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3)

대학연의(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卽位注+休, 權之子. 左將軍 與丞相으로 皆貴寵用事하여 以佞巧 更相表裏하더니
吳主 喜讀書 欲與‧博士으로 講論이어늘 以昭‧冲 切直하니 恐其入侍 陰言己過하여
固諫止之한대 吳主 曰 孤之涉學群書 略徧하니 但欲與昭等講習舊聞이라 亦何所損이리오
特恐昭等 道臣下姦慝하여 故不欲令入이어니와 如此之事 已自備 不須昭等然後 乃解也니라
皇恐陳謝하고 且言恐妨政事라한대 吳主務‧學業 其流 各異 不相妨也라호대
然吳主 恐布疑懼하여 卒如布意하여 廢講業하고 不復使昭等入하다


18-14-가
오주 손휴吳主 孫休가 즉위하자注+’는 손권孫權(182~252)의 아들이다. 좌장군 장포左將軍 張布승상 복양흥丞相 濮陽興과 함께 모두 현귀한 신분으로 총애를 받아 권력을 휘둘러서 교묘한 말재주로 결탁하여 서로 안과 밖이 되었다.
오주가 독서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박사제주 위소博士祭酒 韋昭, 박사 성충博士 盛冲과 함께 강론을 하고자 하였는데, 장포는 위소와 성충이 절직切直하여 그들이 입시했을 때 은연중 자신의 잘못을 말할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한사코 간하여 만류하자, 오주가 말하였다. “내가 여러 책들을 배운 것이 대강 두루 본 것이니 다만 위소 등과 옛날 배운 것들을 강습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또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대는 단지 위소 등이 신하의 간특함을 말할까 두려워 이 때문에 강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것뿐이겠지만, 이런 일은 내가 이미 별도로 대책을 마련해두었으니 굳이 위소 등을 기다린 뒤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포가 황공하여 사죄를 하고 또 정사에 방해될까 두렵다고 하자, 오주가 말하였다. “정무와 학업은 표면적으로는 각기 다르지만 서로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주는 장포가 의구심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결국 장포의 뜻대로 강론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더 이상 위소 등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18-14-가 : 《資治通鑑》 卷78 〈魏紀10 元帝 下〉 景元 3년(262) 8월 조에 보인다.
역주2 吳主 : 《資治通鑑綱目》 〈凡例〉에 따르면 천자가 없는데 제후들이 모두 王이나 帝를 칭할 때, 즉 無統之君일 경우에는, 漢나라 이전에는 ‘某王’, 이후에는 ‘某主’, 소국이면 ‘某主某’ 또는 ‘某王某’ 또는 ‘某公某’라고 칭한다.
역주3 孫休 : 235~264(재위 258~264). 삼국시대 吳나라의 제3대 임금으로, 孫權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자는 子烈이다. 28세 때 琅琊王에 봉해졌으며, 太平 3년(258) 9월 26일 政變을 일으켜 제2대 임금 孫亮(243~260, 재위 252~258)을 會稽王으로 폐위한 孫綝(231~258)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즉위한 뒤 손침을 丞相으로 삼았으나 모든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자 곧 손침을 제거하였다. 재위 기간 중 五經博士를 설립하고 韋昭(204~273)를 初代 博士祭酒로 임명하였다.
역주4 張布 : ?~264. 삼국시대 吳나라의 장군이다. 孫休가 즉위한 뒤 長水校尉에서 輔義將軍으로 승진하고 永康侯에 봉해졌다. 이어서 左將軍에 임명되었다. 승상 손침이 권력을 전횡하자 손휴의 명을 받아 손침을 주살하였다. 손휴가 죽은 뒤 濮陽興과 함께 손휴의 아들을 폐하고 孫皓(242~284)를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손호가 주색에 빠지고 폭정을 하자 원망하고 후회하는 말을 하였다가 이를 안 손호에 의해 주살되었다.
역주5 濮陽興 : ?~264. 삼국시대 吳나라의 대신이다. 자는 子元이며 지금의 하남성 陳留 사람이다. 會稽 大守로 있을 때 잠시 회계에 살았던 孫休를 후하게 예우한 인연으로 뒤에 손휴가 즉위한 뒤 太常衛將軍, 平軍國事에 임명되고 外黃侯에 봉해졌다. 얼마 뒤 승상이 되었다. 손휴가 죽은 뒤 張布와 함께 孫皓를 옹립하였으나 얼마 뒤 萬彧의 무고를 받고 廣州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손호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역주6 祭酒 : 漢‧魏 이후의 관직명으로, 여기에서는 五經博士의 우두머리인 博士祭酒를 이른다.
역주7 韋昭 : 204~273. 삼국시대 저명한 史學家이다. 史書에서는 晉 武帝 司馬炎(236~290, 재위 265~290)의 부친인 司馬昭(211~265)를 휘하여 韋曜라고도 한다. 자는 弘嗣이며 지금의 강소성 丹陽인 吳郡 雲陽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丞相掾, 西安令, 尙書郞, 太子中庶子, 黃門侍郞, 太史令 등을 역임하였다. 孫休가 즉위한 뒤 太學博士 제도를 만들 때 博士祭酒로 임명되어 國子學을 관장하였다. 264년에 손휴가 죽고 孫皓가 즉위한 뒤 高陵亭侯에 봉해지고 中書僕射, 侍中, 領左國史에 임명되었다. 뒤에 손호가 대신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서로의 약점을 말하고 비방하라고 하였으나 이를 어기고 경전의 구절을 말하여 황제의 명에 거역했다 하여 하옥된 뒤 피살되었다. 저술에 《吳書》‧《漢書音義》‧《國語注》‧《官職訓》‧《三吳郡國志》 등이 있다. 열전이 《三國志》 〈吳志〉에 있다.
역주8 盛冲 : ?~?. 삼국시대 吳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孫休를 가르쳤던 인연으로 손휴가 즉위한 뒤 博士에 임명되었다.
역주9 : 사고본에는 ‘知’로 되어 있다.
역주10 : 저본‧대전본‧509본‧512본에는 ‘王’으로 되어 있으나, 사고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