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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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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3-4-나(按)
按 百家之學 惟老氏所該者하니 摭其易知者言之컨대
以之相漢하여 收寧壹之效하고 文帝 以之治漢하사 成富庶之功하시니 雖君子라도 有取焉하고
原注
이라 綿綿若存하여 用之不勤이라하니 養生之言而爲方士者 祖焉하고
矯弊之言而放蕩者 宗之하고 至其이어늘
蒙莊氏注+莊周也. 因之
하여 以荒唐繆悠之辭 譁于世而淸談者 傚之하니
自其近理者言之컨대 固在所可取 然皆吾聖人之所有也 下乎此則一偏一曲之學이라
原注
其弊有不勝言者하니 養生之說則神‧方藥之所自出也 陰謀之術則申‧商‧韓非之所本也
放蕩之害而甚注+하고 淸談之禍注+弼, 魏人. 而極하여 皆以惑亂世主하며 斲喪生民하니
雖老‧莊之學 初未至此 然本源一差 其流 必有甚焉이라 以是言之컨대 曷若由堯‧舜‧周‧孔之道 爲無弊哉리오
原注
謂 自漢以來 有黃老之稱하니 黃帝 亦聖人也 其道 與老子均乎
曰 此猶師之宗神農이며 之祖大禹 非其傳之正也니라
又謂 文帝 用黃老而天下하고 武帝 用儒術而海內耗則儒術 果不逮黃老矣로다 曰 非也
淸靜慈儉 老氏之所長而文帝用之 故其效 如此 然亦하니
使其用孔子之道則其成功 豈止是哉리오 若武帝之於儒術 特崇其名而已 而所以斁耗生民者則神‧刑名‧兵家之罪
儒術이리오 不得以不하노이다


原注
13-4-나(按)
[臣按] 百家의 학설 중에 오직 老子만이 포괄하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그중에서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들어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 가지 보물은 자애와 검소함과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는 것이다.”라든가
“내가 작위하는 바가 없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내가 일삼아서 애쓰지 않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소박해지며, 정이 없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깨끗해진다.”와 같은 것들은 이치에 가까운 말들입니다.
曹參이 이것으로 漢나라의 재상이 되어 백성을 안정시키고 통일시키는 효과를 거두었고, 文帝가 이것으로 漢나라를 다스려서 물자가 풍부해지고 인구가 많아지는 공효를 이루었으니, 비록 군자라 할지라도 노자의 학술에서 취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原注
“玄牝(코와 입)의 문이 천지의 元氣와 통하는 근원이다. 실낱같이 이어져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쉬지만 이를 쓰는 것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養生의 말입니다. 이것을 方士들이 祖述하고 있습니다.
“장차 움츠리려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陰謀의 말입니다.
范蠡가 이 말을 써서 吳나라를 취하고 張良이 이를 근본으로 項羽를 멸하여서 用兵을 말하는 자들이 숭상하는 구절입니다.
“大道가 없어진 뒤에 仁義가 있게 된다.”라고 하였으며,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게 되고, 덕을 잃은 뒤에 仁이 있게 되며, 仁을 잃은 뒤에 義가 있게 되고, 義를 잃은 뒤에 禮가 있게 되니, 禮는 忠信이 희박해진 것이며 혼란의 시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병폐를 바로잡는 말인데 방탕한 자들이 宗旨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형체 있는 사물을 조잡한 자취로 여기고 공허함을 오묘한 쓰임으로 여기기까지 하였는데,
蒙莊氏(장자)가注+‘蒙莊氏’는 莊周이다. 이를 그대로 따라 황당무계한 말로 세상에서 떠들어대자 淸談을 일삼는 자들이 이를 본받았습니다.
이것이 이치에 가깝다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참으로 취할 만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모두 우리 儒家의 聖人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이보다 못한 설들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한쪽만의 학설일 뿐입니다.
原注
그러나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양생의 설은 신선과 方藥이 여기에서 나왔고, 음모의 술법은 申不害‧商鞅‧韓非가 근본으로 삼은 것이며,
방탕의 해는 劉伶과 阮籍에 이르러 심해졌고,注+劉伶과 阮籍은 모두 晉나라 사람이다. 淸談의 화는 王弼과 何晏에 이르러注+王弼은 魏나라 사람이다. 何晏은 晉나라 사람이다.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런 것들로 세상의 임금을 미혹시키고 백성들에게 해로움을 끼쳤습니다.
노자와 장자의 학설이 처음에는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本源이 한 번 어긋나면 그 末流는 반드시 이보다 더 심하게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어찌 폐단이 없는 요임금‧순임금‧주공‧공자의 도만 하겠습니까.
原注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漢나라 이래로 黃老라는 명칭이 있으니, 黃帝 역시 聖人이다. 그 도가 노자와 같은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원들이 神農을 祖宗으로 삼고 무당들이 大禹를 조종으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올바른 전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漢 文帝는 黃老學을 써서 천하가 편안하였고 武帝는 儒術을 써서 천하가 피폐했으니, 그렇다면 유술이 과연 황로학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맑고 조용하고 자애롭고 검소함은 노자 학설의 장점인데, 문제가 이것을 썼기 때문에 그 효과가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백성을 부유하게는 하였으나 교화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만일 공자의 도를 썼다면 그 이룬 공이 어찌 여기에 그쳤겠습니까. 무제는 儒術에 대해 단지 그 이름만 존숭한 것뿐이며 백성을 해친 것은 神仙術‧刑名術‧兵家의 죄이니,
유술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신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주
역주1 曰慈……下先 : 《老子》 제67장에 “나에게는 항상 잘 간직하여 보존하고 있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첫째는 자애이며, 둘째는 검소함이며, 세 번째는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는 것이다. 윗사람이 자애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용감할 수 있으며, 검소하기 때문에 뜻을 널리 펼 수 있으며,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기 때문에 천하 만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故能成器長]”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2 無爲……自樸 : 《老子》 제57장에 “그러므로 성인은 말하였다. ‘내가 작위하는 바가 없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내가 일삼아 이익을 다투지 않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내어 재물을 탐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소박해진다.’[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3 無情民自淸 : 통행본 《老子》에는 보이지 않는다. 焦竑의 《老子翼》에 따르면, 《노자》의 판본 가운데 원래의 河上公本에는 제57장 ‘我無欲而民自樸’ 뒤에 이 구절이 더 있었다고 한다. 王卡은 현전하는 《노자》 하상공본에도 이 구절은 없으나 道藏本과 陳景元本에는 있다고 하였다. 《王卡 點校, 老子道德經河上公章句, 中華書局, 1997, 225쪽》
역주4 曹參 : ?~기원전 190. 자는 敬伯으로, 泗水 沛縣 사람이다. 秦나라 말에 蕭何와 함께 劉邦을 도와 漢나라를 개국하여 平陽侯에 봉해졌다. 齊나라의 相으로 있을 때 黃老術을 써서 淸靜無爲를 주장하여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였다. 惠帝 때 소하가 죽은 뒤 소하를 이어 재상이 되어서는 모든 것을 소하의 규정을 따랐기 때문에 ‘蕭規曹隨’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시호는 懿이다.
역주5 玄牝……不勤 : 《老子》 제6장에 보인다. 제6장은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緜緜若存 用之不勤”이다. 林希逸의 주에 따르면 “텅 빈 신묘함은 다하지 않으니, 이를 일러 ‘신묘한 텅 빔’이라고 한다. 신묘한 텅 빔의 문을 일러 천지의 근원이라고 하니, 있는 듯 없는 듯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를 쓰는데 지칠 줄을 모른다.”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養生의 말로 해석한 按說에 따라 河上公注에 근거하여 번역하기로 한다. 《老子鬳齋口義 林希逸注》
역주6 : 대전본에는 ‘下’로 되어 있다.
역주7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8 將欲……與之 : 《老子》 제36장에 “장차 거두어들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베풀어야 하고, 장차 약하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야 하고, 장차 없애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일어나게 해야 하고,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일러 ‘감추어진 밝음’이라고 한다.[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9 陰謀 : 용병술[兵謀]을 이른다. 《國語 越語下 韋昭注》
역주10 范蠡……取吳 : 范蠡는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이다. 초나라에서는 귀족이 아니면 벼슬을 할 수 없어 越나라로 가서 越王 勾踐에게 벼슬하였다. 기원전 494년 구천이 범려의 말을 따르지 않고 吳나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會稽山에서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자, 왕의 목숨과 나라의 보전을 위해 자진하여 월왕 구천을 따라 오나라에 가서 온갖 굴욕을 참고 吳王 夫差의 시중을 들며 부차의 신임을 얻는 한편, 월나라에서는 비밀리에 軍備를 증강하여 결국 20년 만인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산의 수치를 설욕하였다. 공을 이룬 뒤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鴟夷子皮로 성명을 바꾸고 떠나 상인이 되어서 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역주11 張良……滅項 : 張良(기원전 250?~기원전 186)은 漢 高祖 劉邦의 책사로 漢나라 개국 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자는 子房, 城父 사람으로, 시호는 文成이다. 장량이 유방으로 하여금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내주어서 안심시킨 뒤 공격하게 한 사례가 많은데, 예를 들면 韓信이 齊王이 되기를 원했을 때 유방은 大怒했지만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신을 제왕에 봉함으로써 한신의 마음을 얻었다. 또 기원전 202년에 유방은 楚나라의 項羽와 鴻溝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자는 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 뒤에 항우는 동쪽으로 돌아갔으나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따라 한신‧彭越과 楚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약속한 날 한신과 팽월이 오지 않아 항우에게 패하자, 장량은 또 유방에게 건의하여 한신과 팽월에게 사신을 보내 초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주겠다고 약속하도록 하였다. 결국 한신과 팽월이 즉각 군대를 垓下로 보내 항우를 대패시킴으로써 한나라의 개국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항우는 이때 자살하였다.
역주12 大道……仁義 : 《老子》 제18장에 보인다.
역주13 失道……之首 : 《老子》 제38장에 보인다.
역주14 : 대전본에는 ‘者’로 되어 있다.
역주15 以事……妙用 : 《老子》 제5장에 “천지의 사이는 비유하자면 풀무와 같을 것이다. 텅 비어 있지만 그 쓰임이 무궁하며 쓰면 쓸수록 그 쓰임이 더욱 잘 나온다.[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제11장에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을 공유하니, 그 빈 공간 때문에 수레의 쓰임이 있는 것이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니, 그 빈 공간 때문에 그릇의 쓰임이 있는 것이다. 창과 문을 내어 室을 만드니, 그 빈 공간 때문에 室의 쓰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체가 있는 것으로 이로움을 삼고 텅 빈 것으로 쓰임을 삼는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라는 내용이 보인다. 위의 ‘玄牝……不勤’ 주석 참조.
역주16 蒙莊氏因之 : 蒙莊氏는 莊周, 즉 莊子를 이른다. 장자가 蒙縣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莊子》 〈天下〉에 “만물의 근원인 無를 정밀하다 하고, 형체 있는 것을 조잡하다고 하며, 富의 축적을 흡족하지 않다고 한다.……연약하고 겸손한 태도를 나타내고 스스로를 공허하게 하여 만물을 손상하지 않음을 마음의 실질로 삼았다.[以本爲精 以物爲粗 以有積爲不足……以濡弱謙下爲表 以空虛不毁萬物爲實]”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7 : 사고본에는 ‘僊’으로 되어 있다.
역주18 劉伶 : 221?~300. 魏晉 시대 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자는 伯倫이다. 沛國 사람이다. 키는 6尺에 용모는 몹시 추하였다. 일찍이 建威將軍 王戎의 막하에서 參軍을 지냈다. 晉 武帝 泰始 초의 對策에서 無爲의 다스림을 주장하다가 파면되었다. 평소 술을 좋아하여 항상 술 한 병을 들고 鹿車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삽을 메고 자신을 뒤따르도록 하여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酒德頌〉을 지어 老莊 사상과 맘껏 술을 마시는 정취를 노래하고 전통의 禮法에 얽매이지 않았다. 《晉書 卷49 劉伶列傳》
역주19 阮籍 : 210~263. 삼국시대 魏나라 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자는 嗣宗이다. 13-4-나(按) ‘阮籍’ 주석 참조.
역주20 皆晉人 : 阮籍(210~263)은 魏나라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魏나라의 존속 기간은 220년~265년이며, 西晉의 존속 기간은 265년~316년이다.
역주21 王弼 : 226~249. 삼국시대 魏나라의 經學家이자 玄學의 대표적 인물로, 자는 輔嗣이다. 何晏‧夏侯玄 등과 함께 玄學淸談의 풍조를 열었다. 魏 齊王 正始 10년(249) 가을에 2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저서에 《老子注》‧《周易注》가 있다.
역주22 何晏 : 190~249. 삼국시대 魏나라의 玄學家로, 자는 平叔이다. 漢나라 大將軍 何進의 손자이며 魏나라 金鄕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曹操의 보살핌을 받았다. 용모가 아름답고 얼굴이 희어서 ‘傅粉何郞’으로 불렸다. 老莊學을 좋아하였다. 魏 齊王 正始 연간(240~248)에 曹爽을 도와 侍中과 吏部尙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列侯를 하사받았다. 夏侯玄‧王弼 등과 玄學을 제창하고 淸談을 일삼았다. 저서에 《論語集解》가 있다.
역주23 晏晉人 : 何晏은 魏나라 사람이다. 여기에서 晉나라 사람으로 본 것은 오류이다.
역주24 : 사고본에는 ‘醫’로 되어 있다.
역주25 巫步 : ‘무당의 걸음’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무당을 이른다. 禹王이 홍수를 다스리느라 산천을 다니면서 발에 병이 나서 걸을 때 절뚝였는데, 우왕이 다닐 때 귀신이나 맹수‧독충‧뱀 등이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세속의 무당들이 우왕의 걸음을 흉내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法言 卷7 柳宗元註》
역주26 富之……敎也 : 《論語》 〈子路〉 제9장에 “공자가 衛나라에 갈 때 冉有가 수레를 몰았다. 공자가 ‘백성들이 많기도 하구나!’라고 하자 염유가 물었다. ‘백성들이 많게 되었으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부유하게 되었으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가르쳐야 한다.’[子適衛 冉有僕 子曰庶矣哉 冉有曰旣庶矣 又何加焉 曰富之 曰旣富矣 又何加焉 曰敎之]”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朱熹의 주에 “부유하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금수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반드시 학교를 세워 예의를 밝혀 가르쳐야 한다.[富而不敎 則近於禽獸 故必立學校 明禮義以敎之]”라고 하였다. 《論語集註 子路》
역주27 : 사고본에는 ‘僊’으로 되어 있다.
역주28 : 대전본에는 ‘爲’로 되어 있다.
역주29 : 대전본‧사고본에는 ‘辯’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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