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13-11-나(按)
[臣按] 魏‧晉 이래로 임금 가운데 부처를 섬기는 것이 양 무제처럼 융숭했던 이는 있지 않았습니다.
대저 만승천자의 존귀함을 가지고도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서 부처의 종이 되었으니 비굴하게 아첨하는 것의 극치라고 할 수 있으며,
국고를 다 쏟아 붓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서 탑을 건축하였으니 또 높이 받드는 것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승길에 누가 될까 두려워하여 채소와 麵食으로 종묘의 희생을 대체하였으며, 仁恕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무늬를 넣어 짠 비단 관복을 마름질할 때 사람이나 짐승의 형상을 넣는 것도 금지하였으며,
신하가 반역을 도모했는데도 용서하고 주살하지 않았으며, 강도가 횡행하는데도 차마 금하지 못했으니, 이는 모두 불가의 계율을 미루어 확대했기 때문입니다.
原注
일찍이 논해보건대, 만약 신선을 구해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漢 武帝가 그렇게 되었을 것이고, 부처를 구해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양 무제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임금의 집념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신선이나 부처는 구해서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비록 구하여 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夷狄의 허무맹랑한 가르침으로는 華夏를 다스릴 수 없으며 山僧들의 무미건조한 행실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구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한 무제가 신선이 되기를 탐하였으나, 마침내 재물과 民力을 허비한 화만을 초래하였고, 양 무제가 부처에게 아첨하였으나 나라가 망하는 재앙만 초래하였으니, 그렇다면 신선이 되기를 탐하고 부처에게 아첨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없다는 것이 또 분명합니다.
게다가 捨身을 하여 부처를 섬기는 것이 어찌 속세의 소란을 싫어하고 공허와 적멸을 즐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迦維國王의 적통 후사(석가모니)가 왕위를 헌신짝처럼 보고서 버리고 떠났던 것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진심으로 부처를 배우는 자에 가까울 것입니다.
注+‘釋迦’는 迦維國王의 嫡統 후사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불법을 배웠다.
그런데 양 무제가 이미 찬탈과 시역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또 침공과 정벌로 남의 국경을 침범하였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태자 蕭統처럼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아들에 대해서도 한번 의심이 들자 그를 꺼려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탐욕과 미련이 이와 같았으니, 또 어찌 진정으로 捨身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原注
御服을 벗고 佛道에 입문한 것은 이미 부처의 복을 바란 것이요, 금전을 바쳐 贖還한 것은 또 천자의 존귀함을 잃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명목상으로는 비록 부처에게 아첨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부처를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 어리석은 백성의 생명이 어떻게 금수에 비견되겠습니까마는, 실제 사람이나 짐승이 아닌 비단의 무늬조차 차마 자르지 못했음에도 해마다 계속 정벌하여 죽인 사람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浮山에 둑을 쌓아 그 물로 적의 영토를 잠기게 하려고 하여 수십만의 사람들을 모두 어육으로 만들면서도 조금도 가엾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명목상으로는 작은 仁이지만 실제로는 크게 不仁한 것입니다.
原注
게다가 나라가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강과 倫常 때문인데, 무제는 자식들에게 모두 변방의 요충지를 맡기면서도 禮義의 가르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蕭正德이 梟獍과 같은 기질을 가지고서 처음에는 아비를 버리고 적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종국에는 역적을 끌어들여 종사를 전복하였습니다.
注+양 무제는 태자 蕭統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 臨川王 蕭宏의 아들 蕭正德을 키워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소통이 태어나자 소정덕은 본가로 돌려보내져 西豐侯에 봉해졌다. 이에 소정덕은 앙심을 품고 마침내 北魏로 망명하였다. 얼마 뒤에 북위에서 도망쳐 양나라로 돌아와서 원래의 봉작을 회복하였다. 후에 進封되어 臨賀王이 되었다. 侯景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정덕이 앞장서서 내응하는 자로서 후경을 인도하여 犯闕을 하였다. 또 성을 함락하는 날에 兩宮을 살려두지 않기로 후경과 약속하였다. ‘양궁’은 무제와 태자 蕭綱을 말한다.
그리고 蕭綸과 蕭繹의 경우, 소륜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소역은 長江 상류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君父(양 무제)가 환난에 처했을 때 피를 뿌리고 소매를 떨치며 奮戰할 생각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注+邵陵王 蕭綸은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후경을 토벌하면서 힘써 싸우지 않았다. 湘東王 蕭繹은 江陵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제때 구원병을 보내지 않아 후경이 도성을 함락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형제가 서로를 원수로 삼고 숙질간에 교전을 하여 인륜에 있어 패악의 극치를 달렸으니,
注+武陵王 蕭紀와 蕭繹이 서로 공격하여 소역이 소기를 죽였다. 소역은 또 河東王 蕭譽를 湘州에서 공격하고 岳陽王 蕭詧을 襄陽에서 공격하였다. 소찰과 소예는 모두 湘東王 소역의 조카이다. 그 후에 소찰이 北魏의 군대를 끌어들여 江陵에서 소역을 죽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양 무제가 배웠던 것이 釋氏였기 때문입니다.
석씨가 天倫을 假合(일시적인 화합)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하가 자신의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자식이 자신의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3, 40년 동안에 풍속이 땅에 떨어지고 綱常이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초래된 것도 당연합니다.
만약 그가 堯임금‧舜임금‧三代의 聖王을 스승으로 삼고 方外의 가르침을 섞지 않고서 仁義에 근본을 두고 예법을 숭상하며 政刑을 밝힐 것을 기필하였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