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9-10-나(按)
[臣按] 〈蘀兮〉의 풍자에서는 ‘신하가 강성하다[臣强]’라고만 말했을 뿐이고, 이 〈狡童〉 시에 와서는 한 나라의 권력이 전부 채중에게 귀속되어 생살여탈을 채중이 전단하게 되었으니, 그 강성함이 또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천하에는 현인이 없던 적이 없었으므로, 권신이 권력을 휘두르는 때라 하더라도 아부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임금이 그러한 사람에게 나아가 大事를 도모할 수 있다면, 君弱臣强의 형세를 그래도 되돌릴 수 있는 이치가 있습니다.
예컨대, 齊나라의 권력이 田氏에게 있었지만 晏嬰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만약 景公이 안영과 함께 대사를 도모할 수 있었다면, 전씨가 나라를 찬탈하려는 야욕을 달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魯나라의 권력이 季氏에게 있었지만 子家羈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만약 昭公이 자가기와 함께 대사를 도모할 수 있었더라면, 계씨가 임금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성사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 나라의 권력이 다시 임금에게 회수되지 못했던 것은 두 신하의 말이 채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原注
이 시는 아마도 당시 현자가 지은 작품일 것입니다. 현자가 임금에게 知遇를 받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군신 관계를 단절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같이 말도 안하고 같이 밥도 안 먹지만, 지나치게 근심하여 분에 겨운 나머지 밥도 못 먹고 쉬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의 충후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昭公이 이러한 사람과 대사를 능히 도모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이 君弱臣强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공이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祭仲이 임금을 廢立시키는 권력을 훔쳐 초목의 줄기를 버리듯 忽을 내쫒고 바둑알을 바꾸듯 突을 임금으로 세울 수 있었으니,
注+‘突’은 鄭 厲公이다. 점차 그러한 지경에 이른 것이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先儒는 임금을 가리켜 교활한 아이라 부른 것을 두고 禮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신은 이것이 분이 나서 꾸짖는 말이기 때문이니 표현은 불손하지만 그 속마음은 매우 간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읽는 자가 표현을 가지고 내재된 의미를 저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