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程頤는 일찍이 논하기를 “楊朱와 墨翟의 해로움은 申不害와 韓非子보다 더 심하다. 양주의 爲我(자신만을 위하는 것)는 義인가 의심스럽고 묵적의 兼愛(두루 사랑하는 것)는 仁인가 의심스럽다.
신불해와 한비자의 설은 식견이 낮아서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맹자가 양주와 묵적만 배척한 것이니, 이 두 설이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킴이 심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爲我가 義인가 의심스러운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義는 이치를 따르고 情이 없으니, 양주는 자신 한 몸 외에는 전혀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이 義와 유사합니다.
兼愛가 仁인가 의심스러운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仁은 은혜를 높이고 사랑을 주장하니, 墨翟은 親疎간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이 仁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하의 이치가 근본은 하나이나 나뉘면 달라진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原注
그러므로 군자는 五服의 친속을 친히 하고 일반 사람들을 사랑하며, 일반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껴서, 마음이 두루 미치지 않은 바가 없으면서도 그 마음을 쓰는 데에는 차례가 있습니다. 마음이 두루 미치지 않은 바가 없으니 爲我가 아니며, 그 마음을 쓰는 것에 차례가 있으니 兼愛가 아닙니다.
그런데 楊朱는 爲我만을 오로지 주장했으니 이는 이치는 하나라는 것에 어두운 것이며, 墨翟은 겸애만을 오로지 주장했으니 이는 나뉘면 달라진다는 것에 어두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데도 이를 仁義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仁義를 해치는 이유입니다.
무릇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양주는 단지 자신을 아낄 줄만 알아서 자신을 바치는 義는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확립하는 것은 반드시 친속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묵적은 사랑에 차등이 없어서 지극히 가까운 친속을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비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없어진 것이니, 이 또한 금수일 뿐입니다.
原注
‘閑’은 ‘보위하다’라는 뜻이니, 양주와 묵적을 막고 淫辭를 배척하며 邪說을 물리치는 것이 바로 先聖의 도를 보위하는 방법입니다.
천하의 治亂은 그 근원이 실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니, 邪說이 한번 그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음에서 발로되어 일에 해로움을 끼치고 일에서 발로되어 정사에 해로움을 끼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일’은 정사의 조목이며, ‘정사’는 일의 강령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빗나가면 하나의 일이 어그러지고, 하나의 조목이 무너지면 큰 강령이 마찬가지로 따라서 무너지게 되니,
이것이 邪說을 물리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며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原注
禹王은 홍수를 막고, 周公은 夷狄을 兼倂하고 맹수를 몰아내며, 공자는 《春秋》를 지었으니, 일은 비록 다르나 천하의 환난을 구제하고 生民의 표준을 확립하였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맹자의 마음 역시 세 聖人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뒤에 다시 “양주와 묵적의 邪說을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聖人의 무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의 학문하는 자들을 권면하여 모두 이단을 물리치고 正道를 붙드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서, 사람들이 서로 끌고 금수가 되는 지경까지 빠져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맹자의 공이 禹王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