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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3)

대학연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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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4-3-나(按)
라하니 蓋王覇之辨 曰德與力而已
力者 國富兵彊之謂 初無心於爲仁而借其名以集事也 德者 躬行心得之謂 其仁 素具於中而推之以及物也
覇者 以力이라 故必大國 乃能爲之 王者 以德이요 不以力이니 何待於大乎리오
以力服人者 有意於服人而人不敢不服이요 以德服人者 無意於服人而人不能不服이니 天理人欲之分而王覇之所以異也
夫孔子 以匹夫不得位 而七十子 終身從之하니 是孰使之然哉 所謂心悅而誠服也 王者之服人 亦猶是也
原注
以春秋攷之컨대之伐衛 若尊王也而心則在於取賂注+, 且請伐衛, 以其立子頹也. 其省難於魯 若卹鄰也而心則在於覘國注+來省難. 仲孫歸, 公曰:“魯可取乎?” 仲孫曰:“不可.” 이요
就其名義之最正者 如救邢‧封衛之擧注+ 首止‧葵丘之盟注+ 이로되 然其心則欲仗義以服諸侯而成己之覇
若此之類 皆所謂假仁者也 其於小國則滅譚注+‧滅遂注+‧降鄣注+ 鄣, 紀附庸也.‧遷陽注+ 陽, 國名. 齊人偪而遷之. 是皆以力服之也
然遂旣滅矣而亡國遺民 猶能殲其師注+
十七年, 齊師殲于遂. 傳言:“遂因氏‧頜氏‧工婁氏‧須遂氏, 醉而殺之.”
하니 不心服 可知矣
原注
至於大國則於楚也 雖仗諸侯之衆하며 執王祭之名하여 能使其受盟於召陵注+年, 公會齊侯‧宋公‧陳侯‧衛侯‧鄭伯‧許男‧曹伯侵蔡. 蔡潰, 遂伐楚, 次于陘..” 對曰:“貢之不入, 寡君之罪也, 敢不共給?”하나
曾未數年 伐吾與國之黃하고 又從而滅之호대 卒不能救也하고 旣又伐吾與國之徐어늘 齊雖救之 終莫止其敗也注+ 하고
其於晉也 未嘗能使之一與會盟하고 蓋嘗取虢與虞矣로되 不聞其以滅으로 問之也注+하고
又嘗殺太子申生矣로되 不聞其以易嫡子 正之也注+하고 葵丘之盟 將來會而還호대 亦不聞其致詰之也注+하니
蓋其力之所至則以服之 力之所不及則無以服之矣
原注
迨其末年 城緣陵而散注+年, 諸侯城緣陵. 傳曰:也. 桓德衰矣.”하며 城鄫而不果注+하고 侵衛又侵鄭注+ 이어늘 而不能遏하고
滅項 雖討其罪而不能終하니 是雖易服者 亦無以服之矣注+
又其甚也 身沒未幾而曹‧衛‧邾之師 已見伐矣注+ , 齊師敗績.
原注
之正컨대 又不逮焉하니 本無義也而假一事示之義하고
本無信也而假一事示之信하고 本無禮也而假一事示之禮注+知義, 未安其居.” 於是乎出, 定襄王, 入務利民, 民懷生矣. 將用之, 子犯曰:“民未知信, 未宣其用.” 民易資者, 不求豐焉, 明徵其辭. 公曰:“可矣乎?” 子犯曰:“民未知禮, 未生其共.” 於是乎大蒐以示之禮.하니 曰示云者 表而揚之하여 以夸衆也
故一朝王之頃而遽請隧焉注+四年, 王子帶作難, 天王蒙塵于外. 하니 名爲勤王而實窺大物也
陽樊 不服則圍之注+之.
葛呼曰:“此誰非王之親, 其俘之也?”
하고 不服이어늘 又圍之하니 名雖受地於王이나 實則以力取也
五覇 莫盛於‧文하나 然皆以力假仁而不本於德이라 故能屈人之力而無以服其心하니
하며 컨대 爲何如哉 故略叙其事하여 以信孟子之說하노이다


原注
14-3-나()
[신안臣按]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예로부터 왕도와 패도를 논한 것은 많았으나 이 만큼 절실하고 분명한 것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도와 패도의 판별은 덕과 힘에서 판가름 날 뿐입니다.
힘은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력이 강한 것을 말하니, 애초에 을 행하는 데 마음은 없고 그 이름만 가탁하여 사업을 이루는 것입니다. 덕은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말하니, 그 인이 본래 마음속에 갖추어져서 이를 미루어 사물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패도를 행하는 것은 힘으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대국이라야 해낼 수 있고, 왕도를 행하는 것은 덕으로 하고 힘으로 하지 않으니 어찌 대국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힘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데에 뜻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덕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데에 뜻이 없으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천리와 인욕의 분기점이며 왕도와 패도가 다른 이유입니다.
공자는 필부匹夫로서 지위를 얻지 못했으나 70제자가 종신토록 따랐으니 이는 무엇이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른바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참으로 복종하는 것이니, 왕도를 행하는 자가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原注
《춘추》를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제 환공이 나라를 정벌했던 것은 왕을 존숭하는 것 같았지만 속마음은 뇌물을 취하는 데에 있었으며,注+노 장공魯 莊公 27년(기원전 667)에 왕(주 혜왕周 惠王)이 소백 료召伯 廖를 사신으로 보내어 제후齊侯(제 환공齊 桓公)에게 후백侯伯으로 삼는 명을 내리고 또 나라를 토벌해달라고 청하였으니, 위나라가 왕자 퇴王子 頹나라 왕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장공 28년(기원전 666)에 제후齊侯가 위나라를 정벌하여 위나라 군대를 전쟁에서 패퇴시키고는 뇌물을 받고 돌아왔다. 그가 나라에서 환난을 살피게 했던 것은 이웃나라를 돌본 것 같았지만 속마음은 노나라를 엿보는 데에 있었습니다.注+노 민공魯 閔公 원년(기원전 661)에 나라 중손추仲孫湫나라로 와서 화난禍難을 살폈다. 중손이 나라로 돌아왔는데 제 환공이 말하기를, “노나라를 취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중손이 말하기를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유先儒는 그가 계략이 뛰어난 를 시켜 노나라의 허실을 엿보게 하고 난을 틈타 노나라를 손에 넣으려는 마음을 둔 것을 기롱하였다.
그리고 명분과 의리가 가장 바른 경우는, 예를 들면 나라를 구원하고 나라를 봉해주었던 일과注+노 민공 원년(기원전 661)에 제인齊人나라를 구원하였다. 노 희공魯 僖公 2년(기원전 658) 초구楚丘에 성을 쌓았다. 수지首止의 맹약‧규구葵丘의 맹약注+노 희공魯 僖公 5년(기원전 655)에 수지首止에서 왕세자王世子회견會見하여 세자의 자리를 안정시켰다. 노 희공 9년(기원전 651) 제후들이 규구葵丘에 모여 맹약하였다. 같은 것이었으나, 그 속마음은 정의正義를 내세워서 제후들을 복종시켜 자신의 패업霸業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종류는 모두 이른바 을 가탁한다는 것입니다. 제 환공이 소국에 대해서는, 나라를 멸하고注+노 장공魯 莊公 10년(기원전 684)의 일이다. 나라를 멸했으며注+노 장공 13년(기원전 681)의 일이다. 나라를 항복시키고注+노 장공 30년(기원전 664)의 일이다. ‘’은 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이다. 나라를 옮겨가게 하였던 것이注+노 민공魯 閔公 2년(기원전 660)의 일이다. ‘’은 나라 이름이다. 제인齊人이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가게 한 것이다. 모두 힘으로 복종시킨 사례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멸망하고 나서 망국의 유민들이 오히려 나라의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으니,注+제인齊人나라를 멸하고 그곳에 진주進駐하였다. 노 장공 17년(기원전 677)에 제나라 군대가 에서 섬멸당하였다.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수인씨遂因氏합씨頜氏공루씨工婁氏수수씨須遂氏가 진주한 제나라 군사들에게 연향을 베풀어 취하게 만들고 나서 그들을 죽였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原注
제 환공이 대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나라에게는 비록 제후들의 군대를 내세우고 왕의 제사라는 명분을 가지고서 소릉召陵에서 맹약을 받게 할 수 있었으나,注+노 희공魯 僖公 4년(기원전 656)에 희공이 제후齊侯(제 환공齊 桓公)‧송공宋公(송 환공宋 桓公)‧진후陳侯(진 선공陳 宣公)‧위후衛侯(위 문공衛 文公)‧정백鄭伯(정 문공鄭 文公)‧허남許男(허 목공許 穆公)‧조백曹伯(조 소공曹 昭公)과 연합하여 나라를 침공하였다. 채나라가 궤멸되자 마침내 나라를 정벌하여 에 주둔하였다. 초나라의 굴완屈完이 제후들의 군중軍中으로 와서 맹약하고 소릉召陵에서 맹약을 맺었다.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초나라를 책망하는 말에 “그대들이 포모包茅를 바치지 않아 왕의 제사를 봉행하지 못하고 축주縮酒를 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는데, 굴완이 대답하기를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저희 임금의 죄이니 감히 바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초나라가 나라의 여국與國나라를 정벌하고 또 따라서 멸망시켰음에도 나라가 끝내 구원하지 못했으며, 초나라가 또 나라의 여국與國나라를 정벌하자, 나라가 비록 구원하기는 하였으나 끝내 서나라의 패배를 막지 못하였습니다.注+노 희공 11년(기원전 649)에 초인楚人나라를 정벌하였다. 희공 12년(기원전 648) 초나라가 황나라를 멸하였다. 희공 15년(기원전 645)에 초인楚人나라를 정벌하였다. 제후들이 서나라를 구원하였는데 초나라 사람들이 서나라를 누림婁林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나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회맹會盟에 참여시킬 수 없었으며, 진나라가 일찍이 나라와 나라를 공취攻取했음에도 동성국同姓國을 멸망시킨 것을 가지고 환공이 따졌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注+노 희공 5년(기원전 655)의 일이다.
또 진나라에서 태자 신생太子 申生을 죽였으나 적자嫡子를 바꾼 것을 가지고 환공이 바로잡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며,注+노 희공 5년의 일이다. 규구葵丘의 맹약에서 진나라 임금이 회합에 오려고 하다가 돌아가버렸으나 또한 환공이 이를 추궁하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注+노 희공 9년(기원전 651)의 일이다.
이것은 그 힘이 미치는 대상이면 복종시킬 수 있었고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상이면 복종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原注
그 말년에 이르러서는 제후들이 연릉緣陵에 성을 쌓다가 해산해버리고注+노 희공魯 僖公 14년(기원전 646)에 제후들이 연릉緣陵에 성을 쌓았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이르기를, “경문經文에서 ‘제후諸侯’라고 한 것은 특정한 대상을 정하지 않은 말이니, 제 환공齊 桓公의 덕이 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라에 성을 쌓았다가 다 쌓지 못하였으며,注+노 희공 16년(기원전 644) 나라에 성을 쌓았는데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이 병들었다. 어떤 사람이 밤에 언덕으로 올라가 “나라에 난이 일어났다.”라고 외치자, 성을 다 쌓지 않은 채 되돌아왔다. 나라를 침략하고 또 나라를 침략하였으나注+노 희공 13년(기원전 647)에 나라가 나라를 침공하였다. 노 희공 14년(기원전 646)에 노나라가 나라를 침공하였다. 저지하지 못하였으며,
나라가 나라를 멸하자 비록 그 죄를 성토하기는 하였으나 마무리를 짓지 못하였으니, 이는 비록 복종시키기 쉬운 대상이었으나 또한 복종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注+노 희공 17년(기원전 643)에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키자 제인齊人이 이를 토벌한 것이라 하여 희공을 억류하였다. 성강聲姜이 희공의 일로 에서 제후齊侯(제 환공)와 만나자 희공이 회합에서 돌아왔다.
이보다 더 심해져서는 제 환공 자신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라‧나라‧나라의 군대에 의해 벌써 제나라가 정벌당하였습니다.注+노 희공 17년(기원전 643) 12월에 제후 소백齊侯 小白(제 환공)이 졸하였다. 노 희공 18년(기원전 642) 정월에 송공宋公(송 양공宋 襄公)‧조백曹伯(조 공공曹 共公)‧위인衛人주인邾人나라를 정벌하였다. 5월에 송나라 군대와 제나라 군대가 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제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原注
진 문공晉 文公의 속임수를 제 환공齊 桓公의 바름과 비교해보면 더욱 미치지 못합니다. 본래 의리가 없었으나 한 가지 일을 가탁하여 의리를 보여주었고,
본래 믿음이 없었으나 한 가지 일을 가탁하여 믿음을 보여주었으며, 본래 가 없었으나 한 가지 일을 가탁하여 예를 보여주었으니,注+진후晉侯(진 문공晉 文公)가 처음에 귀국하고 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그리고 2년 만에 백성들을 전쟁에 쓰려고 하자 자범子犯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의리를 알지 못하여 아직 그들의 터전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진후가 출병하여 주 양왕周 襄王을 안정시키고 귀국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데 힘쓰니 백성들이 삶을 편안하게 여겼다. 진후가 백성들을 전쟁에 쓰려고 하자 자범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믿음을 알지 못하여 시행할 방법을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에 진후는 을 정벌하여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였다. 그러자 백성들 가운데 물자를 교역하는 자들이 많이 벌기를 추구하지 않고 약속한 말을 분명하게 증거로 삼았다. 문공文公이 말하기를 “백성들을 전쟁에 써도 되겠는가?” 하니, 자범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를 알지 못하여 공경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문공이 군사 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예를 보였다. 보여주었다고 한 것은 겉으로 드러내어 드날림으로써 뭇사람들에게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을 한 번 조현하는 사이에 갑자기 수장隧葬을 청하였으니,注+노 희공 14년(기원전 646)에 왕자 대王子 帶가 난을 일으켜 천왕天王(주 양왕周 襄王)이 국외로 몽진하였다. 희공 25년(기원전 635)에 호언狐偃진후晉侯(진 문공)에게 말하기를, “제후의 패자가 되기를 추구하려면 근왕勤王만 한 것이 없습니다.” 마침내 태숙太叔(왕자 대王子 帶)을 죽였다. 진후가 양왕襄王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나서, 수장隧葬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자 양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명목은 근왕勤王이었지만 실제로는 천하를 엿본 것입니다.
양번陽樊이 복종하지 않자 양번을 포위하고注+왕(주 양왕周 襄王)이 진후晉侯(진 문공晉 文公)에게 양번陽樊찬모攢茅의 땅을 주었는데 양번이 복종하지 않자 나라 군대가 양번을 포위하였다. 창갈蒼葛이 소리쳐 말하기를, “이곳 사람 가운데 왕의 인척이 아닌 자가 누구이기에 우리를 포로로 잡는가?”라고 하였다. 이 복종하지 않자 또 원을 포위하였으니, 명목은 비록 왕에게 땅을 받은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힘으로 취한 것입니다.
오패五霸 가운데 제 환공과 진 문공보다 강성한 이가 없었으나, 그들은 모두 힘으로 을 가탁하고 덕에 근본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힘을 굴복시킬 수는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옛날 성탕成湯(탕왕湯王)이 일어났을 때에 동쪽으로 정벌하면 서쪽이 원망하였으며, 문왕文王이 일어났을 때에 대국은 그 힘을 두려워하고 소국은 그 덕을 그리워하였던 것에 비하면 어떠합니까. 신이 이 때문에 그 일을 대략 서술하여 맹자의 설을 입증한 것입니다.


역주
역주1 先儒……明也 : 先儒는 北宋 때의 鄒浩(1060~1111)를 가리키며, 인용된 말은 朱熹의 《孟子集註》 〈公孫丑 上〉 제3장에 보인다.
역주2 : 대전본에는 ‘威’로 되어 있으나, 宋 欽宗 趙桓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3 莊二……頹也 : 제 환공 19년(기원전 667) 겨울의 일로 《春秋左氏傳》에 보인다.
역주4 使 : 대전본에는 ‘吏’로 되어 있다.
역주5 召伯廖 : 周나라 왕의 卿士로, 召公의 후예이다. 《春秋左氏傳注疏 莊公 27年 孔穎達疏》
역주6 賜齊侯命 : 齊侯에게 侯伯의 命을 내렸다는 것은 齊 桓公에게 명을 내려 侯伯으로 삼았다는 말이다. 후백은 九州의 長으로서 제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春秋左氏傳注疏 莊公 27年 杜預注‧孔穎達疏》 《尙書注疏 周官 孔穎達疏》
역주7 二十……而還 : 제 환공 20년(기원전 666) 봄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이때 제 환공이 주나라 왕의 명으로 위나라를 꾸짖으러 갔는데 뇌물을 받고 돌아왔다. 林堯叟에 따르면 제 환공이 뇌물을 받고 돌아온 것은 衛나라의 죄를 바로잡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莊公 28年》 《左傳杜林合注 卷7》
역주8 閔元……不可 : 제 환공 25년(기원전 661) 겨울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1년 전 노나라에서는 莊公이 죽고 그의 아들 子般이 즉위했는데 慶父(보)가 자반을 시해하고 閔公을 옹립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이듬해 齊나라의 중손추는 노나라를 살피고 귀국하여 제 환공에게 노나라는 周나라의 禮를 지켜 나라를 존립시키고 있으므로 노나라의 화란을 안정시키고 노나라를 가까이해야 하며 그래야 霸王의 그릇이라고 간하였다.
역주9 : 대전본에는 ‘秋’로 되어 있다. 통행본 《春秋左氏傳》에는 ‘湫’로 되어 있다.
역주10 先儒……之心 : 先儒는 北宋 때의 胡安國을 말하며, 기롱한 내용은 《春秋胡氏傳》 卷7에 보인다.
역주11 閔元年齊人救邢 : 제 환공 25년(기원전 661)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이때 狄人이 邢나라를 침략하자 管仲이 제 환공에게 형나라를 구원하자고 설득하여 제나라가 형나라를 구원하였다.
역주12 僖二年城楚丘 : 제 환공 28년(기원전 658) 봄 정월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楚丘는 衛나라의 邑으로 이때 제후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衛나라를 봉해주었다. 2년 전인 기원전 660년 겨울 12월에 狄人이 위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위나라를 봉해준 것이다. 《춘추공양전》에 따르면 제 환공이 성을 쌓도록 한 것인데 그가 제후로서 힘이 있으면서도 위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諱하였기 때문에 《춘추》 經文에 제나라가 쌓아주었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春秋公羊傳 僖公 2年》
역주13 僖五……之位 : 제 환공 31년(기원전 655) 여름의 일로 《춘추》에 보이나 원문은 조금 다르다. 王世子는 周 惠王의 태자인 鄭을 말하며, 首止는 衛나라 땅이다. 《춘추》에는 魯 僖公이 齊侯‧宋公‧陳侯‧衛侯‧鄭伯‧許男‧曹伯과 함께 태자 정을 會見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杜預에 따르면 당시 혜왕이 惠后 때문에 태자 정을 폐하고 王子 帶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에 제 환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태자 정을 회견하여 그 지위를 안정시킨 것이었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5年 杜預注》
역주14 九年……葵丘 : 제 환공 35년(기원전 651) 9월 戊辰日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이에 앞서 이해 여름에도 제후들이 규구에서 회합을 가지고 우호를 다졌는데,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제 환공이 9월에 제후들과 맹약을 맺으면서 우호를 회복하자고 천명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9年》
역주15 莊十年 : 제 환공 2년(기원전 684) 겨울 10월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제 환공이 즉위하기 전에 도망 생활을 하던 중 譚나라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담나라가 예우하지 않았으며, 기원전 685년 즉위한 후에도 담나라가 와서 축하해주지 않았다. 이에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담나라를 멸망시키자, 담나라 임금은 동맹국인 莒(거)나라로 달아났다. 《春秋左氏傳 莊公 10年》
역주16 十三年 : 제 환공 5년(기원전 681) 여름 6월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遂나라는 舜임금의 후예인데, 제나라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그곳에 進駐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13年》 《左傳杜林合注 卷6》
역주17 三十年 : 제 환공 22년(기원전 664) 가을 7월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두예에 따르면 鄣나라가 소국이라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나라가 군대로 위협하여 항복하도록 한 것이다. 《春秋左氏傳注疏 莊公 30年 杜預注》
역주18 閔二年 : 제 환공 26년(기원전 660) 봄 정월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두예에 따르면 제나라 사람이 핍박하여 옮겨가게 한 것이다. 《春秋左氏傳注疏 閔公 2年 杜預注》
역주19 齊人……殺之 : 제 환공 9년(기원전 677) 여름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4년 전에 제나라 군대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진주시켰는데, 이때 와서 수나라의 강성한 종족이었던 遂因氏‧頜氏‧工婁氏‧須遂氏가 제나라 군대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여 취하게 한 뒤에 그들을 공격하여 몰살한 것이다. 《春秋左氏傳注疏 莊公 17年 杜預注》
역주20 齊人滅遂而戍之 : 원주⑥ ‘十三年’ 주석 참조.
역주21 : 대전본에는 ‘享’으로 되어 있다.
역주22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23 : 사고본에는 이 앞에 ‘戍’가 있다.
역주24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25 僖四……于陘 : 제 환공 30년(기원전 656) 봄 정월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蔡나라가 한 번 中國의 회맹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뒤에 姬姓의 제후국들을 버리고 楚나라의 편이 되었다. 이에 제 환공이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기에 앞서 채나라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초나라로 쳐들어가서 관중이 초나라 사자에게 죄를 물었으나 사자가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諸侯軍이 진격하였다. 그러면서도 제 환공은 초나라가 강성한 점을 고려하여 급하게 진격하지 않고 초나라 땅인 陘에 주둔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4年 杜預注》 《左傳杜林合注 卷9》
역주26 : 대전본에는 ‘回’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27 楚屈……召陵 : 제 환공 30년(기원전 656) 여름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屈完은 초나라의 대부로, 楚 成王이 그를 諸侯軍의 진영으로 보내자 제후의 군대가 陘에서 후퇴하여 召陵에 주둔하였다. 이때 제 환공이 제후의 군대를 포진시키고 굴완과 수레에 동승하여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그에게 우호를 맺자고 제안하니 굴완이 마침내 제후들과 맹약을 맺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4年》
역주28 傳稱……共給 : 제 환공 30년(기원전 656) 봄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제 환공이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궤멸시킨 뒤 楚나라로 쳐들어오자, 楚 成王은 諸侯軍의 진영으로 사자를 보내 제후들이 초나라로 쳐들어온 이유를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자 管仲이 천자의 제사에서 縮酒를 할 때 쓰는 包茅를 초나라가 바치지 않는 것과 周 昭王이 남방을 巡狩했을 때 살아 돌아오지 못한 까닭을 추궁하였다. 이에 사자는 공물을 바치겠으나 소왕이 돌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물가에 물어보라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래 소왕이 巡狩를 하던 도중 漢水를 건너다가 배가 부서져 익사했음에도 周나라 사람들은 이 사실을 숨긴 채 부고를 하지 않아 제후들이 그 까닭을 몰랐다. 소왕이 익사했을 당시에는 한수가 초나라의 강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자가 죄를 승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4年 杜預注》
역주29 縮酒 : 띠풀을 다발로 묶고 그 위에 술을 부어 거르는 것을 말한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4年 杜預注》
역주30 十一年楚人伐黃 : 楚 成王 23년(제 환공 37, 기원전 649) 겨울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황나라가 齊나라를 믿고서 초나라에 공물을 바치지 않자 초나라가 황나라를 침공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11年 杜預注》
역주31 十二年楚滅黃 : 楚 成王 24년(제 환공 38, 기원전 648) 여름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林堯叟는 《춘추》의 이 經文이 제 환공을 비난한 것이며, 황나라는 제나라와의 회맹을 따랐다가 나라만 망치게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左傳杜林合注 卷10》
역주32 十五……婁林 : 楚 成王 27년(제 환공 41, 기원전 645)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徐나라가 諸夏에게 붙자 이해 봄에 초나라가 서나라를 침공하였다. 3월에 魯 僖公‧齊 桓公‧宋 襄公‧陳 穆公‧衛 文公‧鄭 文公‧許 僖公‧曹 共公이 회합하여 牡丘에서 맹약한 뒤 노나라의 公孫敖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나라를 구원하였다. 그럼에도 이해 겨울에 초나라는 서나라 땅인 婁林에서 서나라 군대를 패퇴시켰다. 《春秋左氏傳 僖公 15年》
역주33 同姓 : 晉나라‧虢나라‧虞나라는 모두 姬姓이다. 진나라는 周 武王의 동생 唐叔 虞의 후예이고 괵나라는 周 文王의 동생 虢仲의 후예이며 우나라는 周나라 太王의 아들 虞仲(仲雍)의 후예이다. 《春秋釋例 卷9》
역주34 僖五年 : 이보다 앞서 3년 전인 노 희공 2년(晉 獻公 19, 기원전 658) 진 헌공은 荀息의 간언에 따라 그를 虞나라 임금에게 사신으로 보내 뇌물을 주고 길을 빌려 虢나라를 치게 하였다. 우나라 임금은 뇌물에 눈이 멀어 宮之奇의 간언도 듣지 않고 오히려 먼저 군대를 일으켜 괵나라를 치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여름에 진나라의 李克과 순식이 우나라의 군대와 연합하여 괵나라의 읍인 下陽을 멸하였다. 그 후 희공 5년(晉 獻公 22, 기원전 655) 가을에 이르러 진 헌공이 다시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는데, 우나라 임금이 이번에도 궁지기의 간언을 무시하고 그 요청을 허락하였다. 이해 8월에 진나라 군대가 괵나라의 도성인 上陽을 포위하여 12월에 괵나라를 멸하였으며, 회군할 때 우나라에서 머물다가 우나라를 기습으로 멸망시키고 우나라 임금을 사로잡았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2年‧5年 杜預注》
역주35 五年 : 원래 申生이 죽은 것은 노 희공 4년(晉 獻公 21, 기원전 656) 12월의 일이다. 그러나 晉나라가 사자를 보내어 부고를 한 것이 이듬해 봄이었기 때문에 희공 5년(기원전 655)의 일이라고 하였다. 晉 獻公은 驪姬를 총애하여 夫人으로 삼았는데, 신생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여희의 참소를 믿고 말았다. 이에 신생은 新城으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4年‧5年》
역주36 僖九年 : 제 환공 35년(晉 獻公 26, 기원전 651)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이해 여름 노 희공‧宰周公(宰孔)‧제 환공‧宋 襄公‧衛 文公‧鄭 文公‧許 僖公‧曹 共公이 葵丘에서 회합을 갖고 9월 戊辰日에 제후들이 이곳에서 맹약을 맺었다. 재주공은 맹약에 참여하지 않고 그 전에 돌아가다가 도중에 晉 獻公을 만나 진나라에 앞으로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회합에 가지 말고 난리를 평정하는 데 힘쓰라고 권하였다. 이에 헌공은 회합에 가지 않고 되돌아갔다. 宰周公은 주나라 왕실의 太宰로, 宰는 官名이며 周는 食邑 이름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9年》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9年 杜預注》 《楊伯峻, 春秋左傳注(修訂本), 北京:中華書局, 1990, 324쪽》
역주37 : 대전본에는 없다.
역주38 僖十……緣陵 : 제 환공 40년(기원전 646) 봄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緣陵은 杞나라의 읍인데, 두예에 따르면 당시 기나라는 淮夷를 피해 연릉으로 옮겨가 있었다. 《춘추공양전》에서는 徐나라와 莒나라의 위협에 시달리는 기나라를 위하여 제 환공이 성을 쌓아준 것으로 설명하였다. 《춘추곡량전》에 따르면 이때 제후들이 제각기 성을 쌓고자 하였으므로 제 환공의 덕이 쇠한 것이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14年 杜預注》 《春秋公羊傳 僖公 14年》 《春秋穀梁傳 僖公 14年》
역주39 : 대전본‧사고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춘추좌씨전》에는 ‘四’로 되어 있다.
역주40 散辭……衰矣 : 《春秋穀梁傳》 僖公 14년(기원전 646) 기사에 보인다. 세력의 大小에 따라 참여한 제후들을 열거하면서 성을 쌓았다고 기술하지 않고 범범하게 제후들이 성을 쌓았다고 기술한 것은, 제후들이 제각기 성을 쌓고자 하여 이를 총괄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특정한 대상을 정하지 않았다는 말[散辭]’이라고 하였다. 《春秋穀梁傳注疏 僖公 14年 范寧注》
역주41 : 사고본에는 ‘亂’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42 僖十……而還 : 제 환공 42년(기원전 644) 12월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이달에 제 환공이 노 희공‧宋 襄公‧陳 穆公‧衛 文公‧鄭 文公‧許 僖公‧邢侯‧曹 共公과 淮에서 회합을 갖고 이들과 함께 淮夷에 시달리는 鄫나라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 《春秋左氏傳 僖公 16年》
역주43 僖十三年侵衛 : 제 환공 39년(기원전 647) 봄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이보다 1년 전에 제후들이 狄人들의 난리를 두려워하여 衛나라 수도인 楚丘에 외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적인들이 위나라를 침공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13年》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12年 杜預注》
역주44 十四年侵鄭 : 제 환공 40년(기원전 646) 가을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宋나라 때 張洽의 《春秋集注》에서는 이 기사에 대하여 “狄人들이 畿內의 제후를 침범하였으나 제 환공은 이를 다스리지 못했다. 적인들이 衛나라를 침입하고 邢나라를 침벌하며 溫나라를 멸하고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패업은 약해지고 주나라 왕실은 그 위상이 낮아졌으며 여러 나라가 화를 입었으니, ‘狄侵鄭’이라는 기사는 제 환공의 태만함을 드러낸 것이다.[狄數犯畿內之諸侯而齊桓不能治 自入衛伐邢滅溫而至此 霸圖弱而王室卑 諸國受禍 著齊桓之怠也]”라고 하였다. 《春秋集注 卷4》
역주45 僖十……自會 : 제 환공 43년(기원전 643)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魯 僖公은 한 해 전에 제후들과 淮에서 회합하여 제후들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귀국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여름에 노나라 군대가 項나라를 격멸하자 齊나라 사람들은 이를 희공이 명령한 일로 여겨 희공을 억류하였다. 그 후 가을에 제나라의 공주이자 희공의 부인인 聲姜은 희공이 억류된 일 때문에 노나라의 읍인 卞에서 제 환공과 만났다. 그 후 희공은 풀려나 9월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17年 杜預注》
역주46 僖十……白卒 : 제 환공 43년(기원전 643)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원래 제 환공은 이해 10월 을해일에 죽었다. 그런데 그 후 제 환공의 寵臣인 易牙와 寺人 貂(초)가 난을 일으켜 관리들을 살육하고 公子 無虧(武孟)를 임금으로 세우자 당시 태자였던 齊 孝公은 宋나라로 망명하였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하였으므로 제후들에게는 12월 을해일이 되어서야 부고를 하였다. 그러므로 《춘추》 經文에서는 제 환공이 12월에 졸하였다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17年》
역주47 十八……伐齊 : 宋 襄公 18년(기원전 642)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당시 송나라로 망명 온 齊 孝公을 다시 제나라로 들여보내기 위하여 송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18年 杜預注》
역주48 五月……敗績 : 송 양공 18년(기원전 642)의 일로 《춘추》에 보인다. 이에 앞서 여름에 노나라는 제나라를 구원하였는데, 易牙 등에 의해 옹립되었던 제나라의 無虧가 죽자 송나라 편에 섰던 曹나라‧衛나라‧邾나라의 군대는 먼저 떠나고 노나라도 제나라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결국 송나라와 제나라는 각기 단독으로 제나라 땅인 甗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제나라가 대패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18年 杜預注》
역주49 : 대전본에는 ‘膚’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50 若晉……之正 : 《논어》 〈憲問〉 제16장에 “晉 文公은 속이고 바르지 않았으며 齊 桓公은 바르고 속이지 않았다.[晉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주희는 《論語集註》에서 “진 문공과 제 환공은 모두 제후의 맹주로서 夷狄을 물리치고 周나라 왕실을 높인 사람들이다. 비록 힘으로 仁을 가탁하여 마음이 모두 바르지 못하였으나, 환공은 楚나라를 정벌할 때에 大義를 내세워 주장을 제기하였고 속임수는 쓰지 않았으니, 그래도 환공이 문공보다 낫다.[二公皆諸侯盟主 攘夷狄以尊周室者也 雖其以力假仁 心皆不正 然桓公伐楚 仗義執言 不由詭道 猶爲彼善於此]”라고 하였다. 즉 제 환공이 바르다고 한 것은 진 문공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바르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역주51 : 대전본에는 ‘威’로 되어 있으나, 宋 欽宗 趙桓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52 晉侯……之禮 : 《춘추좌씨전》 僖公 27년(晉 文公3, 기원전 633) 기사에 보인다. 진 문공은 이보다 3년 전인 기원전 636년(노 희공 24)에 귀국하여 이듬해(기원전 635)에 周 襄王의 지위를 안정시킴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보였으며 같은 해에 原을 정벌하였다. 2년 후에는 子犯의 간언을 듣고 백성들에게 禮를 보이는 차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관작의 등급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명을 듣고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듬해(기원전 632) 진 문공은 穀에 주둔한 楚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으며, 초나라가 宋나라를 포위하자 이를 풀어주고 城濮에서 초나라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27年 杜預注》 《春秋左氏傳 僖公 28年》
역주53 : 대전본에는 ‘宋’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다.
역주54 於是……之信 : 진 문공이 原을 정벌한 것은 《춘추좌씨전》 僖公 25년(晉 文公1, 기원전 635) 겨울 기사에 보이지만, 백성이 믿음을 몰라 전쟁에 사용할 수 없다는 子犯의 간언이 수록된 기사는 희공 27년(진 문공 3, 기원전 633) 기사에 보인다. 기원전 635년 4월에 周 襄王을 王城으로 들여보내고 陽樊‧攢茅 등의 땅과 함께 原 땅을 받았던 진 문공은 그해 겨울에 原을 포위하였다. 이때 문공은 사흘 치 식량만 가지고 가도록 하였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原人이 항복을 하지 않자 철군을 명하였다. 이때 原에 잠입시킨 첩자가 原人이 항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보고했음에도 문공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1舍(30里)를 물러났는데 原人이 항복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25年‧27年》
역주55 僖十……于外 : ‘王子帶作難 天王蒙塵于外’라는 문장은 《춘추》의 經文과 三傳에 보이지 않으나 관련된 일은 《춘추좌씨전》과 《사기》에 보인다. 그리고 이 두 문헌에 따르면 王子 帶가 난을 일으켜 周 襄王이 몽진한 것은 노 희공 14년(기원전 646)의 일이 아니라 24년(기원전 636)의 일로 보인다. 王子 帶는 《사기》에 ‘叔帶’로 되어 있는데, 周 惠王의 아들로 惠后의 소생이며 襄王의 동생이다. 杜預에 따르면 帶는 양왕의 同母弟라고 하였으나, 《사기》에 따르면 이복동생이다. 혜후는 帶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하여 狄人(翟人)과 내통하여 그들이 周나라로 쳐들어오게 만들었다. 마침내 양왕은 출국하여 鄭나라로 망명하고 帶가 왕위에 올랐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24年 杜預注》 《史記 卷4 周本紀》
역주56 : 《춘추좌씨전》과 《사기》에 근거할 때 ‘二十’이 되어야 할 듯하다.
역주57 二十……勤王 : 진 문공 1년(기원전 635) 봄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周 襄王의 계모인 惠后는 자신의 소생 叔帶(王子 帶)를 옹립하기 위하여 狄人(翟人)을 끌어들여 周나라로 쳐들어오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국외로 망명 중이던 周 襄王은 양왕 17년(기원전 636)에 鄭나라로 가 거처하면서 晉나라에는 簡師父를, 秦나라에는 左鄢父를 보내 위급을 알렸다. 이듬해(기원전 635)에 秦 穆公은 黃河 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양왕을 호송하여 주나라 王城으로 들여보내려고 하였는데, 晉나라의 狐偃이 晉 文公에게 패업을 위하여 양왕을 들여보내는 일[勤王]에 힘쓰라고 간하였다. 간언을 들은 문공은 卜偃에게 거북점과 시초점을 치게 하였는데 결과가 모두 길하게 나왔다. 이에 양왕을 들여보내는 공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문공은 秦나라 군대에 작별을 고하고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 3월에 陽樊에 주둔하여 右軍은 溫을 포위하고 左軍은 양왕을 맞이하여 주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4월에는 양왕이 王城으로 들어가 숙대를 溫에서 잡아 隰城에서 죽였다. 《사기》에는 진 문공이 숙대를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 24年‧25年》 《春秋經傳集解 僖公 25年 朱申注》 《史記 卷4 周本紀》
역주58 遂殺……弗許 : 진 문공 1년(기원전 635) 여름 4월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이달 襄王이 王城으로 들어가서 丁巳日에 太叔(王子 帶)을 溫에서 잡아 隰城에서 죽였다. 그리고 戊午日에 진 문공이 양왕을 朝見하자 양왕이 단술로 진 문공을 접대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문공이 隧葬을 청하였다. 수장은 장사를 지낼 때 관곽을 묻을 壙을 만들면서 땅에 굴을 파 통로를 만드는 것인데 이는 천자의 장례 방식이었다. 즉 문공은 자신이 죽으면 葬事를 천자의 방식으로 하기를 청한 것이다. 양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 대신 陽樊‧溫‧原‧攢茅의 땅을 주었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25年 杜預注》 《左傳杜林合注 卷12》
역주59 王與……之也 : 진 문공 1년(기원전 635) 여름 4월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周 襄王에게 隨葬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진 문공이 陽樊‧溫‧原‧攢茅의 땅을 받았으나 陽樊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았다. 결국 晉나라 군대가 양번을 포위한 뒤에 문공은 그곳의 백성들을 내쫓았다. 《春秋左氏傳 僖公 25年》
역주60 : 대전본에는 ‘困’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春秋左氏傳》에는 ‘圍’로 되어 있다.
역주61 蒼葛 : 陽樊 사람이다. 《春秋左氏傳注疏 僖公 25年 杜預注》
역주62 : 사고본에는 ‘倉’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春秋左氏傳》에는 ‘蒼’으로 되어 있다.
역주63 : 사고본에는 ‘婣’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 《春秋左氏傳》에는 ‘姻’으로 되어 있다.
역주64 : 대전본에는 ‘威’로 되어 있으나, 宋 欽宗 趙桓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65 視昔……西怨 : 《맹자》 〈梁惠王 下〉 제11장에 “湯王이 첫 번째 정벌을 葛나라로부터 시작하자 천하 사람들이 탕왕을 믿었다. 그리하여 탕왕이 동쪽을 향하여 정벌함에 西夷가 원망하며 남쪽을 향하여 정벌함에 北狄이 원망하여, ‘어찌 우리를 나중에 정벌하는가?’라고 하였다.[湯一征自葛始 天下信之 東面而征 西夷怨 南面而征 北狄怨曰 奚爲後我]”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66 文王……小懷 : 《춘추좌씨전》 襄公 31년(기원전 542) 기사에 따르면 “《서경》 〈周書〉에 문왕의 덕을 칭송하기를, ‘대국은 그 힘을 두려워하였고 소국은 그 덕을 그리워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문왕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는 것을 말한다.[周書數文王之德曰 大國畏其力 小國懷其德 言畏而愛之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대학연의(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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