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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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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簡文帝 爲太子時 講老子於이러니 歎曰
西晉 尙淸虛하여 使으로하니 今東宮 復爾하시니 江南 其爲戎乎注+未㡬, 作亂, , 簡文弑殞.인저


13-9-가7
梁 簡文帝가 태자였을 때 華林園에서 《老子》를 강하였는데, 詹事 何敬容이 탄식하여 말했다.
“西晉이 淸靜과 虛無를 숭상하여 中原을 흉노와 羯族에게 빼앗겼다. 지금 동궁이 이를 반복하니 江南은 장차 戎族의 땅이 되겠구나.”注+얼마 지나지 않아 侯景이 난을 일으켜, 武帝는 굶어 죽고 簡文帝는 시해를 당했다.


역주
역주1 13-9-가7 : 《資治通鑑》 卷161 〈梁紀17 武帝〉 太淸 2년(548) 정월 조에 보인다. 《西山讀書記》에 따르면 眞德秀는 侍中 太子詹事 何敬容이 梁 武帝가 불교를 좋아하고 태자인 簡文帝가 老莊에 관심을 가지자 이를 우려하여 撰史學士 吳孜에게 한 말이라고 설명하였다.
역주2 華林園 : 남조 시기 宋‧齊‧梁 등의 역대 군주가 연회를 열던 宮園이다. 그 옛터는 지금의 南京市 鷄鳴山 남쪽의 옛 臺城 안에 있다. 본래 삼국시대 吳나라 때 建業에 만들어졌는데, 建康이 東晉의 수도가 되면서 建康宮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南宋 때까지도 잔존하였다. 《資治通鑑》에는 화림원이 玄圃로 되어 있다. 이 역시 남조 시기 建康의 宮園으로 때때로 講經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北魏 酈道元의 《水經注》 卷1 〈河水〉에 따르면 “崑崙山은 세 층차로 되어 있는데 맨 아래는 樊桐으로 일명 板松이라고 하며 두 번째는 玄圃로 일명 閬風이라고 하며 세 번째는 層城으로 天庭이라고 하니 이곳이 天帝의 거처이다.[崑崙之山三級 下曰樊桐 一名板松 二曰玄圃 一名閬風 三曰層城 一名天庭 是爲太帝之居]”라고 하였다. 胡三省은 南朝의 蕭齊 이래로 東宮에 玄圃가 있었는데, 위계상 동궁은 황제의 거처 다음에 해당하므로 玄圃를 세운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資治通鑑 卷161 梁紀17 武帝 胡三省注》
역주3 詹事 : 《漢書》 卷19 〈百官公卿表 上〉의 顔師古 注에 “應劭가 ‘詹은 공급하다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詹事는 바로 給事‧執事이다.”라고 하였다. 秦代에 설치되었다. 주로 太子宮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西漢 때에는 長信詹事와 太子詹事를 두어 각각 皇后宮과 태자궁의 사무를 맡았고 속관으로는 丞‧太子率更‧家令丞‧中長秋 등을 두었다. 長信詹事는 점차 大長秋로 개칭되고 태자첨사는 東漢 때 혁파되었다. 이후 魏晉 시대에 태자첨사가 다시 설치되었는데, 東宮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역주4 何敬容 : ?~549. 南朝 梁나라의 관료‧문학가이다. 자는 國禮로, 廬江 사람이다. 약관에 齊 武帝의 딸인 長城公主의 배필이 되어 부마도위에 제수되었다. 이후 太子舍人‧散騎常侍‧侍中‧吏部尙書‧太子詹事‧吳郡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5 中原 : 사고본에는 ‘宮廟’로 되어 있다.
역주6 : 사고본에는 ‘爲’로 되어 있다.
역주7 胡羯 : 사고본에는 ‘丘墟’로 되어 있으나, 淸代의 피휘이다.
역주8 侯景 : 503~552. 자는 萬景이다. 後魏의 懷朔鎭 사람이다. 힘이 장사였으며 騎射에 능했다. 北鎭의 戍兵으로 邊將 爾朱榮을 섬겨 軍功으로 定州刺史가 되었다. 재상 高歡이 爾朱氏를 주살할 때 귀순하였다. 얼마 뒤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東魏河南道大行臺가 되어 하남 지방을 장악했다. 후원자인 고환이 죽자 太淸 1년에 梁나라에 투항하여 하남왕에 봉해졌다. 太淸 2년(548)에 반란을 일으켜 建康을 공격하여 臺城을 함락시키고 梁 武帝를 유폐시켜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어 簡文帝를 옹립했다가 얼마 뒤 폐위시키고 豫章王 蕭棟을 옹립하였다. 大寶 2년(551) 간문제를 죽이고 소동을 폐위한 뒤 자립하여 국호를 漢, 연호를 太始라고 하였다. 나중에 王僧辯의 공격을 받아 도주하다가 피살되었다.
역주9 武帝 : 南朝 梁나라의 초대 황제 蕭衍(464~549, 재위 502~549)이다. 자는 叔達, 묘호는 高祖이다. 南蘭陵 사람이다. 南朝 齊나라에서 雍州刺史를 지냈다. 永元 2년(500) 폭정을 일삼던 황제 東昏侯를 타도하고자 거병하여 建康을 함락시키고 和帝를 옹립하였다. 뒤이어 禪讓을 받아 梁나라를 건국하였다. 즉위 초에는 儒學을 일으키는 등 괄목할 만한 정치를 폈으나, 말년에는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사찰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고 3번이나 同泰寺에 몸을 바쳤다. 548년 東魏에서 투항해 온 侯景이 난을 일으켜 수도 建康이 함락되고, 武帝 자신은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 저서로는 《周易講疏》‧《中庸講疏》‧《尙書大義》‧《孝經義疏》 등이 있으나 일실되었다.
역주10 : 사고본에는 ‘死’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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