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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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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3-7-나(按)
按 光武之中興 其先 有以 來上者注+赤伏符者, 圖讖之名.어늘
於是 篤信之하사 始以之하시고 又以之하시고 終以之하시니 不知六經者 先王之格言而讖緯者 末世之邪說이라
以爲이라하니 蓋得之矣로다 新莽之居攝也 假稱符命하여 以惑衆聽하여 因以行其簒竊之謀어늘
光武 誅新復漢하시니 宜削滅其書하여 以絶禍本 可也어늘 乃以赤伏之驗으로 崇信而表章之하시니
夫異端小數 豈無或驗이리오 要非六經之法言이며 先王之正道하고
하니 是徒足以亂臣賊子之心而已 何益於世敎哉리오
自光武 好之而東都儒者 鮮不傳習하여 至引之以釋經하니 謬妄 爲甚이어늘 後之爲正義者 復祖焉이라
故先朝名臣歐陽脩 乞詔儒臣하여 悉取九經之疏하여 刪去讖緯之文이라하니 以其害道故也
聖明之君 有志於扶持正道者 誠取脩言하여 施行之則所益 多矣리이다


原注
13-7-나(按)
[臣按] 光武帝가 한나라를 中興시킬 때 이보다 앞서 赤伏符를 가지고 와서 바친 자가 있었는데,注+‘赤伏符’는 圖讖書의 이름이다.
광무제가 이에 그 내용을 독실하게 믿어 처음에 이에 따라 三公을 임명했고 또 이에 따라 郊祀를 정했고 끝으로 이에 따라 봉선을 결정하였으니 六經은 先王의 格言이고 讖緯는 末世의 邪說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張衡이 圖讖은 哀帝와 平帝의 연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그의 말이 옳습니다. 新나라 王莽이 섭정할 때 符命를 가탁하여 뭇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켜 이를 계기로 자신의 찬탈하려는 계획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광무제가 新나라를 誅伐하고 한나라를 부흥시키니 그 참위서를 없애서 화의 근원을 끊어버리는 것이 옳았음에도 도리어 赤伏符가 잘 들어맞는다는 이유로 신봉하고 드러내 밝혔습니다.
저 異端 가운데 몇몇이 어찌 간혹 들어맞는 것이 없겠습니까. 결코 六經의 法言이 아니며 先王의 正道가 아니기 때문에 劉歆이 이를 보고 이름을 고친 것이며
公孫述이 이를 이용하여 참람되게 반역한 것이니 이는 亂臣賊子의 마음을 열어주기에 충분할 뿐입니다. 과연 世敎에 무슨 보탬이 되었습니까.
광무제가 도참을 좋아하면서부터 東漢의 儒者치고 도참을 傳習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어서 이를 인용하여 경전을 해석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황당무계함이 심한데, 후대의 正義를 지은 이가 다시 이를 祖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先朝의 명신인 歐陽脩가 儒臣에게 九經의 注疏를 모조리 가져다가 讖緯의 내용을 삭제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였으니, 도참이 도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正道를 부지하는 데 뜻을 둔 聖明한 군주가 참으로 구양수의 말을 취하여 시행한다면 보탬이 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赤伏符 : 讖文을 말한다. 符는 미래의 일을 예언하여 기록한 것이고, 赤伏은 그 이름이다. 漢나라는 火를 숭상했고 적색은 火의 색이며 伏은 감추고 있다는 뜻이므로, 火德으로 일어난 劉氏의 漢나라가 부흥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光武帝가 長安에 있을 때 同舍生 彊華가 關中에서 적복부를 받들고 왔는데 거기에 “劉秀가 군사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토벌하니, 四夷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용이 들판에서 싸우는데 四七의 때에 火德을 지닌 사람이 주인이 되리라.[劉秀發兵捕不道 四夷雲集龍鬪野 四七之際火爲主]”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四七之際’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첫째, 漢 高祖로부터 광무제의 거병하기까지의 기간이 228년이라는 설이다. 둘째, 거병 당시 광무제의 나이가 28세라는 설이다. 셋째, 광무제의 장수 28명을 말한다는 설 등이 있다. 당시 광무제가 河北을 거의 평정하여 수하의 장수들이 천자에 등극할 것을 요청했으나 듣지 않다가 적복부를 얻고 난 후에 그 내용을 신뢰하여 鄗(호)邑의 남쪽에서 즉위하였다.
역주2 命三公 : 광무제는 建武 원년(25)에 王梁을 대사공에 제수하였다. 이는 赤伏符에 “왕량이 衛를 주재하여 현무가 된다.[王梁主衛 作玄武]”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왕량은 蓋延‧吳漢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광무제를 廣阿에서 만나 偏將軍이 되었다. 이후 邯鄲을 함락하고 關內侯가 되었으며, 河北 지방을 평정하여 野王 令이 되었다. 野王은 衛나라의 땅이고 玄武는 水神의 이름으로 司空은 水土를 관장하는 벼슬이었기 때문에 왕량을 대사공에 제수한 것이다. 《後漢書 卷22 王梁傳》
역주3 定郊祀 : 《後漢書》 卷36 〈鄭興傳〉에 보인다. 郊祀는 郊外에서 天地에 지내는 제사이다. 광무제는 郊祀의 일을 도참설에 따라 결단하고자 한다고 鄭興에게 말하였는데, 정흥이 도참서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도참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역주4 斷封禪 : 《後漢書》 卷17 〈祭祀志 上〉에 따르면, 建武 30년 2월에 신하들이 봉선을 올릴 것을 주청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建武中元 원년(56)에 會昌符의 “赤劉의 9에 岱宗에 會命한다.[赤劉之九 會命岱宗]”라는 내용을 보고 張純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였다. ‘赤劉之九’는 광무제가 高祖의 9대손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역주5 張衡 : 72~139. 자는 平子로, 河南 南陽 사람이다. 학문적 소양이 폭넓고 다재다능하였다. 郎中‧尙書侍郞‧太史令‧侍中‧河間相을 지냈으며, 安帝‧順帝 때 天文臺長을 역임했다. 天文에 뛰어났으며 渾天說의 대표적 이론가이다. 水運渾天儀와 地震計인 候風地動儀를 발명했고, 이외에도 指南車‧記里鼓車 등을 고안해냈다. 저술로는 〈算罔論〉‧〈地形圖〉‧〈二京賦〉‧〈四愁詩〉 등이 있다. 광무제가 도참설을 믿고 顯宗과 肅宗이 이를 조술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도참을 익히고 妖言을 덧붙이자, 도참은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것으로 聖人의 法言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렸다.
역주6 起於哀平之間 : 《後漢書》 卷89 〈張衡列傳〉에 보이는데, “도참은 애제와 평제의 때에 이루어졌다.[圖讖成於哀平之際也]”라고 하였다.
역주7 劉歆……改名 : 劉歆(기원전 53?~기원전 23)은 西漢 말의 관료이자 학자이다. 자는 子駿으로, 沛縣 사람이며, 劉向의 아들이다. 成帝 때 黃門郞이 되어 부친 유향과 함께 많은 서적들을 교정하고 도서를 분류하여 목록서인 《七略》를 저술하였다. 王莽이 집권하자 中壘校尉‧京兆尹 등을 지내고 紅休侯에 봉해졌다. 왕망이 稱帝한 뒤로는 國師가 되어 嘉新公에 봉해졌다. 나중에 王莽을 죽이려다가 음모가 발각되자 자살했다. 建平 원년(기원전 6)에 河圖赤伏符의 “劉秀가 군사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토벌하니, 四夷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용이 들판에서 싸우는데 四七의 때에 火德을 지닌 사람이 주인이 되리라.[劉秀發兵捕不道 四夷雲集龍鬪野 四七之際火爲主]”라는 내용을 보고 이름을 秀, 자를 穎叔으로 고쳤다.
역주8 公孫……僭畔 : 公孫述(?~기원전 36)은 자가 子陽으로, 西漢 扶風 茂陵 사람이다. 처음에 王莽을 섬겨 導江卒正을 지냈다. 更始 2년(24)에 綿竹에서 綠林軍을 공격하여 저지하고 자립하여 蜀王이 되었다. 蜀과 巴를 평정하고, 다음 해 天子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成家라 했다. 그는 일찍이 符命을 얻었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광무제에게 서한을 보내 회유하였다. 또 자신의 손바닥에 ‘公孫帝’라고 써놓고 짐짓 상서로운 징표라고 주장하였다. 후에 吳漢과 臧宮에게 패하고 부상으로 인하여 죽었다.
역주9 : 대전본‧사고본에는 ‘起’로 되어 있다.
역주10 : 사고본에는 ‘更’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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