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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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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之同姓也러니 博聞彊記하여 明於治亂하며 嫺於辭令注+嫺, 音閑, 習也.하여
入則與王圖議國事하여 以出號令하고 出則接遇賓客하며 應對諸侯하니 甚任之하더시니
與之同列이라 爭寵而心害其能이러니 懷王 使屈原으로 造爲憲令이어시늘
屈原 屬草藁未定 上官大夫 見而欲奪之어늘 屈平 不與한대
因讒之曰 王 使屈平爲令 衆莫不知하나니 每一令出 伐其功曰 非我 莫能爲也라하나니이다
怒而疏屈平한대 屈平 疾王聽之不聰也하며 讒諂之蔽明也하며 邪曲之害公也하며 方正之不容也하여
故憂愁幽思而作離騷하니 離騷者 猶離憂也


22-10-가
굴평屈平(굴원屈原)은 나라의 동성同姓이다. 초 회왕楚 懷王좌도左徒가 되었는데,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치란治亂에 밝았고 상대방을 응대하는 말에 능숙하였다.注+’은 음이 ‘(한)’이니, ‘능숙하다’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회왕과 국사를 논의하여 명령을 내고 밖으로는 빈객을 접대하며 제후를 응대하니 회왕이 매우 신임하였다.
상관대부上官大夫는 굴평과 지위가 같았다. 총애를 다투어 속으로 그의 재능을 시기하였다.
屈原屈原
회왕이 굴원에게 법령을 제정하도록 하자,
굴원이 초고를 작성하였는데 완성하기 전에 상관대부가 보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굴평이 내주지 않자,
이로 인하여 상관대부가 굴평을 다음과 같이 참소하였다. “왕께서 굴평에게 법령을 제정하도록 한 것을 뭇사람들 가운데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법령이 나올 때마다 굴평이 그 공을 자랑하여 ‘내가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회왕이 노하여 굴평을 멀리하자, 굴평은 회왕이 듣는 것이 밝지 못하고 참소가 현량한 사람을 가로막으며, 올바르지 않은 것이 공적인 것에 해를 끼치고 올바른 것이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였다.
이 때문에 근심에 젖어 깊이 생각한 끝에 〈이소離騷〉를 지었으니, ‘이소’는 ‘근심에 걸리다’라는 뜻과 같다.


역주
역주1 22-10-가 :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屈原〉에 보인다.
역주2 屈平 : 기원전 340?~기원전 278. 전국시대 楚나라의 왕족이다. 姓은 羋(미)로, 屈은 氏이며, 平은 이름이다. 또 다른 이름은 正則이며, 자는 原, 靈均이다. 文才가 있어 懷王의 신임을 받아 左徒가 되었으나, 合縱策을 주장한 그와 달리 連橫策을 지지한 上官大夫 靳尙(근상)에게 모함을 받아 三閭大夫로 좌천되었다. 회왕이 秦나라에 갔다가 억류되어 죽은 뒤에 초나라의 국운을 탄식하며 〈離騷〉를 지었다. 頃襄王 때 다시 근상의 모함을 받아 유배되자 汨羅水(멱라수)에 투신자살하였다.
역주3 楚懷王 : ?~기원전 296(재위 기원전 328~기원전 299). 전국시대 楚나라 37대 임금이다. 姓은 羋(미), 이름은 槐로, 威王의 아들이다. 대내적으로는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대외적으로는 秦나라에게 여러 번 패배를 겪었다. 기원전 299년에 秦나라 昭陽王이 동맹을 맺으러 오라고 제의했을 때 屈原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의 武關으로 갔다가 사로잡혀 3년 뒤에 진나라에서 죽었다.
역주4 左徒 : 초나라의 벼슬 이름으로, 재상인 令尹의 다음가는 지위였다. 唐나라 때 張守節에 따르면, 좌도는 左拾遺나 右拾遺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 《史記 卷40 楚世家, 卷84 屈原賈生列傳 張守節正義》 《史記辭典 左徒》
역주5 上官大夫 : 전국시대 楚나라의 대부로, 劉向의 《新序》에 따르면 靳尙(근상)을 가리킨다. 王逸의 〈楚辭章句序〉에서는 ‘大夫上官靳尙’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왕일은 ‘상관’을 성씨로, ‘근상’을 이름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新序 卷7 節士》 《楚辭章句 序》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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