滕定公
이 薨
注+定公, 滕君.커늘 世子
가 謂然友曰
注+世子, 定公之子, 是爲文公. 然友, 其傅也. 昔者
에 孟子
가 嘗與我言於宋
이어늘 於心終不忘
이라니
今也不幸하여 至於大故호니 吾欲使子로 問於孟子然後에 行事하노라
曾子가 曰 生事之以禮하며 死葬之以禮하며 祭之以禮면 可謂孝矣라하시니
諸侯之禮
는 吾未之學也
어니와 雖然
이나 吾
가 嘗聞之矣
로니 三年之喪
에 齊疏之服
과 飦粥之食
注+齊, 衣下縫也. 不緝曰斬衰, 緝之曰齊衰也. 疏, 麤也, 麤布也. 飦, 糜也. 喪禮, 日始食粥, 旣葬乃疏食.은 自天子達於庶人
하여 三代共之
하니라
然友가 反命하여 定爲三年之喪한대 父兄百官이 皆不欲曰
吾宗國魯先君도 莫之行하시고 吾先君도 亦莫之行也하시니 至於子之身而反之가 不可하이다
且志에 曰 喪祭는 從先祖라하니 曰吾有所受之也니이다
吾
가 日
에 未嘗學問
이요 好馳馬試劒
하다니 今也
에 父兄百官
이 不我足也
하니
孔子
가 曰 君薨
커시든 聽於冢宰
注+冢宰, 之長. 君薨, 子不聽政, 以冢宰攝國事.하나니 歠粥
하고 面深墨
하여 卽位而哭
이어든
注+尙, 與上通. 偃, 伏也.이라하시니 是在世子
하니라
百官族人이 可謂曰知라하며 及至葬하여 四方이 來觀之하더니 顔色之戚과 哭泣之哀에 吊者가 大悅하더라
등滕 정공定公이 죽자
注+‘정공定公’은 등滕나라 임금이다., 세자가 사부인
연우然友에게 말하였다
注+‘세자世子’는 정공定公의 아들이니, 바로 문공文公이다. ‘연우然友’는 문공의 사부師傅이다..
“지난번에 송宋나라에 갔을 때 맹자孟子께서 나에게 여러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끝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제 불행하게도 대상大喪을 당하였으니, 나는 선생님을 보내 맹자께 여쭈어본 뒤에 장례를 치르려 합니다.”
그리하여 연우가 추鄒에 가서 맹자에게 묻자, 맹자가 말하였다.
부모의 상은 진실로 자신의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증자曾子께서도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예禮로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 장례를 치르고 예로 제사를 지내면 효孝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제후의 예는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하였지만 내 일찍이 들은 것이 있으니, 삼년상에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미음과 죽을 먹는 것은
注+‘제齊’는 옷 아랫자락을 꿰맨 것이다. 옷 아랫자락을 꿰매지 않은 상복喪服을 참최斬衰라 하고 옷 아랫자락을 꿰맨 상복을 자최齊衰라고 한다. ‘소疏’는 ‘거칠다’라는 뜻이니, 거친 베이다. ‘전飦’은 미음이다. 상례喪禮에 따르면 부모가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비로소 죽을 먹고 장례를 치른 뒤에 거친 밥을 먹는다.천자天子에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삼대三代가 공유했던 제도였다.”
연우然友가 복명復命하여 삼년상을 행하기로 정하자, 여러 부형父兄과 백관百官들이 모두 반대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종주국인 노魯나라 선군先君도 삼년상을 행하지 않았고 우리 선군先君도 행하지 않았는데, 임금님의 대에 이르러 이것을 뒤집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옛 기록에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선조先祖를 따른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수받은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자 세자가 연우에게 말하였다
注+이는 문공文公의 말이다..
“내가 지난날 학문은 하지 않고 말 달리기와 칼 쓰기를 좋아했으므로 지금 종친들과 백관들이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대상大喪을 치르는 데 예禮를 다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위해 맹자께 한번 더 여쭈어주십시오.”
연우然友가 다시 추鄒에 가서 맹자孟子에게 묻자, 맹자가 말하였다.
하지만 그 원인을 다른 데서 찾아서는 안 된다.
공자孔子도 ‘임금이 붕어하면 백관들은 모든
정령政令을
총재冢宰에게 들으며
注+‘총재冢宰’는 육관六官의 우두머리이다. 임금이 죽으면 새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지 않고 총재冢宰로 하여금 국사國事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세자는 죽을 먹고 검게 타들어간 얼굴로
곡위哭位에 나아가 곡을 한다.
그러면 백관들과 담당자들이 모두 감히 슬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윗사람이 솔선수범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그보다 더 좋아하는 법이다.
위정자爲政者의
덕德은 바람과 같고 백성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되어 있다.’라고 하였으니
注+‘상尙’은 ‘상上’과 통용된다. ‘언偃’은 ‘엎드리다’라는 뜻이다., 이번 일은 세자에게 달려 있다.”
이번 일은 실로 나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고,
5개월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정령政令과 교령敎令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백관들과 족인族人들이 모두 “세자가 예를 안다.”라고 하였으며, 장례를 거행할 때가 되자 사방에서 와서 참관하였는데, 세자의 슬퍼하는 얼굴빛과 통곡하며 우는 모습에 조문 온 사람들이 매우 흡족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