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西漢의 儒者 중에 오직 董仲舒 한 사람만이 그 학문이 孔子와 孟子의 학문에 순일하였기에 임금에게 아뢸 때에도 반드시 堯임금과 舜임금을 예로 들었습니다.
《孟子》 7편 이후로 이를 언급한 사람이 없었으니, 만일 武帝가 동중서를 좌우의 보필하는 자리에 두었더라면, 필시 二帝와 三王의 도를 날마다 앞에서 개진하여 잘못을 고치고 오류를 바로잡아서 무제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사치와 음행을 자신의 뜻대로 모두 행하는 잘못과 夷狄에게 무력을 소진하는 화가 있었겠습니까.
또 어찌 간사한 신하의 참소에 미혹되며 巫蠱의 옥을 일으켜서 아비와 자식이 단절되고 도성에 유혈이 낭자하는 참변이 초래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동중서의 세 對策 중에서 더욱 절실한 것들을 따와 여기에 수록하여, 무제가 비록 학문에 뜻을 두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는 것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