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8-9-나(按)
[臣按] 淮南王 劉長의 죽음은 文帝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승상과 어사가 그의 죄를 조목조목 진달하며 법대로 논하기를 청했을 때 다시 列侯와 二千石에게 논의하도록 안건을 내려 보냈으며,
또다시 법대로 논죄하기를 청하자 이에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왕의 작위를 폐하고 蜀郡으로 유배하였으니, 이는 회남왕이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여 스스로 고치기를 바랐던 것뿐입니다. 어찌 그 뜻이 회남왕을 죽이는 데 있었겠습니까.
회남왕이 죽자 문제는 슬퍼하고 애도하여 봉인을 뜯지 않은 관리들을 주살했을 뿐 아니라, 禮로 장사를 치러주고 守墓人煙戶를 두었으며 회남왕의 아들들을 모두 侯에 봉하였습니다.
그 뒤에 베와 곡식의 노래를 듣고 스스로는 비록 천하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회남왕에게 시호를 내려주고 제후의 의절과 같이 園을 조성해주었습니다. 문제는 이에 ‘친족을 친히 하는[親親]’ 의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原注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文帝가 淮南王 劉長을 대한 점에 있어서는 과실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어린 소에 나무를 가로 댄 것이니, 크게 선하고 길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소가 뿔로 아직 들이받을 수 없을 때 제어하면 효과를 보기가 쉽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유장이 列侯 審食其를 제멋대로 죽였을 때
注+劉長은 文帝 3년(기원전 177)에 入朝했을 때, 辟陽侯 審食其를 죽였다. 유장은 이미 사납고 완악하여 제어하기 어려웠습니다.
문제가 이때 관리를 시켜 유장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유장은 長安에 머무르게 한 뒤에, 경학에 능통하고 품행이 훌륭한 名儒를 선발하여 유장을 아침저녁으로 모시면서 보좌하여 先王의 가르침으로 인도하고 漢나라의 밝은 법으로 두렵게 하도록 하여
다행히 그가 뉘우치면 다시 그의 封國으로 돌아가게 하고 뉘우치지 않으면 작은 나라로 옮기거나 열후로 강등시켰다면, 유장은 필시 뉘우치고 새로워져서 스스로 본성을 회복할 것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장을 용서하여 주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어떤 훈계도 내리지 않고 곧바로 그를 자신의 封國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장이 더욱 교만하고 멋대로 굴게 된 것이니, 이는 유장을 악에 빠트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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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賈生의 간언을 따르지 않고 劉長의 여러 아들들을 분수에 넘치게 왕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또다시 잘못한 것입니다. 유장은 죄 없이 죽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文帝가 진실로 유장을 가엾게 여겼다면 그의 아들들을 侯에 봉했다 해도 유장의 제사를 받들 수 있었습니다.
漢나라의 列侯는 그 조세를 받아먹는 것뿐이니, 그 힘이 난을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淮南의 땅을 쪼개어서 그의 세 아들을 모두 왕에 봉하였습니다.
왕이라면 땅은 크고 백성은 많아서 그 권세가 난을 일으킬 수 있으니, 바로 賈誼가 말한 ‘원수로 하여금 漢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토대를 차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훗날의 淮南王과 衡山王의 화를 열어주었으니, 이는 잘못한 와중에 다시 또 거듭 잘못한 것입니다. 舜임금이 아우 象에 대해 사랑과 道義 두 가지를 모두 지극히 한 것에 비한다면 어떠합니까.
신은 이 때문에 후세에 불행히도 친척의 변고에 처한 사람은 오직 大舜(순임금)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