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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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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郊祀志注+威王‧宣王.으로 使人入海하여 求蓬萊‧方丈‧瀛洲하니
此三神山者 其傳 在渤海中하니人及不死之藥 皆在焉이라하더니
始皇 如恐不及하여 使人齎童男女하여 入海求之하니
船交海中하여 皆以風爲解曰 未能至 望見之焉이라하더라
하고 後三年 하고 後五年 始皇 하여 하고
竝海上하여 幾遇海中三神山之奇藥이라가 不得하여 還到하다


13-5-가1
《前漢書》 〈郊祀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전국시대 齊 威王‧齊 宣王注+‘威宣’은 齊 威王과 齊 宣王이다.‧燕 昭王 때부터 사람을 시켜 바다에 가서 蓬萊山‧方丈山‧瀛洲山을 찾도록 하였다.
이 三神山은 전설에 따르면 渤海 가운데에 있는데, 여러 신선과 불사약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한다. 秦 始皇이 바닷가에 이르자 方士들이 앞을 다투어 이 일을 말하였다.
시황이 생전에 못 찾을까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童男童女를 데리고 바다에 가서 이를 찾도록 하였다.
삼신산을 찾는 배들이 바다를 오갔는데, 모두들 비와 바람을 구실로 삼아 말하기를 ‘비바람 때문에 삼신산에 이르지는 못하고 멀리서 보기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시황이 다시 바다로 갔으며, 3년 뒤에는 碣石山에 가서 바다로 보낸 方士의 虛實을 살폈다. 5년 뒤에는 시황이 남쪽으로 湘山에 이르렀고, 마침내 會稽山에 올라갔다.
바닷가를 따라 올라가서 바다에 있는 삼신산의 기이한 약을 만나기를 기대했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오다가 沙丘에 이르러 붕어하였다.”


역주
역주1 13-5-가1 : 《前漢書》 卷25上 〈郊祀志〉에 보인다. 저본에 인용된 내용은 〈郊祀志〉를 축약한 것이다.
역주2 齊威宣 : 전국시대 齊 威王(재위 기원전 356~기원전 320)과 宣王(재위 기원전 319~기원전 301)을 이른다. 위왕의 성명은 田因齊 또는 田嬰齊이다. 鄒忌를 相으로, 田忌를 장수로, 孫臏을 軍師로 등용하였다. 아버지 桓公을 이어 수도 臨淄의 稷下에 학관을 설치하고 각국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정치를 의론하게 하고 인재를 선발하여 국력이 날로 부강해졌다. 16년(기원전 341)에 魏나라를 桂陵에서 대패시켰는데, 이 전쟁에서 위나라의 태자 申을 포로로 잡고 장수 龐涓을 죽였다. 23년(기원전 334)에 徐州에서 魏 惠王과 회합하여 서로 王으로 불러주기로 하였다. 선왕의 성명은 田辟疆으로, 위왕의 아들이다. 기원전 314년에 燕나라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군대를 보내 50일 만에 연나라의 도성을 점령하여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다. 위왕을 이어 직하 학관을 더욱 활성화시켜 淳于髡‧田騈‧荀子‧孟子 등을 기용하였다. 위왕과 선왕이 鄒衍의 大九洲學說에 근거하여 사람을 바다로 보내 三神山을 찾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서》 외에 《史記》 〈封禪書〉에도 보이는데, 더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 史料에 보이지 않는다.
역주3 燕昭王 : 기원전 335~기원전 279(재위 기원전 312~기원전 279). 성명은 姬職으로, 昭王 또는 襄王이라고도 한다. 燕王 噲(쾌)의 아들이다. 재상 子之가 권력을 전횡할 때 韓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부왕 쾌가 피살되자 趙 武靈王의 호송을 받아서 연나라로 돌아와 즉위하였다. 인재를 초빙하여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자 힘썼으며 樂毅를 장수로 삼아 齊나라를 쳐서 70여 城을 빼앗기도 하였다. 소왕이 신선술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太平廣記》에 《仙傳拾遺》를 인용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소왕이 仙人 甘需의 말을 믿고서 오랫동안 嗜慾을 거두고 聲色을 멀리하며 無思無爲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西王母가 연나라 궁궐에 세 번 내려와 소왕과 함께 노닐었으며, 소왕은 재위 33년 만에 병 없이 죽었는데 形骨이 부드럽고 향기가 뜰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太平廣記 卷2 神仙2 燕昭王》
역주4 : 대전본에는 ‘仙’으로 되어 있다.
역주5 秦始……之焉 : 시황 28년(기원전 219)의 일이다. 시황은 齊人 徐市(불) 등에게 童男童女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에 가서 신선을 찾도록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역주6 : 사고본에는 없다.
역주7 其明……海上 : 시황 29년(기원전 218)의 일이다. 시황은 이해에 지금의 山東省 煙臺市에 있는 之罘(부)山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琅邪에 갔다가 上黨을 들러 서울로 돌아왔다. 之罘山에 올라 노닐기 전, 시황 일행이 지금의 河南省 陽武縣 博狼沙에 이르렀을 때, 시황은 張良과 그가 고용한 力士의 습격을 받고 천하에 수색령을 내려 10일을 뒤졌으나 자객을 찾지 못한 일이 있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역주8 游碣……方士 : 시황 32년(기원전 215)의 일이다. 시황은 이때 燕人 盧生을 보내 신선 羡門과 高誓를 찾도록 하였는데, 노생은 바다에서 돌아와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胡이다.[亡秦者胡也]”라는 글이 적힌 도참서를 가져왔다. 이에 장군 蒙恬에게 군대를 끌고 가 북방 이민족[胡]을 치게 하였다. 진나라는 秦 二世 胡亥로 인해 멸망하였다. 碣石山은 지금의 河北省 昌黎縣 북쪽에 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역주9 南至湘山 : 張守節에 따르면, 湘山은 곧 青草山으로, 청초산이 湘水 부근에 있어 이렇게 부른 것이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張守節正義》
역주10 遂登會稽 : 시황 37년(기원전 210)의 일이다. 시황은 이때 회계산에 올라 禹王에게 제사하고 頌德碑를 세웠다. 회계산은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 남쪽에 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역주11 沙丘崩 : 시황 37년(기원전 210) 7월의 일이다. ‘沙丘’는 지금의 河北省 鉅鹿縣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시황은 沙丘宮 平臺에서 50세로 붕어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裴駰集解》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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