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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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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子之在蔡也注+
平王也.
이러니 及卽位하여 使爲之師注+伍奢, 之子, 之父.러니 爲少師하여 無寵焉이라
欲譖諸王曰 建可室矣注+室, 妻也.로소이다 爲之聘於秦이러니 無極 與逆하여 勸王取之注+逆, 迎也. 勸平王, 自娶秦女.하니 至自秦注+王自取之, 故稱夫人.하다
無極 言於楚子曰 晉之伯也 邇於諸夏 而楚 故弗能與爭하나니
若大城而寘太子焉注+城父, 邑名.하여 以通北方하고 收南方하시면 得天下也니이다하여 從之
故太子建 居于城父러니 明年 無極 又言於楚子曰 建 與伍奢 將以之外이니이다
信之하여 問伍奢한대 對曰 君一過 多矣注+, 納建妻.어늘 何信於讒이니잇고 執伍奢한대 太子建 奔宋하니라


22-3-가
초자楚子(초 평왕楚 平王)가 나라에 있었을 때注+초자楚子’는 초 평왕楚 平王이다. 태자였을 때 나라로 가서 아내를 맞았다. 태자 건太子 建을 낳았다. 즉위하자 오사伍奢를 태자 건의 로 삼게 하였는데注+오사伍奢’는 오거伍擧의 아들이자 오원伍員의 아버지이다. 비무극費無極소사少師로 있으면서 태자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비무극은 평왕에게 태자를 참소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게 좋겠습니다.”注+’은 아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평왕이 태자를 위하여 나라에서 태자의 정처正妻를 맞하였는데 비무극이 나라 여인을 맞이하는 일행에 참여하여 평왕에게 그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하였다.注+’은 맞이한다는 뜻이다. 비무극이 초 평왕楚 平王에게 평왕 자신이 나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으라고 권한 것이다. 초 불인 영씨楚 夫人 嬴氏나라에서 초나라로 왔다.注+초 평왕이 자신의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부인夫人이라고 칭한 것이다.
비무극費無極초자楚子(초 평왕楚 平王)에게 말하였다. “나라가 패자霸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중원中原에 가깝기 때문인데 초나라는 치우쳐 있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성보城父에 크게 성을 쌓고 태자를 머물게 해서注+성보城父’는 이름이다. 북쪽의 나라들과 통교하게 하고 왕께서는 남쪽의 나라들을 수중에 넣으시면, 이는 천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평왕이 기뻐하여 그 말을 따랐다.
이 때문에 태자 건이 성보에서 살게 되었다. 이듬해에 비무극이 또 초자에게 말하였다. “오사伍奢와 함께 방성方城 바깥 지역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평왕이 그 말을 믿고서 오사伍奢에게 물어보자, 오사가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한 번 잘못하신 것도 많은데,注+’는 의 신붓감을 평왕이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다. 어찌 참언을 믿으십니까.” 평왕이 오사를 잡아들이자, 태자 건이 나라로 달아났다.


역주
역주1 22-3-가 : 《춘추좌씨전》 昭公 19년(기원전 523), 20년(기원전 522) 기사에 보인다.
역주2 楚平王 : ?~기원전 516(재위 기원전 529~기원전 516). 성은 羋(미), 이름은 棄疾로, 楚 共王(?~기원전 560, 재위 기원전 590~기원전 560)의 아들이자 楚 靈王(?~기원전 529, 재위 기원전 541~기원전 529)의 아우이다. 즉위 후에는 이름을 熊居로 바꾸었다. 영왕 8년(기원전 533)에 군대를 이끌고 陳나라를 멸망시켰으며, 2년 뒤에는 蔡나라를 평정하여 그 공으로 陳蔡公이 되었다. 영왕 12년(기원전 529)에 자신의 형인 公子 比가 난을 일으켜 영왕을 客死하게 만들고 즉위하였는데, 영왕이 귀환할까 걱정하던 比를 놀라게 하여 자진하게 만들고 그해 5월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國人과 제후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관대한 정치를 베풀고 형벌을 간소화하였으며 멸망시킨 陳나라와 蔡나라를 복구시켰다. 반면에 讒臣 費無極을 총애하여 失政을 범하기도 하였다.
역주3 : 대전본에는 ‘蔡’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4 爲太子時往聘蔡 : 《춘추좌씨전》과 《사기》에 따르면, 초 평왕은 즉위하기 전에 태자가 된 적이 없으므로 진덕수의 주석과는 차이가 있다. 평왕이 蔡나라에서 맞았던 아내는 郹陽(격양) 封人의 딸을 가리킨다. 이 여인은 당시 陳蔡公으로 있던 棄疾(楚 平王)과 눈이 맞아 시집을 온 것인데, 훗날 太子 建을 낳았다. 《春秋左氏傳 昭公 19年》
역주5 太子建 : ?~기원전 519. 성은 羋(미), 자는 子木으로, 楚 平王의 태자이다. 費無極의 참소를 믿은 평왕을 피해 기원전 522년에 宋나라로 달아났다가 송나라의 내란으로 인하여 鄭나라로 망명하여 후대를 받았다. 후에 다시 晉나라로 가서 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습격하려고 계획했다가, 이 사실이 발각되어 정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역주6 伍奢 : ?~기원전 522. 춘추시대 楚나라의 大夫이다. 伍擧의 아들이자, 伍尙‧伍子胥의 부친이다. 楚 平王이 즉위한 뒤 太子 建의 傅에 임명되었다. 少傅 費無極이 태자 건과 오사를 함께 참소하여 평왕의 노여움을 사게 만들어 결국 오상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역주7 伍擧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楚 莊王(재위 기원전 613~기원전 591) 때의 大夫로, 直諫을 잘했다. 장왕이 즉위한 뒤 3년 동안 국정을 돌보지 않고 향락에 탐닉하자, 장왕을 일깨우기 위하여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의 비유를 든 적이 있었다. 《史記 卷40 楚世家》
역주8 伍員 : ?~기원전 484. 자는 子胥로, 초나라 대부 伍奢의 아들이자 伍尙의 아우이다. 기원전 522년(楚 平王7, 吳王 僚5)에 부친과 오상이 모함을 당해 楚 平王에게 죽임을 당할 무렵에 화를 피해 吳나라로 망명하여 公子 光(闔閭)을 섬겼다. 기원전 506년(吳王 闔閭9, 楚 昭王10)에는 초나라를 침공한 합려를 따라 초나라의 수도 郢(영)에 입성한 뒤 초 평왕의 시신에 매질을 가해 원한을 풀었다. 공을 세워 申 땅에 봉해졌기에 ‘申胥’라고도 불린다. 훗날 伯嚭(비)의 참소를 믿은 吳王 夫差에게 검을 받고 자결하였다. 22-5-가 참조. 《史記 卷40 楚世家, 卷66 伍子胥列傳》
역주9 費無極 : ?~기원전 515. 《사기》에는 ‘費無忌’로 되어 있다. 참소로 楚 平王의 태자와 伍子胥를 망명하게 만들고 伍奢‧伍尙 부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평왕의 뒤를 이어 昭王(?~기원전 489, 재위 기원전 516~기원전 489)이 즉위하자 吳나라의 잦은 침공에 시달리던 초나라 사람들에게 원망을 샀다. 그 결과 백성들의 환심을 얻고자 했던 令尹 子常(囊瓦)에 의해 살해되었다.
역주10 楚夫人嬴氏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楚 平王의 부인으로, 楚 昭王의 모친이다.
역주11 : 사고본에는 ‘僻’으로 되어 있다.
역주12 城父 : 杜預에 따르면 西晉 때의 襄城 城父縣에 해당한다. 韓兆琦에 따르면 城父는 초나라 북쪽 국경 지역의 변방 고을로, 현재 河南省 平頂山市 寶豐縣 李莊鄕 翟集村 남쪽에 성보의 옛 성이 있다. 《春秋左氏傳注疏 昭公 19年 杜預注》 《韓兆琦, 史記箋證 世家5, 南昌:江西人民出版社, 2005, 2743쪽》
역주13 方城 : 陳克烱(진극형)에 따르면 方城은 현재 桐柏山, 大別山 등의 산들을 초나라 때 통칭했던 말로, 초나라 동북면에 위치해 있었는데 천연의 장벽과도 같았다. 韓兆琦에 따르면 방성은 산 이름으로, 현재 河南省 方城縣 일대에 해당한다. 《陳克烱, 左傳詳解詞典, 鄭州:中州古籍出版社, 2004, 616~617쪽》 《韓兆琦, 史記箋證 世家5, 南昌:江西人民出版社, 2005, 2740~2741쪽》
역주14 : 대전본‧사고본에는 이 앞에 ‘一’ 1자가 있다.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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