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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4)

대학연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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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23-2-나(按)
遺命하여 俾友愛之어시늘 以介弟之親‧太母之命而搖於荀‧馮紞之一言 何也
蓋其爲說 曰 百僚內外 皆歸心齊王하니 陛下萬歲後 太子 不得立矣라하니 斯言 一入 武帝友愛之心 於是轉爲猜하니
臣下 雖百喙 其能解乎 又其說 曰 陛下 試詔齊王之國하시면 必擧朝 以爲不可則臣言 驗矣
而詔命 旣出 擧朝 果爭하니 是乃益帝之疑而實二人之說也
原注
讒邪之徒 巧爲鉗鍵하여 以固主意하며 豫設機穽하여 以待人言 大抵如此하니
親賢 莫如齊王攸 忠勳 莫如張華而二人 實傾之하니以貳極하며而偶震 之力也
斃攸安賈注+也.하며讎張하여 心滔楚費注+也.하고 過踰晉注+也. 紞之罪焉이라하니
可謂略盡二人之情實矣 故倂著하노이다


原注
23-2-나()
[신안臣按] 무제武帝제왕 사마유齊王 司馬攸에 대해 일찍이 태후로부터 형제간에 우애하라는 유명遺命을 받았었는데, 아우라는 지친의 관계일 뿐 아니라 자기 어머니의 명을 받고서도 순욱荀勗풍담馮紞의 한마디 말에 흔들렸던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의 말에 “백관이 안팎으로 모두 제왕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으니, 폐하께서 붕어하신 뒤에 태자가 즉위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한번 들어가자 무제의 우애하는 마음이 이에 의심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신하들이 백번 호소하더라도 이 의심을 풀 수 있었겠습니까. 또 그들의 말에 “폐하께서 제왕에게 조서를 내려 봉국封國으로 가라고 해보시면 틀림없이 온 조정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신의 말이 입증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조명詔命이 내려지자 온 조정이 과연 간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무제의 의심을 더하게 한 것이었고 두 사람의 말을 입증한 것이었습니다.
原注
참소하는 간사한 무리가 계략을 꾸미는 것이 뛰어나서 군주의 뜻을 굳히며, 미리 덫을 놓고 함정을 파고서 사람들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나라가 망한 원인을 따져보면, 혜제惠帝가 어리석은 자질로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가황후賈皇后가 악랄한 성품으로 배필이 되었기 때문이지만 순욱荀勗풍담馮紞 두 사람이 실로 이를 주관했으며,
가깝고 어진 사람으로는 제왕 사마유齊王 司馬攸만 한 사람이 없었고 충성스럽고 공훈이 있는 사람으로는 장화張華만 한 이가 없었는데 순욱과 풍담 두 사람이 실로 이들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신史臣이 비판하기를, 어리석은 태자를 끌어들여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만들어주고 나라를 망칠 여자를 추천하여 태자의 배필이 되게 한 것은 순욱의 힘이었으며,
사마유를 죽게 만들고 가충賈充의 지위를 안정시키며注+가충賈充을 이른다. 순욱과 교분을 맺고 장화를 원수로 대적함으로써 그 마음이 나라의 참신 비무극讒臣 費無極을 넘어서고注+나라의 비무극費無極이다. 그 잘못이 나라의 참신 양오讒臣 梁五동관폐오東關嬖五注+양오梁五동관폐오東關嬖五이다. 뛰어넘었던 것은 풍담의 죄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실정을 거의 남김없이 기술하였다고 이를 만하기에 함께 수록합니다.


역주
역주1 武帝……愛之 : 사마유는 사마소가 자신이 앉은 자리를 어루만지며 “이 자리는 도부(사마유)의 자리이다.[此桃符座也]”라고 말할 정도로 사마소에게 매우 사랑을 받았으며, 사마소가 임종 시에는 또 曹丕의 아우 曹植의 일을 언급하며 직접 사마유의 손을 잡아 무제에게 주기도 하였다. 태후 역시 임종 시에 눈물을 흘리며 “도부는 성질이 급한데 너는 형이 되어 자애롭게 대해주지 않으니, 내가 만약 일어나지 못한다면 네가 필시 용납하지 못할까 걱정된다. 이 때문에 너에게 부탁하니 나의 말을 잊지 말라.[桃符性急 而汝爲兄不慈 我若不起 必恐汝不能相容 以是屬汝 勿忘我言]”라고 하여 무제에게 우애를 부탁한 일이 있다. 《資治通鑑 卷80 晉紀2 武帝 上之下 咸寧 2年》
역주2 太后 : 晉 文帝 司馬昭의 비이자 武帝 司馬炎과 齊王 司馬攸의 생모인 王元姬(217~268)를 이른다. 東海 郯縣 사람이다. 魏나라 경학가인 王朗의 손녀이자 王肅의 딸이다. 泰始 원년(265)에 西晉이 건립된 뒤 황태후가 되었다. 시호는 文明皇后이다. 사후에 司馬昭와 함께 崇陽陵에 합장되었다.
역주3 : 대전본에는 ‘勉’으로 되어 있으나, 北宋 神宗 趙頊(조욱)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4 : 대전본에는 ‘忌’로 되어 있다.
역주5 惠帝……主之 : 18-15-가 참조.
역주6 史臣……罪焉 : 《晉書》 권39 〈馮紞列傳〉 말미의 史臣의 평에 보인다.
역주7 朱均 : 堯임금의 아들 丹朱와 舜임금의 아들 商均으로, 不肖한 자식을 비유한다. 여기에서는 어리석은 태자 司馬衷을 가리킨다. 司馬攸는 평소 荀勗과 馮紞을 아첨한다고 미워하였는데, 무제의 아버지 司馬昭가 사마유를 총애하여 帝位를 사마유에게 넘길 뜻을 비치자, 순욱이 풍담을 시켜 武帝에게 “폐하께서는 전일에 위중하여 낫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제왕(사마유)은 공경과 백성들이 귀부하는 사람이니 태자(司馬衷, 훗날의 惠帝)가 비록 제위를 사양하고자 하더라도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제왕을 보내 藩國으로 돌아가게 해서 사직을 안정시켜야 할 것입니다.[陛下前日疾若不愈 齊王爲公卿百姓所歸 太子雖欲高讓 其得免乎 宜遣還藩 以安社稷]”라고 말하게 하였다. 무제는 이 말을 받아들여, 태자와 사마유 중 덕이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하남윤 夏侯和를 면직시키고 사마유의 장인인 賈充의 병권을 빼앗았다. 《資治通鑑 卷80 晉紀2 武帝 上之下 咸寧 2年》
역주8 褒閻 : 褒姒와 閻妻로, 나라를 망하게 만든 아름다운 부인을 이른다. 여기에서는 투기하고 참소했던 晉 惠帝의 황후인 賈皇后를 가리킨다. 포사는 周 幽王이 褒나라를 정벌하자 포나라에서 바친 여자이다. 유왕이 매우 총애하여 왕후인 申后와 태자 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포사의 아들 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또한 포사가 웃게 하기 위해 외적의 침입이 없는데도 거짓으로 봉화를 올리곤 하였는데, 뒤에 申后의 친정아버지인 申侯가 犬戎과 연합하여 주나라를 공격했을 때 아무도 달려오는 제후가 없어 유왕은 피살되고 西周는 망하였다. ‘閻妻’는 아름다운 아내를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시경》 〈小雅 正月〉에 “찬란한 주나라를 포사가 멸망시키리라.[赫赫宗周 褒姒滅之]”, 《시경》 〈小雅 十月之交〉에 “우씨가 사씨가 되었거늘 염처가 화를 일으키며 자리를 차지하고 그대로 있도다.[楀維師氏 豔妻煽方處]”라는 내용이 보인다. ‘閻’과 ‘豔’은 통용한다.
역주9 : 대전본에는 ‘勉’으로 되어 있으나, 北宋 神宗 趙頊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10 賈充 : 23-1-나(按) ‘賈充’ 주석 참조.
역주11 : 대전본에는 ‘勉’으로 되어 있으나, 北宋 神宗 趙頊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12 無極 : 춘추시대 楚나라의 대부인 費無極(?~기원전 515)을 이른다. 費無忌라고도 한다. 楚 平王 2년(기원전 527)에 명을 받고 秦나라에 가서 태자 建의 신붓감을 데리고 돌아와 평왕에게 직접 아내로 맞이하라고 권하고, 뒤에 태자 건을 참소하여 태자가 宋나라로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22-3-가 참조.
역주13 : 사고본에는 ‘五’로 되어 있다. 《欽定四庫全書考證》에 따르면 ‘伍’는 오자이다.
역주14 二五 : 춘추시대 晉 獻公 때의 外嬖인 梁五와 東關嬖五를 이른다. 驪姬를 도와 태자 申生을 참소하여 헌공이 신생을 폐하고 여희의 아들 奚齊를 태자로 세우도록 하였다. 21-7-가1 참조.
역주15 : 대전본‧사고본에는 ‘云’으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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