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受禪
에 命
定樂
하여 非正聲者
를 悉放遣之
하시다
가 以
이 將來朝
注+啓民可汗, 之君也.라 欲以富樂
으로 誇之
어늘
太常少卿
이 希指
하여 奏括天下周‧齊‧梁‧陳樂家子弟
하여 皆爲樂戶
하고 六品以下至庶人
히 有善樂者
를 皆直太常
하니
其後에 悉配太常하고 置博士弟子하여 以相傳授하니 樂工이 至三萬餘人이러라
西域諸胡
가 多至
어늘 帝
가 使吏部侍郞
로 掌之
하니 矩
가 知帝好遠略
하여
諸
至者
를 矩
가 誘訪諸國山川風俗
과 王及庶人儀形服飾
하여 撰西域圖記三卷
하여 入朝奏之
하고
且言諸國
이 竝因商人
하여 密送誠疑
하여 願爲臣妾
하나니 若服而撫之
면 渾‧厥
을 可滅
注+謂‧突厥二大國也.이며 戎‧夏
를 可壹
이라한대
帝
가 大悅
하여 日引矩至御坐
하여 親問西域事
어늘 矩
가 盛言胡中
에 多諸珍寶
하고 吐谷渾
을 易可
이라한대
帝가 於是에 慨然慕秦皇‧漢武之功하여 甘心將通西域하여 四夷經略을 咸以委之하고
以矩
로 爲
하여 復使至張掖
하여 引致諸胡
하여 之以利
하여 勸令入朝
하니
卒令中國
으로 疲弊
하여 以至於亡
하니 皆矩之
導也
러라
사물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성知性의 힘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방법들(2)
당초 북제 말엽에 어룡희魚龍戱‧산차희山車戱 등의 잡희雜戱가 있어 산악散樂이라고 하였다.
수 고조隋 高祖가 선양을 받아 즉위하자 우홍牛弘에게 명하여 아악雅樂의 음률을 정비하여 정성正聲이 아닌 산악散樂의 종사자를 모두 풀어주어 내보내게 하였다.
양제煬帝는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와서 조현하려고 하였기에
注+계민가한啓民可汗은 돌궐突厥의 군주이다. 풍부한 음악을 그에게 과시하고자 하자,
태상소경 배온裴蘊이 양제의 뜻에 영합하여 북주北周‧북제北齊‧양梁‧진陳 출신으로 천하의 전문적으로 가무에 종사하는 집안 자제들을 모아서 모두 악호樂戶로 삼고 6품 이하의 관원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음악에 재주 있는 자를 모두 태상시太常寺에 직숙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의 산악散樂이 모두 동경東京에 크게 모이자, 양제가 방화원 적취지芳華苑 積翠池에서 이를 관람하였다.
그 후에 모두 태상시에 배속하고 박사제자를 설치하여 산악을 전수하니 악공樂工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서역西域 각국의 호인胡人들이 장액張掖에 많이 와서 교역하였는데, 양제煬帝가 이부 시랑 배구吏部 侍郞 裴矩에게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배구는 양제가 원방遠方을 경략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배구가 서역에서 온 상인들을 꾀어 오게 하여 여러 나라의 산천과 풍속, 왕에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의 생김새와 복식을 탐문하여 《서역도기西域圖記》 3권을 찬술하고서 입조하여 이를 아뢰었다.
아울러 서역의 여러 나라가 모두 상인을 통해서 은밀히 정성을 보내와 복속하기를 원하니 만일 이들을 신복시켜 위무한다면
토욕혼吐谷渾과
돌궐突厥을 멸망시키고
注+토욕혼吐谷渾과 돌궐突厥 두 대국大國을 이른다. 서융西戎과
하화夏華를 통일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날마다 배구를 불러 어좌御坐 가까이 다가오게 하여 친히 서역의 사정을 묻자, 배구가 서역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많이 있고 토욕혼을 쉽게 병탄할 수 있다고 극구 말하였다.
양제가 이에 꿈에 부풀어 진 시황秦 始皇과 한 무제漢 武帝의 공적을 동경하여 장차 서역과 개통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사이四夷의 경략을 모두 배구에게 맡겼다.
그리고 배구를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임명하여 다시 장액張掖에 가서 서역 각국의 호인胡人들을 꾀어 이익으로 그들을 설득하여 입조하도록 권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서역 각국의 호인胡人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니, 연로沿路의 군현들이 영접하고 전송하는 일로 피폐해져 소모한 비용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국이 피폐해져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으니, 이 모두는 배구가 창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