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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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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5-5-나(按)
按 此因宰予晝寢而言하시니 蓋予之爲人 言而行不逮
故孔子 自謂始也 聽人之言하고 卽信其行이러니 今也 聽人之言하고 必觀其行하노니 蓋因予而改此失也라하시고
家語 亦曰 라하시니 夫以孔子之於門人高弟 朝夕與處하시니 其正邪賢否 安能逃聖鑑哉리오마는
猶必觀其行而後 誠僞 可見이어든 況人君之尊 其與臣下接 固有時矣而欲以一應對之頃으로 察知其心術하니 不亦難哉
堯舜以來 不易之法也
原注
故漢文 悅嗇夫之對하여 拜爲上林令이어늘 而張釋之爭之하여 以爲 絳侯注+.‧東陽侯注+. 稱爲長者로되 此兩人言事 曾不能出口하니
豈效此嗇夫喋喋利口哉리오 今以其口而超遷之하시니 恐天下 隨風而靡라한대 하시니
當是時하여 將相大臣 皆少文多質하여 議論 務在忠厚하고 恥言人之過失하여 迄成醇厚之俗이러니
其後武帝之於 唐文宗之於 皆以應對敏捷으로 悅而信之하여 幾至亡國이라
故因宰予之事及之하여 以見聽言觀行之訓 爲不可易也하노이다


原注
15-5-나()
[신안臣按] 이는 재여宰予가 낮잠을 잔 것을 계기로 말한 것입니다. 재여의 됨됨이는, 말은 잘하지만 행실은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스스로 “처음에는 남의 말을 듣고서 곧 그의 행실을 믿었는데, 이제는 남의 말을 듣고서 반드시 그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으니 재여로 인하여 이 잘못을 고치게 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도 “말을 기준으로 사람을 취하면 재여 같은 경우에서 잘못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문인門人 중에서도 뛰어난 제자에 대해서는 조석으로 함께 거처하였으니 그들의 바름과 간특함,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어찌 성인聖人의 눈을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드시 그 행실을 살펴본 뒤에 참과 거짓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 그 신하들과 만나는 것은 본래 정해진 때가 있는데 한번 응대하는 잠깐 사이에 신하들의 마음을 살펴보아 알고자 하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치적治績을 아뢰는 것은 반드시 말로 하고 명확하게 상고하는 것은 반드시 공적으로 하는 것은 임금과 임금 이래로 불변의 법입니다.
생황의 혀처럼 교묘한 말은 시인詩人이 풍자하였고 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은 성인聖人이 미워한 것이니, 훌륭한 말을 하는 자가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며 말재주 있는 자가 한지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原注
그러므로 한 문제漢 文帝색부嗇夫의 대답에 기뻐하여 상림령上林令에 제수하자, 장석지張釋之가 간쟁하기를 “강후絳侯注+강후絳侯’는 주발周勃이다. 동양후東陽侯注+동양후東陽侯’는 장상여張相如이다. 장자長者로 일컬어졌지만 이 두 사람은 일을 말할 때 일찍이 제대로 말하지 못했으니,
어찌 재잘거리며 말 잘하는 이 색부를 본받게 하십니까. 지금 그의 말재주 때문에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시키시니 신은 천하 사람들이 바람에 따라 쏠리듯 다투어 본받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니 문제文帝가 마침내 중지시켰습니다.
이 당시에 장상將相 등 대신들이 모두 문식文飾이 적고 질박함이 많아서 의론議論은 진실하고 순후한 데 힘썼고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침내 순후한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 한 무제漢 武帝강충江充에 대해서, 당 문종唐 文宗이훈李訓에 대해서 그들이 모두 응대應對가 민첩하다는 것으로 기뻐하여 신임해서 무고巫蠱감로甘露의 화가 거의 나라가 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 때문에 재여의 일을 통해 이를 언급하여 말을 듣고 행실을 살피라는 가르침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역주
역주1 : 대전본에는 ‘爲’로 되어 있다.
역주2 以言……宰予 : 《孔子家語》 〈子路初見〉에 “말을 기준으로 사람을 취하면 재여에서 잘못하게 된다.[以辭取人 則失之宰予]”라고 하였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같은 내용이 있는데, “나는 말을 기준으로 사람을 취하다가 재여에서 잘못하였다.[吾以言取人 失之宰予]”라고 하였다.
역주3 敷奏……法也 : 《서경》 〈舜典〉에 “천자가 5년에 한 번 순수하면 여러 제후가 번갈아 네 번 조회하니, 자신의 治積을 말로 아뢰게 하고 명확하게 공적으로 상고하여 수레와 의복으로 공을 표창하였다.[五載 一巡守 群后 四朝 敷奏以言 明試以功 車服以庸]”라고 하였다.
역주4 : 대전본‧사고본에는 이 앞에 ‘此’가 더 있다.
역주5 巧言……刺之 : 《시경》 〈小雅 巧言〉에 “생황의 혀처럼 교묘한 말은 얼굴이 두껍기 때문이다.[巧言如簧 顔之厚矣]”라고 하였다. 毛序에서는 幽王을 풍자한 시로 보아 “대부가 참언에 해를 당했기 때문에 이 시를 지은 것이다.[大夫傷於讒 故作是詩也]”라고 하였다.
역주6 利口……所惡 : 《논어》 〈陽貨〉 제18장에 “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미워한다.[惡利口之覆邦家者]”라고 하였다.
역주7 有言者不必有德 : 《논어》 〈憲問〉 제5장에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지만 훌륭한 말이 있는 자가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고 하였다.
역주8 佞者不知其仁 : 《논어》 〈公冶長〉 제4장에 “어디에 말재간을 쓰겠느냐? 말재간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말재간을 어디에 쓰겠느냐.[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라고 하였다.
역주9 周勃 : ?~기원전 169. 泗水 沛 출신이다. 秦 二世 원년(기원전 209)에 中涓으로 劉邦을 따라 패에서 起兵하였다. 유방이 漢中에서 關中을 공격할 때 趙賁을 격파하고 章平을 패퇴시키고 章邯을 포위하였으며 對楚戰爭에 종군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成皐 전투에 참전하여 項羽와 대적했고 전후로 曲逆‧泗水‧東海 등 12縣을 공략하여 漢 高祖 6년(기원전 201) 絳侯에 봉해졌다. 이어서 韓信‧陳豨‧盧綰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惠帝 때 太尉가 되었다. 위인이 질박하면서도 강직하고 돈후하였기에 고조의 신임을 받아 중대사를 많이 맡았다. 일찍이 고조는 “劉氏의 천하를 안정시킬 사람은 틀림없이 周勃일 것이다.[安劉氏天下者 必勃也]”라고 하였다. 고조의 사후 惠帝가 즉위하자, 呂后가 專權을 행하여 척족인 呂氏가 劉氏를 핍박하였다. 여후가 죽자 陳平과 함께 여씨 일족을 誅殺하고 文帝를 옹립하여 漢室을 안정시켰다. 이후 右丞相이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직했다. 陳平의 사후에 다시 丞相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시호는 武侯이다.
역주10 張相如 : ?~기원전 165. 漢 高祖 6년(기원전 201)에 中大夫가 되었고, 陳豨의 모반이 일어나자 河間守로 힘써 싸워 그 공으로 고조 11년에 東陽武侯으로 봉해졌고, 漢 文帝 연간에 太子太傅가 되었다. 문제 14년(기원전 166)에 흉노가 침공하여 彭陽까지 진입하자, 大將軍이 되어 출병하여 흉노를 격퇴하였다. 文帝 15년(기원전 165)에 죽었다. 《史記 卷103 萬石張叔列傳》 《漢書 卷16 高惠高后文功臣表》
역주11 : 대전본에는 ‘辨’으로 되어 있다.
역주12 文帝乃止 : 西漢의 孝文帝 3년(기원전 177)에 문제가 虎圈에 행차했는데, 張錫之가 謁者僕射로 수행하였다. 이때 虎圈의 책임자인 上林尉에게 여러 禽獸들의 帳簿를 묻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였고 虎圈의 嗇夫가 그를 대신하여 자세히 대답하니, 문제가 색부를 上林令으로 제수하도록 하였다. 장석지가, 絳侯 周勃과 東陽侯 張相如는 長者였지만 말을 잘하지는 못했으며 말재주가 있다고 품계를 뛰어넘어 승진시키면 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말재주만 추구하여 실제가 없는 풍조를 조장하게 될 것이 염려스럽다고 간언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史記 卷102 張釋之列傳》
역주13 江充 : ?~기원전 91. 자는 次倩이다. 西漢 趙國 邯鄲 사람이다. 본명은 齊이다. 그 누이가 歌舞와 鼓琴에 뛰어났는데 趙나라 太子 劉丹에게 시집을 가서 趙나라 敬叔王 劉彭祖의 上賓이 되었다. 후에 유단과 관계가 악화되어 살해 위협을 받자 長安으로 달아나 劉丹을 漢 武帝에게 고소하여 유단을 폐위시켰다. 한 무제는 강충을 奇士라고 여겨 총애하였다. 강충은 匈奴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관직이 水衡都尉에 이르렀다. 일찍이 무제를 수행하여 甘泉宮에 가다가 법규를 위반한 戾太子 劉據(기원전 128~기원전 91)의 가신을 적발하였는데, 태자의 선처 요구를 거절하고 법대로 처벌하여 무제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태자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武帝가 晩年에 병이 들자, 태자의 巫蠱 때문에 병이 든 것이라고 고변하여 무고의 옥을 일으켰다가 여태자 유거에게 주살당했다.
역주14 李訓 : 1) 대전본‧사고본에는 ‘鄭注’로 되어 있다. 鄭注(?~835)는 唐 文宗 때의 대신으로, 太僕卿‧御史大夫‧工部尙書‧翰林侍講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당 문종을 도와 전횡을 일삼던 환관 王守澄을 제거하고, 鳳翔 節度使가 되어 李訓 등과 환관 仇士良 등을 제거하고자 감로의 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피살되었다.
2)?~835. 자는 子垂이다. 初名은 仲言이다. 隴西 成紀 출신이다. 唐 文宗 때의 大臣이다. 進士로 급제하여 文宗 太和 8년(834)에 환관 王守澄의 천거를 받아 翰林侍講이 되었다. 다음해 禮部 侍郞 同平章事가 되었다. 鄭注와 결탁하여 宰臣 李德裕‧李宗閔 등을 배척하였다. 文宗을 위하여 ‘太平之策’을 수립하여 먼저 환관 세력을 제거하고 다음으로 河湟을 수복하고 다시 河北을 수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전후로 환관 陳及‧王守澄 등을 죽이고 鳳翔 節度使 鄭注와 ‘甘露의 變’을 일으켜 환관 仇士良 등을 제거할 것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도리어 피살되었다.
역주15 巫蠱 : 漢 武帝(기원전 156~기원전 87) 征和 2年(기원전 91)에 일어난 巫蠱의 獄을 이른다. 무제의 寵臣이었던 江充(?~기원전 91)과 戾太子 劉據(기원전 128~기원전 91)가 불화하였다. 강충은 무제가 붕어하고 여태자가 즉위하면 위태롭게 될 것을 걱정하여 무제가 병들자 여태자가 저주하여 병이 난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여태자는 당시 甘泉宮에서 무제를 알현하여 해명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長樂宮의 호위병을 동원하여 강충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반란으로 오인한 무제에게 토벌을 당해 도성에서 탈출하였다가 결국 자결하였다. 《漢書 卷63 武五子傳, 卷45 江充傳》
역주16 甘露之禍 : 唐 文宗 太和 9년(835)에 일어난 甘露의 變을 이른다. 당 문종 시기 환관의 전횡은 큰 문제를 야기하였다. 문종은 재상 李訓 등을 이용하여 환관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재상 이훈은 절도사 鄭注 등과 左金吾廳의 석류나무에 감로가 내렸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金吾大將軍 韓約을 시켜 金吾衛를 동원하여 금오청 문 밖에 매복시켰다가 환관들이 구경하러 오면 일거에 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神策軍을 주관하던 환관 仇士良과 魚弘志는 문종의 명을 받들어 감로를 살피러 갔다가 매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에 급히 含元殿으로 가서 문종을 옹위하여 大明宮으로 들어가 농성하고 신책군을 동원하여 이훈 등을 척살하였다. 이후 문종은 환관들에 의해 사실상 유폐되었다가 開成 5년(840)에 붕어하였다. 《舊唐書 卷169 李訓傳》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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