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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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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8-9-나(按)
按 淮南王長之死 非文帝意也 方丞相‧御史 條奏其罪請論如法 復下列侯‧二千石議하고
又請論如法이어늘 於是 始不獲已하여 廢勿王하고 且遷之蜀하니 欲其思過自改而已 豈有意於殺之哉리오
及其旣死 哀矜愍悼하여 旣爲誅不發封之吏하고 又以禮葬之하고 置守하고 尽侯其諸子하고
其後聞布粟之謠 雖自知無媿於天下하나 然猶賜諡‧置園如諸侯儀하니 帝於是 可謂得親親之誼矣니이다
原注
雖然이나 帝於待淮南則不得爲無過 이니 元吉이라하니
言牛之童者 角未能觸而制之則爲力也 方長之擅殺列侯也注+三年入朝, 殺辟陽侯. 固已桀驁難制矣
帝於此時 當使吏治其國而留之長安하여 選名儒通經術‧有行誼者하여 朝夕陪輔하여 道之以先王之訓典而威之以漢家之明刑하여
幸而有悛則復使之國하고 否則或徙之小邦하며 或降之하면 長必悔艾하여 思有以自復이어늘
帝旣赦而弗誅하고 又不聞有所訓敕하고 卽使之歸國하여 於是 益驕且橫이라 長於惡也니이다
原注
其後 不從賈生之諫而王其諸子則又失之 蓋長 非無罪而死者也 帝誠憐之인대 而侯其子 亦足以奉祀矣
이어늘 而乃瓜分淮南之壤하여 悉王其三子하니
이니 正賈誼所謂以危漢之資
卒啓後來하니 是於失之中 又重失焉이니 其視컨대 爲何如邪
故謂後世不幸有處親戚之變者 唯當以大舜爲法이라하노이다


原注
8-9-나(按)
[臣按] 淮南王 劉長의 죽음은 文帝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승상과 어사가 그의 죄를 조목조목 진달하며 법대로 논하기를 청했을 때 다시 列侯와 二千石에게 논의하도록 안건을 내려 보냈으며,
또다시 법대로 논죄하기를 청하자 이에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왕의 작위를 폐하고 蜀郡으로 유배하였으니, 이는 회남왕이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여 스스로 고치기를 바랐던 것뿐입니다. 어찌 그 뜻이 회남왕을 죽이는 데 있었겠습니까.
회남왕이 죽자 문제는 슬퍼하고 애도하여 봉인을 뜯지 않은 관리들을 주살했을 뿐 아니라, 禮로 장사를 치러주고 守墓人煙戶를 두었으며 회남왕의 아들들을 모두 侯에 봉하였습니다.
그 뒤에 베와 곡식의 노래를 듣고 스스로는 비록 천하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회남왕에게 시호를 내려주고 제후의 의절과 같이 園을 조성해주었습니다. 문제는 이에 ‘친족을 친히 하는[親親]’ 의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原注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文帝가 淮南王 劉長을 대한 점에 있어서는 과실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어린 소에 나무를 가로 댄 것이니, 크게 선하고 길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소가 뿔로 아직 들이받을 수 없을 때 제어하면 효과를 보기가 쉽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유장이 列侯 審食其를 제멋대로 죽였을 때注+劉長은 文帝 3년(기원전 177)에 入朝했을 때, 辟陽侯 審食其를 죽였다. 유장은 이미 사납고 완악하여 제어하기 어려웠습니다.
문제가 이때 관리를 시켜 유장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유장은 長安에 머무르게 한 뒤에, 경학에 능통하고 품행이 훌륭한 名儒를 선발하여 유장을 아침저녁으로 모시면서 보좌하여 先王의 가르침으로 인도하고 漢나라의 밝은 법으로 두렵게 하도록 하여
다행히 그가 뉘우치면 다시 그의 封國으로 돌아가게 하고 뉘우치지 않으면 작은 나라로 옮기거나 열후로 강등시켰다면, 유장은 필시 뉘우치고 새로워져서 스스로 본성을 회복할 것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장을 용서하여 주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어떤 훈계도 내리지 않고 곧바로 그를 자신의 封國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장이 더욱 교만하고 멋대로 굴게 된 것이니, 이는 유장을 악에 빠트린 것입니다.
原注
그 뒤에 賈生의 간언을 따르지 않고 劉長의 여러 아들들을 분수에 넘치게 왕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또다시 잘못한 것입니다. 유장은 죄 없이 죽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文帝가 진실로 유장을 가엾게 여겼다면 그의 아들들을 侯에 봉했다 해도 유장의 제사를 받들 수 있었습니다.
漢나라의 列侯는 그 조세를 받아먹는 것뿐이니, 그 힘이 난을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淮南의 땅을 쪼개어서 그의 세 아들을 모두 왕에 봉하였습니다.
왕이라면 땅은 크고 백성은 많아서 그 권세가 난을 일으킬 수 있으니, 바로 賈誼가 말한 ‘원수로 하여금 漢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토대를 차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훗날의 淮南王과 衡山王의 화를 열어주었으니, 이는 잘못한 와중에 다시 또 거듭 잘못한 것입니다. 舜임금이 아우 象에 대해 사랑과 道義 두 가지를 모두 지극히 한 것에 비한다면 어떠합니까.
신은 이 때문에 후세에 불행히도 친척의 변고에 처한 사람은 오직 大舜(순임금)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주
역주1 : 대전본에는 ‘家’로 되어 있다.
역주2 : 대전본‧사고본에는 ‘矣’로 되어 있다.
역주3 易曰……元吉 : 《주역》 〈大畜卦 六四〉의 爻辭이다.
역주4 : 사고본에는 이 뒤에 ‘音谷’이 小注로 들어 있다.
역주5 審食其 : ?~기원전 177. 지금의 江蘇省 徐州인 沛縣 사람으로, 漢 高祖 劉邦과 동향이다. 舍人의 신분으로 유방의 義擧를 도왔으며, 고조 6년(기원전 201)에 辟陽侯에 봉해졌다. 呂后에게 총애를 받아 고조가 죽은 뒤 少帝 恭 원년(기원전 187), 즉 呂后 원년에는 좌승상이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少帝 弘 4년(기원전 180)에 여후가 죽은 뒤 다시 승상이 되었으나, 文帝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었으며, 문제 3년(기원전 177)에 유장이 入朝했을 때 유장을 맞이하러 나갔다가 유장의 철퇴를 맞고 죽었다. 이것은 고조 8년(기원전 199)에 淮南王 劉長의 생모가 趙王 張敖의 역모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을 때 심이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심이기가 구원해주지 않음으로써 유장의 생모가 자살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호는 幽侯이다.
역주6 通侯 : 徹侯로, 작위의 하나이다. 漢 武帝 劉徹의 휘를 피하여 기존에 徹侯라고 했던 것을 通侯 또는 列侯로 바꾸었다. 공이 있는 異姓 대신에게 내려주었다. 新나라 王莽 때 폐지되었다.
역주7 : 사고본에는 ‘諂’으로 되어 있다.
역주8 : 대전본에는 ‘接’으로, 사고본에는 ‘輒’으로 되어 있다.
역주9 漢之……爲亂 : 대전본‧사고본에는 小字로 되어 있다.
역주10 王則……爲亂 : 대전본‧사고본에는 小字로 되어 있다.
역주11 擅仇……之資 : 《前漢書》 卷48 〈賈誼傳〉에 보인다. 賈誼(기원전 200~기원전 168)는 西漢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이다. 文帝 때 20세의 나이로 博士가 되었다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太中大夫로 승진하였다. 뒤에 梁 懷王의 太傅가 되었는데, 양 회왕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자책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전하는 작품으로, 〈過秦論〉‧〈陳政事疏〉 등의 산문과 〈吊屈原賦〉‧〈鵩鳥賦〉 등의 賦가 있다.
역주12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13 淮南衡山之禍 : 漢 武帝 元狩 원년(기원전 122)에 일어난 淮南王 劉安과 衡山王 劉賜의 난을 이른다. 景帝 3년(기원전 154)에 吳楚 七國의 난이 일어났을 때, 吳王은 淮南王 劉安, 衡山王 劉勃, 廬江王 劉賜에게 사자를 보내 호응할 것을 권유하였는데, 회남왕은 이에 호응하기 위해 승상에게 군대를 맡겼으나 승상이 오히려 漢나라 쪽으로 붙는 바람에 뜻대로 하지 못했으며, 여강왕 유사는 이에 응하지는 않았으나 越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형산왕 유발은 마음을 굳건히 하여 배신하지 않았다. 경제 4년(기원전 153)에 오초칠국의 난이 평정되자, 경제는 남방이 습하다고 하여 형산왕 유발을 濟北王에 봉하여 포상하고, 여강왕 유사는 월나라와 사신이 자주 오간다고 하여 옮겨서 형산왕으로 삼고, 회남왕 유안은 그대로 두었다. 元狩 원년에 회남왕 유안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자 모의했으나 유안의 빈객인 伍被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었다. 유안은 자살하였으며 오피 역시 유안의 역모에 참여했다 하여 주살되었다. 유사는, 아들 劉孝가 유안의 난에 참여했던 陳喜라는 자를 숨겨주었다가 진희를 붙잡은 관리에게 탄핵되자 죄를 면하기 위해 자수했는데, 이 일로 공경대신들의 탄핵을 받자 자살하였다. 유효는 棄市刑에 처해졌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죽은 열후‧二千石‧호걸 등이 수만 명이었다고 한다. 《前漢書 卷44 淮南衡山濟北王傳》
역주14 舜之……兩至 : 8-1-가, 8-2-가 참조.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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