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憲宗이 典籍에 흥미를 느끼고서 그 事跡들을 모아 귀감으로 삼았으니 마음 씀씀이가 훌륭합니다.
그러나 蔡州를 평정한 후에는 교만과 사치가 갑자기 나타나서 裴度가 忠直함으로 소외되었고, 李逢吉이 참소와 아첨으로 등용되었으며, 皇甫鏄과 程异가 羨餘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이는 邪正을 분변하지 못한 것이고 賢臣을 중용하지 않았던 것이며, 忠諫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훈과 재능이 있는 이를 녹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목공사가 일어나면 節儉에 위배되고 조세를 각박하게 징수하면 德政에 어긋나서, 이른바 열네 조항에 있어 어느 하나 어긋나지 않는 것이 없게 되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原注
안에 있으면서 만사를 제어하는 것은 마음이니, 옛 聖王들은 반드시 여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하나가 바르게 되면 만사가 바르지 않은 것이 없게 됩니다.
헌종이 前代 성패의 사적을 거울로 삼을 줄은 알았으나 옛사람의 《大學》의 근원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藩鎭이 평정되기 전에는 그래도 능히 노력하고 분발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승전했다는 보고를 받게 되자 교만방자해졌습니다.
귀감으로 삼았던 병풍은 비록 그대로 있었으나 생각은 이미 바뀌었으므로 이를 쓸모없는 기물로 보았으니, 그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하들 가운데 유독 裴垍 한 사람만이 능히 마음을 바르게 하는 말을 진언하였으나,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을 또한 언급하지 않아서 그저 그 강령만 들고 힘을 써야 할 데는 아뢰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사람들에게 克己復禮를 가르치면서 視‧聽‧言‧動의 조목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그것이 보탬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하가 되어 《대학》을 모르면 자신의 임금을 인도하여 正道에 합당하도록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