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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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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9-1-나(按)
按 隋煬 不道하여 罪浮於紂而蘊‧矩‧世基諸臣 則其
然今考之컨대 蘊等所以眩惑其君者 初亡它技 一惟逢迎上意而已
知帝之耽嗜音樂也則請括天下散樂百戱하여 集于京師하여 樂工 至三萬餘人하니
於是 帝之心 蕩於鄭‧衛哇淫之聲而流連酣宴 無有窮極矣
知帝之好大喜功也則謂西域諸國 富於珍寶하니 請招而誘之하여 使入朝覲而渾‧厥 可平이라한대
於是 帝之心 慨然欲爲秦皇‧漢武之事而中國 疲弊하여 日趨於亡矣
原注
知帝 怒<확인 chi="薛道衡" key="302" kor="설도형" 비고="설도형/ 송">薛道衡進頌 有諷刺之意則組織其罪曰 原其情意하니 實爲悖逆이라한대
帝果悅之曰 公論其逆 體本心이라하니 以其能所惡也
知帝之怠於政事也則勸五日一視朝하여 曰 無效高祖 空自勞苦라한대
帝果悅之曰 惟有郭衍 心與我同이라하니 以其能順己所欲也
原注
其後盜賊 四起 知帝之意 尤所惡聞則四方表奏 抑而不達曰 天下何處 有許多賊이리오하며 曰 鼠竊狗偸 行且盡殄이라한대
於是 惑其言하여 發怒於蘇威하고 致疑於楊義臣하고 切齒於元善達而賊益猖熾하여 不可復制하여 不一二年 隋遂以亡하니
原諸人之所以爲此者컨대 欲以保有寵祿爾 而不知國事 旣敗 身無處所 何寵祿之可保邪리오
原注
卽數人而論之컨대 虞世基者 又姦之首‧佞之魁也
嘗曰 梁武 偏信朱异하여 以致臺城之辱하고 隋煬 偏信虞世基하여 以致江都之禍라하니
夫二君之所以信之者 由其能適己之欲也 孰知其所以適己者 以禍己歟리오
蓋忠言至論 往往逆人主之心하나 然揆之理而得則雖忤意而當從이요
姦言邪說 往往順人主之志하나 然揆之理而悖則雖合意而當察이니
人主 知此則揣摩之姦 不得售而窺伺之計 無所施矣리이다


原注
19-1-나()
[신안臣按] 수 양제隋 煬帝가 무도하여 죄가 주왕紂王보다 컸고 배온裵蘊, 배구裵矩, 우세기虞世基 등의 신하들은 바로 비렴飛廉악래惡來와 같은 간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고해보건대 배온 등이 자신의 군주를 현혹한 방법은 애당초 별다른 기술이 없었고 하나같이 양제의 의중에 영합하였을 뿐입니다.
양제가 음악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천하의 산악散樂백희百戱를 모아 경사京師에 집결시키도록 청하여 악공樂工이 3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양제의 마음이 의 비속하고 음란한 음악에 방탕해져 유락遊樂에 탐닉하고 주연酒宴이 끝이 없었습니다.
양제가 공적을 세우길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가 진귀한 보화가 많으니 그들을 불러서 꾀어 들어와 조근朝覲하도록 하면 토욕혼吐谷渾돌궐突厥을 평정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제의 마음이 꿈에 부풀어 진 시황제秦 始皇帝한 무제漢 武帝의 사업을 행하고자 하자 중국中國이 피폐해져 날이 갈수록 망국으로 치달렸습니다.
原注
설도형薛道衡이 올린 〈고조문황제송高祖文皇帝頌〉에 풍자의 의도가 있다는 데 양제가 노한 것을 알아채고는 그의 죄를 얽어서 말하기를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실로 패역죄에 해당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제가 과연 기뻐하며 말하기를 “공이 그를 패역죄로 논죄한 것은 짐의 마음을 매우 잘 이해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배온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제가 정사에 게을러진 것을 알고는 5일에 한 번 조당에 나아가 정무를 볼 것을 권하여 말하기를 “고조께서 공연히 스스로를 수고롭고 고생스럽게 한 것을 본받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양제가 과연 이를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직 곽연郭衍만이 내 마음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곽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原注
뒤에 도적이 사방에서 봉기했을 때 양제의 뜻이 특히 도적의 정황에 대해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방에서 오는 표주表奏를 눌러두고 줄여서 전하지 않고 말하기를 “천하 어디에 이처럼 많은 도적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쥐와 개가 훔치는 정도의 좀도둑들이라서 장차 전부 섬멸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양제가 우세기의 말에 현혹되어 소위蘇威에게 성을 내고 양의신楊義臣에게 의심을 품었고 원선달元善達에게 이를 갈아 도적이 더욱 창궐하여 다시는 제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두 해가 못 되어 나라가 마침내 이로써 망하였습니다.
간신들이 이를 행한 이유를 따져보면 총애와 봉록을 지키고자 했을 뿐인데,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나면 자신들도 몸 둘 곳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총애와 봉록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原注
몇몇 간신들을 가지고 논해보면 우세기虞世基라는 자는 또 간교한 신하 중의 으뜸이고 아첨하는 신하 중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므로 위징魏徵이 일찍이 “양 무제梁 武帝주이朱异만을 믿다가 대성臺城의 치욕을 당했고 수 양제隋 煬帝가 우세기만 믿다가 강도江都의 재앙을 당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두 임금이 이들을 신뢰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맞춰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들이 자신에게 맞춰주는 것이 자신을 해칠 뿐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옛날에 이윤伊尹태갑太甲에게 아뢰기를 “어떤 말이 당신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리에 맞는지 따져보고, 어떤 말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거든 반드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충언忠言지론至論이 자주 임금의 마음을 거스르지만 이치에 헤아려보아 부합한다면 비록 자기의 뜻에 거스르더라도 따라야 하고,
간언姦言사설邪說은 자주 임금의 뜻에 맞지만 이치에 헤아려보아 도리에 어긋난다면 비록 뜻에 부합하더라도 살펴야 합니다.
임금이 이를 알면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영합하는 간사함이 목적을 성취할 수 없고 임금의 의중을 엿보는 계략이 행해질 곳이 없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飛廉 : 殷나라 紂王의 총신이다. ‘蜚廉’이라고도 한다. 《맹자》 〈滕文公 下〉 제9장에 따르면 “주공이 무왕을 보필하여 주왕을 주살하고 3년 동안 엄나라를 정벌하여 그 임금을 토죄하고 비렴을 바닷가로 내쫓아 죽였다.[周公相武王 誅紂 伐奄三年 討其君 驅飛廉於海隅而戮之]”라고 하였다.
역주2 惡來 : 殷나라 紂王의 간신이다. ‘惡來革’이라고도 하며, 飛廉의 아들이다. 용력이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史記》 〈殷本紀〉에 따르면 “주왕이 또 악래를 임용하였다. 악래는 비방과 참소에 능하여 제후들이 이 때문에 더욱 소원해졌다.[紂又用惡來 惡來善毁讒 諸侯以此益疏]”라고 하였다.
역주3 : 사고본에는 ‘玅’로 되어 있다.
역주4 去己 : 대전본에는 雙行小字로 되어 있다.
역주5 魏徵 : 580~643. 唐 高祖‧太宗 연간의 宰相이자 諫臣이다. 자는 玄成이다. 魏郡 內黃 사람이다. 어렸을 때 빈곤하여 출가하여 道士가 되었다. 隋末에 瓦崗軍에 가담하여 李密을 돕다가 唐에 귀순하였고 다시 竇建德의 포로가 되어 그에게 등용되었다가 다시 唐에 귀부하였다. 太子洗馬에 임명되어 李建成의 측근이 되었다. 玄武門의 變 이후 唐 太宗의 발탁을 받아 諫議大夫가 되었다. 이후 秘書監‧侍中‧左光祿大夫 등을 역임하였고 鄭國公에 봉해졌다. 直諫으로 유명하였다. 시호는 文貞이다.
역주6 : 대전본에는 ‘證’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7 : 대전본‧사고본에는 ‘祗’로 되어 있다.
역주8 伊尹 : ?~?. 商初의 賢相이다. 이름은 伊 또는 摯이다. 尹‧阿衡‧保衡 등의 이칭은 이윤의 관직을 의미한다. 空桑 사람이다. 湯王이 有莘氏의 딸과 결혼할 때 媵臣으로 따라왔다가 발탁되었다. 湯王을 보좌하여 夏를 멸망시키고 商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탕왕의 사후에는 外丙‧仲壬‧太甲‧沃丁을 보좌했다. 태갑이 즉위 초에 선왕의 법을 어기고 無道를 자행하자, 桐宮에 유폐시키고 섭정하였다. 후에 태갑이 잘못을 뉘우치고 덕을 닦자 다시 복위시켰다. 일설에는 태갑의 제위를 찬탈하였고 태갑을 桐에 유폐시켰으나 國人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몰래 돌아온 태갑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서경》의 〈伊訓〉‧〈咸有一德〉 등이 이윤의 글로 전한다.
역주9 太甲 : ?~?(재위 ?~?). 商의 제4대 왕으로, 姓은 子이며, 이름은 太甲이다. 일명 祖甲이라고도 한다. 王號는 太宗이다. 商의 개국자인 湯王 天乙의 손자이며, 太丁의 아들이다. 《史記》 〈殷本紀〉에 따르면, 탕왕의 태자 태정은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이에 그의 동생인 外丙과 仲壬이 차례로 즉위하였는데, 중임이 죽자 伊尹이 太甲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즉위 원년에 태갑이 탕왕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덕을 어지럽히자, 이윤이 그를 桐宮으로 내쫓고 3년 동안 섭정하였다. 뒤에 태갑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자 이윤이 다시 복위시켰다. 이후 태갑이 덕치를 행하여 12년간 재위하였는데, 제후들이 심복하고 국가가 평안하게 다스려졌다. 이윤은 이를 기뻐하며 〈太甲訓〉 3편을 짓고, 태갑을 기려서 太宗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竹書紀年》에 태갑 원년에 이윤이 태갑을 桐으로 추방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7년 뒤에 태갑이 돌아와 이윤을 죽이고 즉위하였다고 한다.
역주10 有言……非道 : 《서경》 〈太甲 下〉에 보인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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