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夫以孔子之聖으로도 其於人也에 以視爲未足而復觀之하시며 以觀爲未足而復察之然後에 人之情僞가 不得而隱이어든
況聖未如孔子者가 可以知人爲易乎아 雖然이나 視也‧觀也‧察也는 出於我者也라
苟我之心이 未能至公而無私하며 至明而不惑이면 其於人之情僞에 焉能有見乎리오
以人君言之컨대 一身而照臨百官하여 正邪忠佞이 雜然吾前이라 豈易辨哉리오
必也淸其天君하여 如鑑之明하며 如水之止하여 以爲臨下燭物之本然後에 於人之所由‧所安에 庶乎其得之矣니 此又人君所當知也니이다
原注
15-3-나(안按)
[신안臣按] 이것이 성인聖人 문하에서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무릇 사람의 하는 바가 우연히 선善에 부합하는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연유한 바가 의義 때문인지 이利 때문인지를 살펴서 만약 그 본심이 실로 의義를 주장했다면 그 선善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선善이 될 수 있지만,
만약 그 본심이 실로 이利를 주장한 것이라면 그 선善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또 어떻게 선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연유한 바가 비록 선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편안히 여기는 바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만일 이를 편안히 여기지 못한다면 부귀가 그 마음을 미혹시킬 수 있으며 빈천貧賤이 그 뜻을 바꿀 수 있으며 위무威武가 그 절개를 굽히게 할 수 있어서 그것이 꾸준하여 변치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편안히 여기는 것[안安]’이라고 합니까? 마치 물이 차갑고 불이 뜨거운 것과 같아서 저절로 그러하여 바꿀 수 없으며 마치 배고플 때 먹고 목마를 때 마시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그렇게 하여 그칠 수 없는 것이니 그렇게 한 뒤에야 ‘편안하게 여긴다[안安]’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原注
무릇 공자孔子 같은 성명聖明함으로도 사람에 대하여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다시 살폈으며 살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다시 관찰한 뒤에야 사람의 실정과 거짓이 숨겨질 수 없게 되었는데,
하물며 공자와 같은 성인이 아닌 경우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쉽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보고 살피고 관찰하는 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나의 마음이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을 수 없고 지극히 밝아 의혹하지 않을 수 없다면 남의 실정과 거짓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한 몸으로 백관에 임하여 정직한 이와 간사한 이, 진실한 이와 아첨하는 이가 자기 앞에 섞여 있는데 어찌 쉽게 변별하겠습니까.
반드시 마음을 맑게 하여 마치 밝은 거울과 같고 고요한 물과 같아서 아랫사람을 대하고 만물을 비추는 근본으로 삼은 뒤에야 사람이 연유한 바와 편안하게 여기는 바에 대해 거의 알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또 임금이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