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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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尉(태위)하시니 乳母王聖 緣恩放恣하고
聖女伯榮 出入宮掖하여 傳通姦賂하고 中常侍 分威共權하여 屬託州郡하며 傾動大臣하고
又詐作詔書하여 調發司農錢穀하여 各起園宅廬觀하니 役費無數어늘
數上疏切諫한대 不平之而豐等 皆側目憤怨이러니 尋有河間男子趙騰 詣闕上書하여 指陳得失이어늘
하여 收考이어늘
楊震楊震
復上救之한대 不省하시고 竟誅騰하시다
豐等 遂共譖震云 自趙騰死後怨懟라하여늘 遣使者하여 收震印綬러시니
豐等 復譖之어늘 詔遣還本郡이러니 行至城西하여 乃慷慨謂其諸子門人曰
蒙恩居하여 疾姦臣狡猾而不能誅하고 惡嬖女傾亂而不能禁하니 何面目復見日月이리오 因飮酖卒하다


22-14-가
한 안제漢 安帝양진楊震책립冊立하여 태위太尉로 임명하였다. 이 당시에 안제의 유모 왕성王聖이 안제를 양육한 은혜로 인하여 방자하게 굴었으며,
왕성의 딸 백영伯榮이 황궁을 드나들면서 간사한 자들의 뇌물을 전달하고 중상시 번풍中常侍 樊豐 등이 위세를 나누어 갖고 권력을 공유하여 주군州郡에 청탁을 넣고 대신大臣을 좌지우지하였다.
또 번풍 등이 조서詔書를 거짓으로 만들어서 사농司農의 돈과 곡식을 조발調發하여 저마다 동산이 딸린 저택과 누대樓臺를 지으니 공역의 비용을 헤아릴 수 없었다.
양진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극간極諫을 하자, 안제가 이를 언짢아하였으며 번풍 등이 모두 흘겨보며 분노하고 원망하였는데, 얼마 뒤에 하간河間의 남자 조등趙騰이 대궐로 와서 글을 올려 잘잘못을 지적하여 서술하였다.
그러자 안제가 노하여 조등을 조옥詔獄으로 잡아들여 조사하였다. 양진이 다시 상소上疏하여 조등을 두둔하자 안제가 이를 살펴주지 않고 마침내 조등을 주살하였다.
번풍 등이 마침내 함께 다음과 같이 양진을 참소하였다. “조등이 죽은 뒤로 깊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안제가 사자를 보내어 양진의 인수印綬를 회수하였다.
번풍 등이 다시 양진을 참소하자 안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양진에게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양진이 길을 떠나 낙양성洛陽城 서쪽에 도착하여 마침내 울분을 터뜨리면서 자식들과 문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성은을 입어 상사上司의 자리에 있으면서 간신의 교활함은 미워하면서도 간신을 주살하지 못하고 총희寵姬가 환란을 일으키는 것을 미워하면서도 막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해와 달을 보겠는가.” 양진이 그대로 독을 마시고 죽었다.


역주
역주1 22-14-가 :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資治通鑑》 卷50 〈漢紀42 安帝 中〉 延光 2년(123) 기사에 보인다.
역주2 漢安帝 : 94~125(재위 106~125). 後漢 제6대 황제 劉祜(유호)이다. 章帝의 손자이며 淸河王 劉慶의 아들이다. 延平 元年(106)에 殤帝(상제)가 죽자 鄧太后의 詔書에 따라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국가의 위기가 가중되었다.
역주3 : 대전본‧사고본에는 ‘時’로 되어 있다.
역주4 楊震 : ?~124. 漢 安帝 때의 대신이다. 자는 伯起로, 弘農 華陰 사람이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했으며 桓鬱에게 《尙書》를 배웠다. 경전에 널리 통달하여 ‘關西孔子 楊伯起’로 일컬어졌다. 50세에 처음 출사하여 여러 고을의 군수를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처신하였다. 安帝 즉위 후 太僕, 司徒 등을 거쳐 延光 2년(123) 10월에 劉愷(유개)의 후임으로 太尉가 되었다.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아 환관과 외척들을 탄핵했다가 그들의 미움을 샀다. 결국 모함을 당하여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詔書를 받고 귀향하던 중 几陽亭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역주5 : 사고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역주6 樊豐 : ?~125. 東漢 安帝 때의 환관으로, 延光 3년(124)에 中常侍가 되었다. 안제의 유모 王聖 등과 결탁하여 태자 劉保를 폐위시켰으며, 大將軍 耿寶에게 楊震의 죄를 탄핵하여 양진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안제가 죽고 順帝가 즉위한 뒤에 閻太后가 집권하여 경보를 삭탈관직했을 때 경보와 연루되어 옥사하였다.
역주7 詔獄 : 詔書를 받들어 체포한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다. 《漢書辭典 詔書》
역주8 : 대전본‧사고본에는 ‘書’로 되어 있다.
역주9 : 대전본‧사고본에는 ‘用’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上司 : 《後漢書》 〈郞顗(낭의)傳〉의 李賢 注에 “‘上司’는 司馬를 말한다. 光武帝 建武 27년(50)에 太尉로 개칭하였다.[上司 謂司馬也 建武二十七年改爲太尉]”라는 내용이 보인다.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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