는 依李忠言
하고 忠言
은 依牛昭容
하여 轉相交結
이라
每事
를 先下翰林
하여 使叔文可否然後
에 宣於中書
어든 가 承而行之
注+執誼以黨伾等得宰相.하고
外黨則韓泰‧柳宗元‧劉禹錫等이 主采聽外事하여 謀議唱和하여 日夜에 汲汲如狂하여
互相推獎하여 曰伊‧曰周‧曰管‧曰葛이라하고 僴然自得하여 謂天下無人이라하여
榮辱進退가 生於造次하여 惟其所欲이요 不拘程式하니 士大夫가 畏之하고 道路가 以目하더라
20-4-가
순종順宗이 태자였을 때 한림대조 왕비翰林待詔 王伾는 글씨를 잘 쓰고 왕숙문王叔文은 바둑을 잘 두어서 모두 동궁에 드나들며 태자를 모시고 즐겁게 하였다.
왕숙문이 속임수에 능하고 꾀가 많아 스스로 말하기를 책을 읽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안다고 하자, 순종은 마침내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그리하여 왕숙문은 왕비와 서로 의지하였다.
순종順宗은 즉위한 뒤에 병이 있어 늘 궁궐 깊숙이 거처하며 발이나 휘장을 드리우고 오직 환관 이충언李忠言과 소용 우씨昭容 牛氏만이 좌우에서 시봉하여 백관이 상주上奏한 일을 휘장 안에서 그 상주를 재가하였다.
순종이 왕비王丕를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임명하고 왕숙문王叔文을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임명하니, 대체로 일을 계획할 때 왕숙문은 왕비를 따르고 왕비는 이충언을 따랐으며 이충언은 우소용을 따라서 돌아가며 서로 결탁하였다.
순종順宗이 매사를 먼저
한림원翰林院에 내려
왕숙문王叔文으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결정하게 한 후에
중서성中書省에 선포하면
위집의韋執誼가 이를 받들어 행하였다.
注+위집의韋執誼는 왕비王丕 등과 붕당을 지음으로써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외정外廷의 당여黨與로는 한태韓泰‧유종원柳宗元‧유우석劉禹錫 등이 주도적으로 조정의 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함께 모의하고 맞장구치며 밤낮으로 미친 사람처럼 다급히 서둘렀다.
서로 추켜세우고 칭찬하여 ‘이윤伊尹이네’, ‘주공周公이네’, ‘관중管仲이네’, ‘제갈량諸葛亮이네’라고 칭하여 뻐기고 의기양양해하며 천하에 인재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포폄褒貶과 출척黜陟이 순간의 결정에서 나와 오직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규정에 구애받지 않으니, 사대부들이 두려워하고 길 가는 사람들은 눈짓만 할 뿐 〈말을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