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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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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弟子也 群兄弟 皆乘時侈靡하여 以輿馬聲色佚游相高호대 獨折節爲恭儉이어늘
成帝 封莽爲新都侯러시니하니 宿衛이러라
爵位 益尊호대 節操 益謙하여 散輿馬衣裘하여 振施賓客하며 收贍名士하고 交結將相‧卿大夫 甚衆하니
故在位 更推하며 游者 爲之談說하니 虛譽 隆洽하여 傾其諸父矣 敢爲激發之行하여 處之不慙恧注+恧, 愧也.하더니
大司馬曲陽侯根 薦莽自代어늘 하시니 旣拔出同列하여 繼四父而輔政注+四人, 皆爲大司馬而莽之諸父也.이라 欲令名譽過前人하여
諸賢良하여 以爲하고 賞賜邑錢 盡以享士하더니 하다


17-4-가
나라 왕망王莽효원황후孝元皇后 동생의 아들이다. 왕망의 사촌들이 모두 때를 잘 만나 사치를 일삼아서 거마車馬가기歌妓와 미녀들을 거느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서로 뽐냈는데, 왕망은 유독 절제하여 공손함과 검소함을 실천하였다.
성제成帝가 왕망을 신도후新都侯로 봉하였고 기도위騎都尉광록대부光祿大夫시중侍中으로 전직轉職시키자 숙위를 신중하게 하였다.
왕망은 작위가 더욱 높아졌음에도 절조節操가 더욱 겸손하여 거마와 의복을 나누어주어 빈객들을 구제하였으며 명사名士들을 거두어 후원하고 장상將相경대부卿大夫와 교분을 맺은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왕망을 추천하고 명망이 있는 인사들은 왕망을 선전하였으니 왕망의 헛된 명성이 가득 넘쳐나 그의 제부諸父들을 능가하였다. 왕망은 감히 지나치게 억지스러울 만큼 가식적인 행동을 일삼아 그렇게 처신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注+’은 ‘부끄러워하다’라는 뜻이다.
후에 대사마 곡양후 왕근大司馬 曲陽侯 王根이 자신의 후임으로 왕망을 추천하자, 성제成帝가 마침내 왕망을 발탁하여 대사마로 임명하였다. 왕망이 동렬同列에서 두각을 나타낸 뒤에는 네 제부諸父들의 뒤를 이어 국정을 보좌하게 되었으므로注+왕봉王鳳왕상王商왕음王音왕근王根 네 사람은 모두 대사마大司馬가 되었으며 왕망王莽제부諸父들이었다. 명예가 이전의 제부들을 능가하게 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여러 현량한 이들을 초빙하여 연사掾史로 임명하고 상사賞賜봉읍封邑의 수입을 모두 사인士人들을 대접하는 데 썼다.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부태후傅太后존호尊號를 칭하는 것에 대해 간쟁한 일로 왕망을 봉국封國으로 가게 하였다.


역주
역주1 17-4-가 : 관련 내용이 《前漢書》 卷99上 〈王莽傳〉에 보인다.
역주2 王莽 : 기원전 45~23. 자는 巨君으로 魏郡 元城 사람이다. 漢 元帝의 황후인 王政君(孝元皇后)의 조카이자 王曼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친을 잃어 다른 왕씨들에 비해 제후에 일찍 봉해지지 못했다가 백부인 王鳳의 병을 간호한 것을 계기로 왕봉의 추천을 받아 黃門郞이 되었다. 永始 원년(기원전 16)에 新都侯로 봉해졌으며 綏和 원년(기원전 8)에 大司馬가 되어 국정을 보좌하였다. 元壽 2년(기원전 1)에 哀帝가 죽자 平帝를 옹립하였으며, 元始 원년(1)에 신하들을 시켜 安漢公의 칭호를 받아 국정을 전단하였다. 3년 후에는 王舜 등을 사주하여 자신을 宰衡으로 칭하게 하였다. 원시 5년(5)에 평제가 죽자 스스로 攝皇帝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居攝 원년(6)에 자신을 假皇帝라고 하였다. 거섭 3년(8)에 연호를 初始로 바꾸고 稱帝함으로써 新나라를 건국하였다. 이후 개혁을 시도했으나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과중하여 백성들과 한나라 宗室들의 봉기를 야기하였다. 地皇 4년(23)에 綠林軍이 長安에 입성했을 때 도주했다가 상인 杜吳에게 살해당하면서 신나라도 멸망하였다.
역주3 孝元皇后 : 기원전 71~13. 성은 王, 이름은 政君으로, 漢 元帝 劉奭의 황후이자 成帝 劉驁의 모친이다. 魏郡 元城縣 사람으로 왕망의 고모이다. 기원전 33년에 원제가 죽고 성제가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었다. 이때부터 왕씨들이 정치에 관여하면서 국정을 장악하였다. 기원전 7년에 성제가 죽자 원제의 손자인 哀帝 劉欣이 즉위하면서 太皇太后가 되었으나, 애제의 조모인 傅氏와 어머니인 丁氏 일가들이 정사에 관여하여 왕씨의 권력은 약해졌다. 그 후 기원전 1년에 애제가 죽고 平帝가 즉위하자 애제의 외척과 측근들을 배제하였으며 왕망을 大司馬로 삼아 국정을 보좌하게 하였다. 왕망의 찬탈 음모를 견제하다가 서기 5년에 평제가 독살되고 劉嬰이 옹립되자 왕망이 假皇帝를 자칭하며 傳國玉璽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분노하면서도 막지 못하였다. 왕망이 황제로 즉위하자 新室文母太皇太后라는 칭호를 받았다.
역주4 騎都尉 : 騎兵을 통솔하는 군관으로 창설 시기는 분명치 않다. 西漢 때에는 中級 武官으로서 황제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侍中이라는 벼슬이 더해졌다. 《漢書辭典 騎都尉》 《胡琦峻, 漢代官印選, 北京:學苑出版社, 2011, 180쪽》
역주5 光祿大夫 : 議論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실제로는 황제의 高級 參謀였으며 대부들 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았다. 이 관직 앞에는 종종 給事中이나 侍中이라는 직함이 앞에 붙어 황제의 근신이 되었으므로 영예로웠을 뿐만 아니라 권력도 컸다. 《漢書辭典 光祿大夫》
역주6 侍中 : 秦나라 때 창설되었으며 漢나라 때에는 定員이 없었다. 列侯에서부터 문무 관원들에 이르기까지 이 벼슬을 겸하면 궁중에 출입하며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다. 처음에는 황제의 수레나 의복 등을 분담하였으나 점차 정사에 간여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현귀해졌다. 《漢書辭典 侍中》
역주7 : 사고본에는 ‘勑’으로 되어 있다.
역주8 : 대전본에는 ‘廌’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9 上遂擢爲大司馬 : 成帝 綏和 원년(기원전 8)의 일로 이때 왕망의 나이는 38세였다. 《前漢書 卷99上 王莽傳》
역주10 : ?~기원전 22. 王鳳을 가리킨다. 자는 孝卿으로 東平陵 사람이다. 孝元皇后 王政君의 아우이다. 부친 王禁이 병사하자 陽平侯를 승습하고 衛尉‧侍中이 되었으며, 成帝가 즉위하자 大司馬‧大將軍‧錄尙書事가 되었다. 왕봉의 형제들 가운데 요절한 王曼을 제외하고는 모두 侯에 봉해졌으며, 왕씨들이 국정을 전단하자 황제의 권위가 쇠해졌다. 11년에 걸쳐 조정을 장악했으며 陽朔 3년(기원전 22)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敬成이다.
역주11 : ?~기원전 12. 王商을 가리킨다. 자는 子夏로 孝元皇后 王政君의 아우이다. 建始 원년(기원전 32)에 關內侯가 되고 河平 2년(기원전 27)에 成都侯에 봉해졌다. 永始 2년(기원전 15)에 王音이 죽자 大司馬‧衛將軍에 임명되어 국정을 보좌하였다. 元延 원년(기원전 12)에는 大司馬‧大將軍으로 승진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병사하였다. 시호는 景成이다.
역주12 : 사고본에는 ‘立’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기원전 15. 王音을 가리킨다. 孝元皇后 王政君의 從姪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儒術을 배웠으며 侍中‧太僕 등을 지냈다. 建始 4년(기원전 29)에는 御史大夫가 되었다. 이듬해 王鳳이 중병에 걸렸을 때 成帝에게 왕음을 추천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陽朔 3년(기원전 22)에 大司馬‧車騎將軍‧領尙書事에 올라 국정을 보좌했으며 후에 安陽侯로 봉해졌다. 시호는 敬이다.
역주13 : ?~기원전 2. 王根을 가리킨다. 자는 稚卿으로 東平陵 사람이다. 孝元皇后 王政君의 아우이다. 成帝 建始 원년(기원전 32)에 關內侯가 되고 光祿勳에 임명되었다. 河平 2년(기원전 27)에 曲陽侯로 봉해지고 元延 원년(기원전 12)에 王商의 뒤를 이어 大司馬‧驃騎將軍이 되었다. 哀帝 綏和 원년(기원전 8)에 병으로 사직하면서 후임으로 王莽을 추천하여 大司馬가 되게 하였다. 사치와 蓄財를 일삼았는데 성제가 붕어했을 때에는 掖庭의 女樂을 데려와 술판을 벌이고 가무를 벌였다. 마침내 이 일로 解光에게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고 封地인 曲陽으로 돌아갔다. 시호는 煬이다. 왕망이 新나라를 건국한 뒤에 直道讓公으로 追諡하였다.
역주14 : 대전본에는 ‘騁’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전한서》에는 ‘聘’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掾史 : 한나라 때에는 두 부류의 掾史가 있었다. 하나는 掾과 史의 총칭으로, 郡縣에 소속된 아전을 가리킨다. 이때 掾은 正官, 史는 副官으로 한 曹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다른 하나는 公卿의 府에 소속된 아전 가운데 掾이나 史로 불리는 이들을 두루 칭하는 말이다. 《中國歷代官制大詞典 掾史》
역주16 哀帝……就國 : 기원전 7년에 哀帝가 즉위했을 때 애제의 조모인 傅太后와 모친인 丁姬가 살아 있었는데, 高昌侯 董宏이 上書하여 정희에게 존호를 올리자고 했으나 왕망은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2년 후에 부태후와 정희가 모두 존호를 칭하게 되자, 승상 朱博이 애제에게 왕망의 작위와 封土를 회수하고 왕망을 파면하여 庶人으로 삼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애제는 왕망이 태황태후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왕망을 封國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前漢書 卷99上 王莽傳》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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