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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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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望日隆하니
珧(양요) 皆惡之러니
言於曰 陛下 詔諸侯之國하시니 宜從親者始 親者 莫如齊王이니 今獨留京師 可乎잇가
曰 百僚內外 皆歸心齊王하니 陛下萬歲後 太子 不得立矣리이다
陛下 試詔齊王之國하시면 必擧朝 以爲不可라하리니 則臣言 驗矣리이다
以爲然하여 하신대
征東大將軍 上書以爲 攸 至親盛德이라 宜贊皇朝하여 與聞政事 하니 宜留攸居之니이다
於是 扶風王‧光祿大夫‧中護軍‧侍中 皆切諫한대 帝竝不從하시고
議寵錫齊王之物하신대 表稱王不宜出外니이다
事過하니 乃奏當如博士議니이다
覽之大怒하여 免志官하고 旉等 皆付廷尉科罪하니 하다
愛攸甚篤이러시니 러시니
及薨 哀慟不已어시늘 馮紞 侍側曰 齊王 名過其實하고 天下 歸之러니
今自薨殞하니 社稷之福也 陛下 何哀之過잇고 收淚而止하시다


23-2-가
제왕 사마유齊王 司馬攸가 덕망이 나날이 높아가자 순욱荀勗풍담馮紞양요楊珧가 모두 사마유를 미워하였다.
풍담이 진 무제晉 武帝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조서를 내려 제후들에게 자신의 봉국封國으로 돌아가도록 하셨으니, 의당 가까운 친척부터 가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으로 제왕만 한 이가 없으니, 지금 제왕을 유독 경사京師에 남겨두는 것이 될 말입니까.”
순욱이 말하였다. “백관의 마음이 안팎으로 모두 제왕에게 쏠리고 있으니, 폐하께서 붕어하신 뒤에 태자가 즉위하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제왕에게 조서를 내려 봉국으로 가라고 해보소서. 그러면 틀림없이 온 조정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신의 말이 입증될 것입니다.”
진 무제晉 武帝가 이들의 말을 옳게 여겨서 조서를 내려 〈제왕 사마유齊王 司馬攸를〉 대사마大司馬도독청주제군사都督靑州諸軍事에 임명하자,
정동대장군 왕혼征東大將軍 王渾이 상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마유는 지친으로 덕망이 높으니 조정을 도와 정사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태자태보太子太保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사마유를 경사에 머무르게 하여 이 자리에 앉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풍왕 사마준扶風王 司馬駿, 광록대부 이희光祿大夫 李憙, 중호군 양수中護軍 羊琇, 시중 왕제侍中 王濟견덕甄德이 모두 극구 간하였는데, 무제가 이들의 간언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
무제가 태상太常에 명을 내려 제왕에게 은사로 내릴 물건을 의론하게 하자, 박사 유부庾旉 등 일곱 사람이 표문을 올려 “왕은 지방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사안이 박사제주 조지博士祭酒 曹志를 거치게 되자 조지가 “마땅히 박사들의 논의와 같이 해야 합니다.”라고 상주하였다.
무제가 이 상소를 보고 크게 노하여 조지의 관직을 파면하고 유부 등을 모두 정위廷尉에게 회부하여 죄목을 정하게 하였다. 사마유가 하직하고 도성을 떠난 지 수일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처음에 무제武帝사마유司馬攸를 끔찍히 사랑하였는데, 순욱荀勗풍담馮紞 등의 모함에 넘어가서 자신이 죽은 뒤 태자의 즉위에 대한 계책을 세우고자 하였기 때문에 사마유를 지방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사마유가 죽자 무제가 애통해 마지않았는데, 풍담이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말하였다. “제왕齊王(사마유)은 명성이 그 실제를 넘고 천하 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랐던 자입니다.
지금 자연스럽게 운명하였으니 이것은 사직社稷의 복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리 지나치게 슬퍼하십니까.” 무제가 눈물을 거두고 슬퍼하기를 그쳤다.


역주
역주1 23-2-가 : 《資治通鑑》 卷81 〈晉紀3 武帝 中〉 太康 3년(282) 윤4월 조에 보인다.
역주2 齊王攸 : 23-1-가 ‘齊王’ 주석 참조.
역주3 荀勗 : 23-1-가 ‘荀勗’ 주석 참조.
역주4 馮紞 : 23-1-가 ‘馮紞’ 주석 참조.
역주5 楊珧 : ?~291. 西晉의 간신이다. 자는 文琚이며 弘農 華陰 사람이다. 형 楊駿, 아우 楊濟와 함께 권세가 천하를 뒤흔들어서 당시에 ‘三楊’으로 불렸다. 晉 武帝에게 총애를 받아 尙書令, 衛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惠帝가 즉위하자 자신의 권세가 지나쳐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자주 사직을 청하였다. 만년에 齊王 司馬攸를 참소하여 封國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형 양준과 함께 賈皇后에게 피살되었다.
역주6 : 사고본에는 ‘揚’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7 : 23-1-가 ‘晉武帝’ 주석 참조.
역주8 詔以……軍事 : 晉 武帝 太康 3년(282) 12월 13일 甲申日의 일이다.
역주9 王渾 : 223~297. 西晉의 大臣이다. 자는 玄沖이며 太原 晉陽 사람이다. 魏나라 司空 王昶의 아들이며 아들은 武帝의 사위가 되었다. 晉 武帝 咸寧 5년(279)에 장수로 東吳 정벌에 참여하여 京陵公에 봉해졌다. 征東大將軍 등을 거쳐 司徒에 올랐고, 惠帝(259~307)가 즉위한 뒤 侍中, 錄尙書事가 더해졌다. 시호는 元이다.
역주10 太子太保 : 관직명이다. 西晉 때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太子太師, 太子太傅, 太子太保의 東宮三師 중 지위가 가장 낮다.
역주11 : 대전본‧사고본에는 ‘缺’로 되어 있다.
역주12 駿 : 司馬懿의 아들 司馬駿(233~286)으로, 서진 시기의 將領이자 藩王이다. 晉 景帝 司馬師와 文帝 司馬昭의 異母弟이며 武帝 司馬炎의 숙부이다. 晉나라가 건립된 뒤 汝陰王, 扶風王에 봉해지고 鎭西大將軍, 驃騎將軍, 開府儀同三司, 都督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大司馬‧侍中‧假黃鉞에 추증되었다. 시호가 武이기 때문에 扶風武王으로 불린다.
역주13 李憙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위진 시기의 대신으로, 上黨郡 銅鞮縣 사람이다. 동한 大鴻臚 李牷의 아들이다. 西晉이 건립된 뒤 光祿大夫‧特進에 임명되었고 祁侯에 봉해졌다. 사후에 太保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成이다.
역주14 羊琇 : 236~282. 서진 때의 외척이자 대신으로, 泰山 南城 사람이다. 泰山 羊氏 명문가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 羊耽은 魏나라 때 太常이었다. 晉 景帝 司馬師의 景獻皇后 羊徽瑜의 사촌 아우이자 서진의 명장 羊祜의 사촌 아우이다. 中護軍으로 禁兵을 관장하였으며 무제의 총애가 두터웠다. 齊王 司馬攸를 지방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간하다가 太僕으로 좌천되자 병이 나서 죽었다.
역주15 王濟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서진 때의 대신으로, 太原 晉陽 사람이다. 司徒 王渾의 아들이자 晉 文帝의 사위이다. 駙馬都尉에 제수되었으며, 驍騎將軍, 侍中을 역임하였다.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으며 용력이 뛰어났다. 文詞에도 뛰어나 당시에 和嶠‧裴楷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사후에 驃騎將軍에 추증되었다.
역주16 甄德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위진 시기의 대신으로 西平 사람이다. 晉 武帝의 누나 京兆公主의 남편이다. 본래 성은 郭氏로 魏 明帝 曹叡의 明元郭皇后의 사촌 아우였으나 뒤에 甄氏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명제 사후 曹芳이 즉위하자 司馬師가 郭太后에게 영합하여 자기 딸을 견덕에게 시집보내었으나 일찍 죽자 다시 司馬昭의 딸을 견덕에게 시집보내어 사마씨와 인척을 맺었다. 晉나라가 건립된 뒤 宗正, 侍中, 大鴻臚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中軍大將軍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恭公이다.
역주17 帝命……科罪 : 晉 武帝 太康 4년(283) 1월의 일이다. 무제가 庾旉 등의 사건을 廷尉에게 내리자, 정위 劉頌이 유부 등의 죄는 大不敬에 해당하니 棄市刑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대신들 사이에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자 무제는 7일 뒤에 조서를 내려, 유부는 의론의 당사자이니 효수하고 나머지 태숙광 등은 모두 除名하라고 하였다.
역주18 太常 : 관직명이자 기구 이름이다. 주로 종묘와 조정의 제사 의식, 능침과 陵邑의 행정, 문화 교육과 박사의 선발 등을 담당하였다.
역주19 博士庾旉等七人 : 博士 庾旉, 太叔廣, 劉暾(유돈), 繆蔚(목울), 郭頤, 秦秀, 傅珍 등 7인이다.
역주20 博士祭酒 : 관직명이다. 博士의 우두머리로, 太常에 속하였다. 魏나라 때 太學博士祭酒로 명칭을 바꾸어 國子學의 長으로 삼았으며 晉나라 이후로는 國子祭酒라고 칭하였다.
역주21 曹志 : ?~283. 魏晉 시기의 관리이다. 曹植의 서자로, 조식의 장자가 일찍 죽자 후사가 되어 濟北王을 계승하였다. 晉나라가 건립된 뒤에 鄄城縣公이 되었고, 樂平太守, 散騎常侍 兼國子博士, 博士祭酒 등을 역임하였다. 晉 武帝가 아우 司馬攸를 封國으로 보낼 때 상소하여 간하다가 免官되었다. 뒤에 다시 散騎常侍가 되었다. 시호는 定이다.
역주22 攸辭數日歐血薨 : 진 무제 태강 4년(283) 4월의 일이다. 齊王 司馬攸는 무제의 조서를 받고 분노와 원한으로 병이 나자 母后의 능을 지키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무제는 윤허하지 않고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어의가 돌아와 무제의 의중을 헤아려 사마유가 병이 나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무제는 사마유를 더욱 의심하여 속히 封國으로 가도록 재촉하였다. 결국 사마유가 병이 깊은 상태로 도성을 떠난 지 수일 만에 죽자 무제는 뒤늦게 어의가 거짓말한 것을 알고 어의를 죽였다.
역주23 爲荀……出之 : 23-1-가 참조.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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