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17-3-나(按)
臣은 按 呂不韋가 非直大賈라 蓋大盜也라 方其見子楚曰 奇貨可居라하니
固料己之能使子楚로 得國이요 又能移子楚之國하여 爲己之國矣라
其捐千金也
가 非輕利也
라 謂其利有
乎此也
요 其獻姬也
가 非能割己之欲也
라 謂其所欲
이 有萬乎此也
라
史稱子楚之請姬也에 不韋가 怒라가 旣不獲已與之라하니
夫不韋
가 不出
姬
飮子楚而以娠者飮子楚
하니 固知其見而悅
하고 悅而請
이라
請而與之則異時得國者가 吾之子也니 其獻也가 所欲而非强也며 其怒也가 僞而非情也라
藏
이 深而布置
가 遠
하니 非獨子楚
가 不能察
이라 雖後之作史者
라도 猶莫之察也
라
且孝文之立三日而薨과 莊襄之立三年而薨이 豈其偶然邪아 抑必有其故矣로다
原注
17-3-나(안按)
[신안臣按] 여불위는 그저 큰 장사꾼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큰 도둑일 것입니다. 그가 자초子楚를 보았을 때 “진기한 물건이다. 사둘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자신이 자초가 나라를 얻게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자초의 나라를 옮겨 자신의 나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가 천금을 쓴 것은 이익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이 천금보다 백 배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가 여자를 바친 것은 자신의 욕망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는 것이 여자보다 만 배는 컸기 때문입니다.
사서史書에 이르기를 자초가 여자를 달라고 청했을 때 여불위가 노여워하다가 부득이하게 된 뒤에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저 여불위가 다른 여자를 나오게 하여 자초를 술자리에서 모시게 하지 않고 임신한 여자를 나오게 하여 자초를 술자리에서 모시게 하였으니, 참으로 자초가 그 여자를 보면 기뻐할 것이고 기뻐하면 달라고 청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청해서 주게 되면 훗날 나라를 얻는 자는 자신의 아들일 것이니, 여불위가 바친 것은 바라던 바이지 억지로 바친 것이 아니며, 여불위가 노여워한 것은 거짓이지 진심이 아닙니다.
속셈이 깊고 포석布石이 원대하였으니 자초만 살피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비록 훗날 역사를 쓰는 자도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은 것과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아마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原注
여불위의 기지와 술책으로 자초가 국외에서 들어가 진秦나라 국내에 있던 20여 공자들을 제치고 나라를 얻게 할 수 있었으니, 그가 능히 두 임금의 죽음을 앞당기고 제 자식의 즉위를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아들 정政이 즉위하면 영씨嬴氏의 나라가 바뀌어 여씨呂氏의 소유가 됩니다. 자초子楚가 후사가 되고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되지 않아 여씨가 나라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이를 두고 논평하기를 “진 시황이 즉위하게 되자 백예伯翳의 제사가 끊어져 버렸으니, 역사서에서 후진後秦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秦나라가 효공孝公 때부터 소왕昭王 때에 이르기까지 국세國勢가 날로 더욱 강성하여 일찍이 다섯 나라 백만 대군을 규합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하고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불위가 여자 하나로 느긋하게 담소하면서 그 진秦나라를 잠자리에서 빼앗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여불위가 그저 큰 장사꾼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큰 도둑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原注
그 후에 초楚나라의 재상 황헐黃歇이 또한 이원李園의 누이동생을 먼저 받아들여 임신이 된 후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자 태자로 삼아 마침내 황씨黃氏가 미씨羋氏를 대신하였으니 황알이 나라를 훔친 방법이 여불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끝내 이 때문에 스스로 멸족을 당하였으니 과연 무슨 이익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지금 이 사례를, 정권을 찬탈했던 역신逆臣들을 다룬 편篇에 넣은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간신이 꾀를 쓰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알게 하여, 삼가 여자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지 말도록 하고자 해서입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