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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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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20-15-나2(按)
按 祖禹之論 善矣 然士良所謂可以得志者則未然也
20-15-나2(按)
[臣按] 范祖禹의 논의가 훌륭합니다. 그러나 仇士良이 말한 “뜻한 바를 달성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夫人主 修德講學則天下하여 昆蟲草木 亦皆得所어든 況左右之臣 其有不得
무릇 군주가 덕을 닦고 학문을 강마하면 천하가 안정되어서 곤충과 초목도 모두 제자리를 얻는데, 하물며 좌우의 신하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人主 德不修하며 學不講則天下하여 昆蟲草木 亦皆失所어든 況左右之臣 其有得
군주가 덕을 닦지 않고 학문을 강마하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곤충과 초목도 모두 제자리를 잃는데, 하물며 좌우의 신하들이 제자리를 얻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原注
하고 漢業 壞而張‧趙注+.어늘
그러므로 秦나라가 위태해지자 李斯와 趙高가 죽임을 당하였고, 漢나라 왕업이 무너지자 張讓과 趙忠이注+趙忠과 張讓이다. 주살되었던 것입니다.
士良 小人이라 但知以竊權固寵으로 爲榮而不知國敗家亡則權寵 亦無自保之理하니
仇士良은 소인이었기 때문에 권세를 훔치고 총애를 굳건히 하는 것을 영화로 여길 줄만 알았지, 나라가 망하면 권세와 총애도 마찬가지로 자연히 보전될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故士良 用事五朝하여 身雖幸免而破家之禍 卒貽於身後하니 曷若 不貪權溢寵하여 爲能保其身哉
이 때문에 구사량이 다섯 황제의 조정에서 권력을 전횡하여 그 자신은 비록 요행히 화를 면했지만 집안이 망하는 재앙이 끝내 그가 죽은 뒤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어찌 馬存亮의 무리와 같이 권세를 탐하지 않고 총애를 과도하게 바라지 않아 자신을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然士良之言 自古姦臣之所未道 爲人主者 宜寫此一通하여 置之坐側하고 必近儒하며 必親經史
그러나 구사량의 말은 예로부터 간신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니, 군주가 이를 한 부 써서 자리 곁에 두고 반드시 유생을 가까이하고 반드시 經史를 가까이해야 할 것입니다.
則奢 不能惑하며 不能리니 否則有不爲士良輩 所愚者리이다
그러면 사치가 현혹시킬 수 없을 것이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총명을 가리지 못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구사량과 같은 무리에게 우롱당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 사고본에는 이 뒤에 ‘者’가 있다.
역주2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3 : 사고본에는 이 뒤에 ‘者’가 있다.
역주4 秦室危而斯高僇 : 趙高(?~기원전 207)는 본래 秦나라 종실의 후손이라고도 하고 趙나라 종실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秦나라 궁궐에 들어와 환관이 되어 中車府令에 임명되었다. 秦 始皇 사후 丞相 李斯와 함께 시황의 遺詔를 위조하여 시황의 公子 胡亥를 二世 황제로 옹립하고 스스로 郞中令이 되었다. 정권을 전횡하였으며 가혹한 정치를 행하였다. 이세 2년(기원전 208)에 이사를 모함하여 죽이고 승상이 되었다. 이세 3년에 이세를 자살시키고 시황의 장자였던 扶蘇의 아들 子嬰을 옹립하였으나 얼마 뒤에 자영에게 피살되었다. 李斯(?~기원전 208)는 楚나라 上蔡 사람이다. 荀子에게 帝王學을 배웠다. 진나라에 들어가 처음에는 呂不韋의 舍人이 되었다가 뒤에 秦 始皇에게 유세하여 客卿이 되었다. 關東 6國의 군신을 이간질하여 진나라의 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통일 후에는 승상이 되어 焚書를 단행하고 車軌‧문자‧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진 시황 사후 조고와 함께 시황의 遺詔를 위조하여 시황의 장자인 扶蘇를 자살시키고 公子 胡亥를 二世 황제로 옹립하였다. 뒤에 조고의 모함을 받아 秦 二世 2년에 咸陽의 저자에서 腰斬을 당하였다. 관련 내용은 18-4-가, 18-6-가 참조.
역주5 趙忠 : ?~189. 동한 말기의 환관으로, 十常侍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금의 하북성 冀州市 安平縣인 冀州 安平 사람이다. 桓帝‧靈帝 때 小黃門, 中常侍, 大長秋, 車騎將軍 등을 역임하고 都鄕侯에 봉해졌다. 영제의 총애를 받아 영제에게 ‘나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었다. 권력을 전횡하였으며 영제를 부추겨 세금을 늘리고 궁실을 지으며 공개적으로 매관매직을 하도록 하였다. 189년에 영제가 죽은 뒤 환관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던 대장군 何進을 죽였으나, 얼마 뒤 이 소식을 들은 袁紹‧袁術 등에게 피살되었다.
역주6 張讓 : ?~189. 동한 말기의 환관으로, 十常侍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금의 하남성 禹縣인 潁川 사람이다. 桓帝‧靈帝 때 小黃門, 中常侍 등을 역임하고 列侯에 봉해졌다. 영제의 총애를 받아 영제에게 ‘나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다. 趙忠과 함께 권력을 전횡하였다. 189년에 영제가 죽은 뒤 환관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던 대장군 何進을 죽였으나, 얼마 뒤 이 소식을 들은 袁紹‧袁術 등에게 쫓겨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었다.
역주7 馬存亮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당나라 때의 환관이다. 자는 季明이며 河中 사람이다. 德宗부터 文宗까지 여섯 황제를 섬겼다. 단아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군사들을 잘 길러서 그가 禁衛軍을 떠날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憲宗 元和(805~819) 연간에 左神策中尉에 임명되었는데, 軍籍에 올라 있는 10여만 명 군사들을 엄선하여 伍에는 약한 군사가 없었으며 部에는 쓸데없는 인원이 없었다고 한다. 敬宗(재위 824~826) 초에 蕭玄明의 난을 평정한 공이 가장 커서 二百戶에 봉해졌으나, 권세를 회피하여 外地로 나가서 淮南軍을 감독할 것을 청하였다. 文宗 大和 연간에 右領軍衛上將軍으로 致仕하여 岐國公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揚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
역주8 : 사고본에는 ‘不’로 되어 있다.
역주9 : 사고본에는 ‘臣’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 사고본에는 이 뒤에 ‘之’가 있다.
역주11 : 사고본에는 이 뒤에 ‘之’가 있다.
역주12 : 사고본에는 이 뒤에 ‘也必’ 2자가 있다.
역주13 : 사고본에는 없으나, 脫文으로 추정된다.

대학연의(4)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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