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13-3-나(按)
[臣按] 이것은 漢 武帝가 즉위한 초기의 일입니다. 이해에 승상 衛綰(?~기원전 131)이 상주하기를 “賢良으로 천거된 사람들 중 혹 申不害‧商鞅‧韓非‧蘇秦‧張儀의 설을 주장하여 국정을 어지럽게 한 자들이 있으니 모두 파면하소서.”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지만,
〈董仲舒傳〉을 보면 실은 동중서가 한 말입니다. 신불해‧상앙‧한비는 모두 刑名의 학술을 한 자들이며 소진과 장의는 縱橫의 학술을 한 자들입니다.
상앙은 秦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井田 제도를 폐지하고 阡陌을 무너뜨렸으며, 술수로 이웃 나라를 속이고 그 군대를 습격하여 쳐부수었으며,
칼과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베는 참혹한 형벌을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시행하여 渭水 가에서 죄수를 논죄할 때면 강물이 이 때문에 붉게 되었으니, 그 잔인하고 가혹하여 은혜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불해와 한비의 술수 역시 대체로 이와 비슷하며, 장의와 소진은 변설로 당시의 임금을 조종하여 남의 나라를 기울게 하고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生民의 좀이요 正道의 도적이니, 가지고 있는 재주로 곳곳에서 한때의 부귀를 훔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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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후대의 선비들이 발돋움하고 이들과 같이 되기를 선망했던 것입니다. 漢나라 초기 유세에 능한 선비들로 蒯通이나 朱建과 같은 자들은 대체로 張儀와 蘇秦의 옛 전철을 따랐으며, 賈誼나 晁錯와 같은 儒者들 역시 모두 申不害와 韓非를 천명했으니,
先王의 도가 어두워져 밝혀지지 않아서 비록 통달한 선비들이었음에도 이단의 학술에 빠지는 것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董仲舒가 소리 높여 이 설들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道術이 어떻게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先儒가 동중서의 공을 미루어 논하여서 ‘맹자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武帝가 비록 그 말을 조금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끝내 동중서를 보필하는 자리에 두어 世敎를 바로잡도록 하지 못하여, 嚴助나 朱買臣과 같은 자들이 縱橫術로 진출하고 張湯이나 杜周 같은 자들이 刑名術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제 말년에 있었던 巫蠱의 화에 무제 부자가 서로 보전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江充 한 사람이 실로 이렇게 만든 것이니, 강충이란 자는 글과 변설에 두루 능한 자였습니다. 아, 천하를 소유한 임금이 이것을 깊이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