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孟子가 “湯王이 伊尹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다.”라고 하고 또 “탕왕과 武王은 몸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成湯이 聖人이 된 것은 학문을 통해 들어간 것인데, 그가 순일한 덕을 갖게 된 이유는 이윤의 보좌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윤이 이에 이르러 또 순일한 덕을 제시하여 太甲에게 고하였으니, ‘一’은 무엇이겠습니까?
순수하여 섞이지 않고 떳떳하여 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吉과 凶은 선과 악의 報應이니, 사람의 덕을 잡음이 善에 순일하고 떳떳할 수 있다면 동하는 때마다 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善에 순일하지 않아서 인욕이 뒤섞이며 선에 떳떳하지 않아서 인욕이 끼어들면 그 덕을 순일하게 하지 못해서 동하는 때마다 凶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입니다.
原注
《周易》에서 날로 새롭게 함을 盛德이라고 하였으니, 先儒가 말하기를 “사람의 학문이 날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퇴보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은 날로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날로 새롭게 하지 않는 것은 순일하지 않음이 해친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끝에는 게을러지고 처음에는 공경하다가 끝에는 방자해져서, 들락날락하는 마음으로 하다 말다 하는 일을 행한다면 덕이 어떻게 새로워지겠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떳떳하고 순일하게 해서 변하지 않으면 덕이 날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덕은 일정한 명칭이 없기에 凶도 있고 吉도 있으니, 장차 무엇을 택하여 법으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그 선한 것을 주장하여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善은 바로 덕이고 不善은 덕이 아닙니다.
선은 일정한 體가 없으니, 장차 무엇을 택하여 주장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순일한 것에 합함을 주장으로 삼아야 하니 순일함은 바로 선이고 순일하지 않음은 선이 아닙니다.
原注
천하의 이치로 무릇 순일함에서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문득 보고서 측은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에는 다른 마음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순일하여 선이요, 조금이라도 교분을 맺거나 명예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순일하지 않아서 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덕을 살피는 것은 선을 주장으로 삼고 선을 택하는 것은 또 순일함을 주장으로 삼는 법입니다.
太甲이 잘못을 뉘우치고 선으로 옮겨온 뒤에도 伊尹은 여전히 태갑이 선을 택함이 정밀하지 않고 덕을 지킴이 일정하지 않아 훗날 변하여 옮겨갈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咸有一德〉의 글을 지어 고하였는데, 정밀한 요체가 이 몇 마디 말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아, ‘惟精惟一’을 舜임금이 遜位하려 한 뒤에 禹王에게 일러주었고,
‘咸有一德’을 이윤이 致仕하려 한 뒤에 太甲에게 고하여 간절한 뜻을 붙여 전수한 것이 이와 같으니,
임금 된 자가 이 말을 음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