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明皇(玄宗)이 執政 초기에 학문을 좋아하고 文治를 숭상함에 있어 그 융성함이 대체로 이러하였으니, 훌륭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에 眞儒 한 사람을 얻어서 군주를 輔導하여 보필하는 자들이 화합하게 하는 지위에 두어 날마다 堯임금‧舜임금‧三王의 道와 六經‧孔子‧孟子의 말을 그 앞에서 아뢰게 하였다면, 틀림없이 사물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성의 힘을 극대화하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是非와 邪正의 分辨에 대해 명확하여 미혹되지 않아서, 張九齡처럼 충직한 사람과 李林甫처럼 간사한 사람에 있어 기용하거나 내치는 것이 전도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틀림없이 생각을 성실하게 하여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였을 것이니, 그랬다면 淫聲‧美色‧財貨‧利益의 유혹에 확고부동하여 요사스럽게 교태를 떨던 惠妃‧太眞과 조세 징수에 골몰했던 王鉷‧宇文融이 玄宗에게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수양하여 자신의 집안을 바르게 했을 것이니, 그랬다면 父子‧夫婦 간의 윤리와 朝廷‧宮闈의 정사에 있어 각기 그 도리를 다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참언을 믿고 세 皇子를 폐위하여 죽이는 禍變이 있을 수 있었겠으며, 또 어떻게 安祿山이 宮闈를 더럽히는 추태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原注
張說과 같은 부류는 文筆로 출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褚無量과 馬懷素도 章句之學에 천착하는 유생에 지나지 않았으니, 현종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는 하나 그들이 講明하여 계도한 것은 단지 이와 같을 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文物의 융성함이 비록 開元 연간에 최고조에 달했으나, 현종의 마음은 이미 안일에 젖어 여자와 소인이 안팎에서 서로 선동하여 근본이 날로 좀먹어 갔으니, 화란이 없기를 바라더라도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의 학문은 만약 聖王을 스승으로 삼을 줄 모르고 자신의 마음을 주인으로 삼을 줄 모른다면 학문이 보탬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