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후세의 임금으로서 학문을 좋아한 사람으로는 唐 太宗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에 이미 경학에 마음을 쏟아 名儒를 초빙하여 學士로 삼아 경학을 講磨하였으니, 이는 三代 이후에 없었던 일입니다.
즉위한 뒤에는 弘文殿 옆에 弘文館을 설치하여 학사들을 大內로 불러들여 번갈아 숙직하고 쉬게 하면서 조정에서 정무를 보는 틈틈이 함께 고금의 일에 대해 토론하고 성패를 논하느라 때로는 해가 저물거나 한밤중이 되기도 하여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또 삼대 이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陸贄가 이 일을 들어 唐 德宗에게 아뢰기를 “
논의가 농사의 어려움에 미치게 되면 태종께서는 절약을 힘써 준수하셨고, 논의가 여염의 괴로움에 미치게 되면 태종께서는 조세와 요역을 중단하기를 논의하셨습니다.”라고 하였으니,
原注
우리나라 열성조의 盛世 때에는 명유들을 정선하여 經筵에 둘러서게 하여 邇英閣과 崇政殿에서 스스럼없이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밤에 궐내에서 입직할 때에도 수시로 召對하였습니다.
聖學을 계승하여 밝히고 聰明叡智를 틔워 넓힌 것이 아마도 貞觀시대와 실로 같았을 것입니다.
낮에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충분한데, 또 굳이 夜對까지 더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임금의 한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매우 많지만, 유독 음란한 음악과 아름다운 여색이 특히 사람을 미혹시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便殿에 신하들이 엄숙하게 늘어서서 善言과 正論이 그 앞에 모여드니 마음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깊숙한 궁궐에서 황제가 만나는 대상이 환관의 무리가 아니면 후궁과 궁녀의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치장이 현란하게 눈을 어지럽히며 기이하고 음란한 기교들이 모두 마음을 방탕하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마음을 지키고 기르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夜對의 유익함이 낮에 가르침을 청하는 것보다 더욱 큰 이유일 것입니다.
聖明한 임금께서 위에 계시니, 만약 역대 聖王의 事業에 뜻을 두신다면 貞觀시대의 규모와 우리 祖宗의 家法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