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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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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注+漢司馬遷所作.齊世家注+齊世家, 紀齊國之事也. 爲大夫하여 其收賦稅於民 以小斗受之하고 其粟 以大斗하여 行陰德於民而景公 弗禁하니
由此田氏 得齊衆心하여 宗族 益彊이어늘 數諫호대 弗聽하다
景公 有寵姬生子荼러니 景公 命其相國惠子‧高昭子하여 立荼爲太子러니 景公 兩相 立荼하니 是爲晏孺子
田乞 不說하여 遂立景公 子陽生而殺晏孺子하고 專齊政이러니
注+諡釐子.커늘하여 復修釐子之政하여 以大斗出貸하고 以小斗收하더니 執其君簡公而弑之하고 立簡公弟하니 是爲이라
言於平公曰 德施 人之所欲이니 君其行之하소서 刑罰 人之所惡 臣請行之호리이다 行之五年 齊國之政 皆歸田이어늘
於是 盡誅鮑‧晏‧監止注+鮑‧晏‧監三氏, 皆齊大家.及公族之彊者而割齊하여以東至琅注+安平‧琅, 皆邑名. 自爲封邑하니 封邑 大於平公之所食이러라
注+諡成子.커늘하여 使其兄弟宗人으로 盡爲齊都邑大夫러니
盤之孫 乃遷其君於海上하여 食一城以奉其先祀하고 立爲齊侯하다


17-2-가
《사기》注+사기史記》는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저작이다.제세가齊世家〉에注+사기史記》 〈제세가齊世家〉는 나라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전걸田乞제 경공齊 景公을 섬겨 대부가 되었다. 전기가 백성들에게 부세賦稅를 징수할 때 작은 말로 받고 곡식을 백성들에게 줄 때에는 큰 말로 하여 백성에게 음덕을 베풀었는데 경공이 금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씨田氏가 제나라의 민심을 얻어 종족이 더욱 강성해지자 안자晏子(안영晏嬰)가 자주 간하였는데 경공이 듣지 않았다.
경공에게 총희寵姬가 있어 아들 를 낳았다. 경공은 중병이 들자 국상國相국혜자國惠子고소자高昭子에게 명하여 를 태자로 세웠는데, 경공이 죽자 두 국상이 를 옹립하니 바로 안유자晏孺子이다.
전기는 불쾌하여 마침내 경공의 다른 아들 양생陽生을 옹립하고 나서 안유자晏孺子를 죽이고 나라의 정권을 전단專斷하였다.
전기가 죽자注+전걸田乞는 시호가 이자釐子이다. 아들 전항田恒이 그 지위를 이어받아 다시 이자釐子의 정치를 재현해 큰 말로 빌려주고 작은 말로 거두어들였다. 자신의 임금 간공簡公을 잡아 시해하고 간공의 아우를 세우니 바로 평공平公이다.
전항이 평공에게 말하였다. “덕을 베푸는 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니 임금께서 행하십시오. 형벌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니 신이 행하겠습니다.” 이를 시행한 지 5년 만에 제나라의 정권이 모두 전항에게 귀속되었다.
전항이 이에 포씨鮑氏안씨晏氏감지監止注+포씨鮑氏안씨晏氏감씨監氏 세 가문은 모두 나라의 큰 가문이다. 공족公族 가운데 강성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제나라를 분할하여 안평安平에서부터 동쪽으로 낭야琅邪에 이르기까지注+안평安平’과 ‘낭야琅邪’는 모두 고을 이름이다. 스스로 봉읍으로 삼으니 그 봉읍이 평공의 식읍보다 컸다.
전항이 죽자注+전항田恒은 시호가 성자成子이다. 아들 전반田盤이 그 지위를 이어받아 자신의 형제와 종인宗人들을 모두 나라의 들의 대부大夫가 되게 하였다.
전반의 손자 전화田和가 마침내 자신의 임금인 강공康公을 바닷가로 이주시키고 하나를 식읍으로 주어 그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전화가 즉위하여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역주
역주1 17-2-가 : 관련 내용이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에 보인다. 본문에서 〈齊世家〉에 보인다고 한 것은, 田完의 후예인 田氏에게 齊나라의 정권이 넘어간 뒤에도 ‘제’라는 국호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원전 490년에 齊 景公이 죽자 高昭子와 國惠子가 경공의 유언을 받들어 경공의 총희인 芮子의 소생 荼(晏孺子)를 옹립하였다. 이에 경공의 다른 아들인 陽生은 魯나라로 도망갔다. 전기는 양생을 옹립하고 국정을 장악하고자 기원전 489년에 대부들과 함께 고소자와 국혜자를 공격하고 悼公을 옹립하였다. 기원전 485년에 전기가 죽고 田恒이 대를 이었는데 이듬해에 鮑牧이 도공과 불화가 생겨 도공을 시해하였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이 도공의 아들 壬을 옹립하니 바로 簡公이다. 그 후 전항은 간공의 총애를 받는 監止를 시기하였다. 한편 감지의 일족인 子我는 전씨 일족과 사이가 좋지 않아 전씨들을 멸족하려고 했는데 전씨들이 이를 알고 선수를 쳐서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간공이 군대를 보내 전항을 공격하려다가 子余의 만류로 그만두었는데, 전씨들이 자아와 감지를 죽이자 徐州로 달아났다. 전씨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기원전 480년에 간공을 시해하고 전항이 간공의 동생 平公을 옹립했다. 기원전 456년에 평공과 전항이 죽자 宣公이 즉위하고 田盤이 선공의 재상이 되었다. 선공의 치세 동안 전반과 그의 아들 田白, 손자 田和가 차례로 국정을 장악하였다. 기원전 405년에 선공이 죽고 康公이 즉위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자 마침내 기원전 386년에 전화가 강공을 내쫓고 즉위하여 齊 太公이 되고 주 왕실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았다.
역주2 : 509본에는 없다.
역주3 田乞 : ?~기원전 485. 성은 嬀(규)이며 田은 씨이다. 田桓子(田無宇)의 아들로 齊 景公을 섬겼으며, 경공이 죽고 高昭子와 國惠子가 경공의 아들 荼(晏孺子)를 옹립하자 고소자‧국혜자를 죽이고 公子 陽生(齊 悼公)을 옹립하였다. 후에 안유자를 죽이고 스스로 國相이 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전단하였다. 시호는 釐(희)子이다.
역주4 齊景公 : ?~기원전 490. 재위 기원전 547~기원전 490. 춘추시대 齊나라의 임금 姜杵臼로 景은 시호이다. 齊 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을 살해한 大夫 崔杼에 의해 옹립되었다. 즉위한 뒤 최저를 右相으로 慶封을 左相으로 삼았다. 궁실을 짓고 사냥개와 말을 모으기를 좋아하였으며 세금과 형벌을 무겁게 하며 사치가 끝이 없었다. 晏嬰을 卿에 임명한 뒤로는 그의 간언에 의하여 저지되기도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齊나라의 公室이 쇠퇴하고 田氏 세력이 대두하였다.
역주5 : 사고본에는 ‘與’로 되어 있다. 통행본 《사기》에는 ‘予’로 되어 있다.
역주6 晏子 : 14-2-가의 ‘晏子’ 주석 참조.
역주7 : 대전본‧사고본에는 ‘他’로 되어 있다. 통행본 《사기》에도 ‘他’로 되어 있다.
역주8 : 1)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대전본의 경우 宋代의 피휘이다.
2)?~기원전 456. 田恒을 가리키는데 漢 文帝 劉恒 이후로는 이를 피휘하여 田常으로 표기되었다. 田乞(기)의 아들로 齊 簡公 때 監止와 함께 각각 左相과 右相이 되었다. 기원전 481년에 거병하여 감지와 간공을 죽이고 간공의 동생 驁(平公)를 옹립하였다. 이로써 제나라의 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강성한 公族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시호는 成子이다.
역주9 平公 : ?~기원전 456. 재위 기원전 480~기원전 456. 춘추시대 齊나라의 임금으로 平은 시호이며 성은 姜, 씨는 呂, 이름은 驁이다. 簡公의 동생으로 강공을 시해한 田恒에 의해 옹립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田氏가 국정을 전단하였으며 安平 동쪽의 땅을 모두 封邑으로 삼았다.
역주10 :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대전본의 경우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11 :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대전본의 경우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12 :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대전본의 경우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13 安平 : 고대의 읍 이름으로, 현재 山東省 淄博 동북쪽에 있었다. 《史記辭典 安平》
역주14 : 대전본‧사고본에는 ‘琊’로 되어 있다.
역주15 : 대전본‧사고본에는 ‘琊’로 되어 있다.
역주16 : 대전본‧사고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대전본의 경우 宋代의 피휘이다.
역주17 : ?~기원전 452. 田盤을 가리키며 田班이라고도 한다. 齊나라 田常의 아들이다. 전상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제나라의 相이 되었으며, 三晉(韓‧魏‧趙)에 사신을 보내 교통하였다. 시호는 襄子이다.
역주18 田和 : ?~기원전 383. 재위 기원전 386~기원전 383. 田齊의 임금 太公을 가리키며 田恒의 증손이다. 齊 康公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태공이 그를 바닷가로 내쫓고 城 하나를 식읍으로 주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강공 19년(기원전 386)에 정식으로 즉위하여 제후가 되었다.
역주19 康公 : ?~기원전 379. 재위 기원전 404~기원전 386. 齊나라의 임금 姜貸로 康은 시호이다. 平公의 손자이자 宣公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동안 田氏가 국정을 전단하였으며, 기원전 386년에 田和가 즉위하면서 그에 의해 바닷가로 쫓겨 갔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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