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書經》 〈열명說命〉注+‘열명說命’은 《서경書經》 〈상서商書〉의 편명이다. ‘열說’은 부열傅說이다. 부열은 부암傅巖이라는 들에서 판축板築하는 일을 했는데, 고종高宗이 꿈에서 그를 보고 재상으로 세웠다. 〈열명說命〉 3편을 지었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왕이 말하였다.
‘이리 오라, 그대 부열傅說이여!
나 소자小子는 옛날 감반甘盤에게 배웠는데注+‘이台’는 ‘나’이다. ‘소자小子’는 고종高宗의 겸칭謙稱이다. ‘감반甘盤’은 상商나라의 어진 신하이다. , 얼마 뒤에 감반은 황야에 은둔하였으며, 하河에 들어가서 살고 다시 하河에서 박亳으로 가서 끝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注+‘둔遯’은 ‘숨다’라는 뜻이다. ‘조徂’는 ‘가다’라는 뜻이다. ‘하河’와 ‘박亳’은 모두 지명이다. ‘기曁’는 ‘미치다’라는 뜻이다. ‘망罔’은 ‘없다’라는 뜻이다. ‘현顯’은 ‘환히 알다’라는 뜻이다..
그대는 나의 뜻을 가르쳐서注+‘훈訓’은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가르치는 것이 청주淸酒나 예주醴酒를 빚는 것과 같다면 그대는 누룩과 엿기름이며, 간을 맞춘 국을 끓이는 것과 같다면 그대는 소금과 매실이니, 그대는 나를 여러 방면으로 수양시켜 나를 버리지 말라.
내가 능히 그대의 가르침을 행할 것이다.’注+‘매邁’는 ‘행하다’라는 뜻이다. ‘내乃’는 ‘너’라는 뜻이다.
부열傅說이 말하였다.
‘왕이시여!
사람을 견문見聞이 많은 이로 구하는 것은 바로 사업을 수립하기 위해서입니다注+‘건建’은 ‘세우다’라는 뜻이다. .
옛 가르침을 배워야 소득이 있을 것이니注+‘획獲’은 ‘얻다’라는 뜻이다., 일에 있어 옛것을 본받지 않고注+‘사師’는 ‘본받다’라는 뜻이다. 세대를 길이 이어갈 수 있다는 말은注+‘극克’은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영永’은 ‘길이 이어가다’라는 뜻이다. 제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注+‘비匪’는 ‘아니다’라는 뜻이다..
배우는 것은 뜻을 겸손하게 가져야 합니다注+‘손遜’은 ‘겸손하다’라는 뜻이다. ‘무務’는 ‘오로지 힘쓰다’라는 뜻이다. ‘민敏’은 ‘신속하다’라는 뜻이다..
힘써서 때에 따라 민첩하게 행하면 그 수양됨이 마침내 오게 될 것이니, 믿음을 가지고 이를 유념하면注+‘윤允’은 ‘믿다’라는 뜻이다. ‘회懷’는 ‘유념하다’라는 뜻이다. ‘자玆’는 ‘이’라는 뜻이다. 도가 그 몸에 쌓이게 될 것입니다注+‘적積’은 ‘쌓이다’라는 뜻이다. ‘궐厥’은 ‘그’라는 뜻이다. ‘궁躬’은 ‘몸’이라는 뜻이다..
가르치는 것은 배움의 반이니注+‘효斅’는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생각을 시종일관 항상 배움에 둔다면注+‘전典’은 ‘항상 하다’라는 뜻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 덕이 수양될 것입니다注+‘망罔’은 ‘없다’라는 뜻이다. ‘각覺’은 ‘지知(지각하다)’와 같다..
선왕先王께서 이루어놓으신 법을 비추어 보아注+‘감監’은 ‘비추어 보다’라는 뜻이다. ‘선왕先王’은 성탕成湯을 말한다. ‘헌憲’은 ‘법’이라는 뜻이다. 길이 허물이 없게 하소서注+‘영永’은 ‘길이’라는 뜻이다. ‘건愆’은 ‘허물’이라는 뜻이다. .
제가 능히 그 뜻을 공경히 받들어서注+‘식式’은 ‘~로써’라는 뜻이다. ‘극克’은 ‘능히’라는 뜻이다. ‘흠欽’은 ‘공경하다’라는 뜻이다. ‘승承’은 ‘받들다’라는 뜻이다. 널리 어질고 유능한 인재들을 초치하여注+‘방旁’은 ‘널리’라는 뜻이다. ‘준俊’은 ‘어질다’라는 뜻이다. ‘예乂’는 남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음을 말한다. 여러 직위에 세우겠습니다.’”注+‘서庶’는 ‘여럿’이라는 뜻이다. ‘위位’는 ‘직위’라는 뜻이다.
역주
역주13-1-가 :
《書經》 〈商書 說命 下〉에 보인다. 〈說命〉은 商나라 제22대 임금인 高宗이 정승인 傅說에게 명한 말을 기록한 것으로, 上‧中‧下 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편은 부열을 얻어 재상에 명한 말을, 중편은 부열이 재상이 되어 경계를 올린 말을, 하편은 부열이 학문을 논한 말을 기록하였다. 이것을 모두 ‘命’이라고 한 것은 고종이 부열에게 명한 것이 이 세 편의 강령이 되기 때문이다.
역주2旣乃……徂亳 :
이에 대해 은둔의 주체를 ‘高宗’으로 본 설과 ‘甘盤’으로 본 두 가지 설이 있다. 은둔의 주체를 고종으로 본 설은 蔡沈이 채택한 설이다. 채침은 그 근거로 《書經》 〈無逸〉의 “고종 때에는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로워 민간인과 함께했다.[其在高宗時 舊勞于外 爰墍小人]”, 《서경》 〈君奭〉의 “武丁(고종) 때에는 甘盤과 같은 이가 있었다. 이들을 따라 정사를 베풀어 銀나라를 보존해서 다스렸다.[在武丁時則有若甘盤 率惟玆有陳 保乂有殷]”, 《國語》 卷17 〈楚語 上〉의 “옛날 은나라 武丁이……河에 들어갔고 河에서 亳으로 갔다.[昔殷武丁……以入于河 自河徂亳]”, 孔穎達이 “고종이 왕자였을 때 그의 부친인 小乙이 민간의 어려움을 알게 하고자 했으므로 민간에서 거주하도록 하였다.[高宗爲王子時 其父小乙欲其知民之艱苦 故使居民閒也]”라고 말했다는 구절을 들었는데, 이는 고종의 즉위 후에도 상당 기간 감반의 보좌가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은둔의 주체를 감반으로 본 설은 진덕수의 《西山讀書記》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呂祖謙의 《東萊書說》의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내(武丁)가 옛날에 일찍이 감반에게 배웠는데 학업을 미처 마치기 전에 하루아침에 나를 버려두고 그 자취를 숨겼다. 그를 찾아 들판에 가서 물으니 이미 河에 들어갔고, 河에 이르러 물어보니 이미 亳으로 가서 종적이 없어져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我舊嘗學于甘盤 學未及終 一旦舍之而遯循其蹤跡 而求之至野而問 已入于河 至河而問 已往于亳 蹤迹泯滅 終不復顯]”라고 하여 은둔의 주체를 감반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는 은둔의 주체를 감반으로 보고 번역하기로 한다.
역주3墍厥終罔顯 :
蔡沈에 따르면 “끝내 드러나 밝음이 없다.[終無所顯明]”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마침에 이르도록 학문이 드러나지 못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덕수의 按說에 따르면 감반이 은둔하자 고종은 그의 행방을 찾았으나 감반이 여러 차례 은둔처를 옮겨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끝내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書集傳 說命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