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25-6-나(안按)
[신안臣按] 상商나라의 형벌 제도가 경經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이윤伊尹이 탕왕湯王을 칭송한 것을 살펴보건대, “걸왕桀王의 잔학한 정사를 대신하여 관대한 정사를 펴시자 백성들이 믿고 그리워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전한서前漢書》에서 이른바 “형벌을 써서 간교한 사람을 처벌하였고 신체를 손상시켜 사악한 사람을 징치하였다.”라고 한 것은 틀림없이 상商나라의 정사가 아니니 학문하는 사람은 오직 경經만을 믿어야 할 뿐입니다.
주周나라의 형벌 제도로 말하면 《주관周官》에 자세히 보입니다. 대사도大司徒가 여덟 가지 형벌로 백성을 규찰하는 것은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 세 가지로 백성을 가르친 뒤에 합니다.
그런데 그 규찰하는 대상은 부모에게 불효한 것, 구족九族과 친목하지 않은 것, 인척姻戚과 친목하지 않은 것, 형제를 우애하지 않은 것, 붕우를 신임하지 않은 것, 빈자貧者를 구제하지 않은 것, 유언流言을 날조하는 것, 법도와 정사를 어지럽히는 사람인 경우일 뿐이니 바로 그 형벌은 다만 이로써 가르침을 삼을 뿐입니다.
原注
대사구大司寇가 나라의 세 가지 법을 관장하니, 새로 땅을 넓혀 제후를 세운 제후국에 형벌을 시행할 때에는 가벼운 법을 사용하고, 안정을 이어나가 선군先君의 기업을 지켜나가는 제후국에 형벌을 시행할 때에는 통상적인 법을 사용하고, 오직 찬탈과 시해, 모반과 반역이 일어난 제후국에 형벌을 시행할 때라야 무거운 법을 사용합니다.
태평한 나라는 통상적인 법을 쓰고 무거운 법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해서입니다. 소사구小司寇가 여덟 가지 죄를 의논하여 형벌을 정하는 법을 국법에 덧붙여,
임금의 오복친五服親과 외친外親은 죄를 심의하는 것이 있고, 임금의 오랜 지인은 죄를 심의하는 것이 있고, 덕행德行이 있는 사람, 학문과 기예가 있는 사람, 훈공勳功이 있는 사람, 나랏일에 근로한 사람, 대부 이상의 존귀한 사람, 임금이 손님으로 대우하는 사람에 대해 모두 죄를 심의하는 것이 있어서 그 법을 으레 시행한 적이 없습니다.
사자司刺가 세 가지 관대하게 처결하는 법과 세 가지 사면하는 법을 관장하여, 대상을 오인하여 죽인 자를 관대하게 처결하고, 의도치 않게 죽인 자를 관대하게 처결하고,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죽게 만든 자를 또한 관대하게 처결하고, 8세 미만의 어린이를 사면하고, 7, 80세 이상의 노인을 사면하고, 어리석은 백치를 또한 사면합니다.
그리하여 그 죄를 일률적으로 처벌한 적이 없습니다. 그 지극한 인자함과 충후함이 위로 순舜임금에 필적하여 주 성왕周 成王과 강왕康王의 시대에는 형벌이 방기되어 쓰이지 않은 지 거의 40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하를 다스리는 강령을 인仁과 의義에 두었다.”라는 것입니다.
原注
진秦나라가 효공孝公 때부터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시행하였습니다. 토지를 측량할 때 1보步가 6척尺을 넘는 자를 처벌하고 길에 재를 버린 자를 처형하여, 위수渭水 가에서 죄수를 심리하여 처형할 때 위수의 물이 이 때문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진 시황秦 始皇이 이미 6국을 병탄하여 멸망시키고 난 뒤에 스스로 수덕水德의 다스림이 강단 있고 엄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범사凡事를 모두 법에 따라 처결하여, 엄혹하여 덕과 의리를 따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고 오랫동안 사면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사李斯의 말을 써서 감히 모여서 시서詩書를 이야기하는 자를 기시棄市하고, 옛 정사를 들어서 현실을 비판하는 자를 멸족시키고, 오로지 형옥刑獄을 관장하는 관리만을 신임하여 총애받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하고, 공자孔子를 칭송하고 본받는 모든 이를 모두 엄혹한 형법으로 처벌하였습니다.
진 이세秦 二世에 이르러 조고趙高의 계책을 써서 대신과 여러 종친宗親을 주살하여 죄과에 따라 연좌시켜 체포하니 근신近臣과 숙위宿衛하는 사람마저도 처벌을 면할 수 있던 이가 없었고 여섯 공자가 사社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 이사李斯의 계책을 써서 독책督責하는 방법을 행하여 무릇 사람을 많이 죽인 자를 훌륭한 관리라고 여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하를 다스리는 강령을 형벌과 법령에 두었다.”라는 것입니다.
原注
하지만 주周나라가 존속된 것은 8백여 년이었고 진秦나라가 망하기까지는 겨우 진 이세秦 二世에 미쳐서입니다. 가의賈誼가 이른바 ‘매우 명확히 드러난 징험’이라는 것이 어찌 근거 없는 말이겠습니까.
한 문제漢 文帝는 본래 관대하고 인자한 군주였고 또 가의의 계책을 시행하여, 오로지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써서 옥사獄事를 판결한 것이 4백 건이었기에 거의 형벌이 폐기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에 왕망王莽이 나라를 찬탈하였는데 천하 사람들이 한나라를 구가하며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자 광무제光武帝가 이를 통해서 대대로 이어온 왕통王統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존속된 것이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에 버금가서 후세에 미칠 수 있는 나라가 없었으니 가의의 말이 한층 더욱 미덥습니다. 후세의 군주가 경계로 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