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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正義(1)

상서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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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國子祭酒上護軍曲阜縣開國子 臣孔穎達等 奉勅命撰
국자좨주國子祭酒 상호군곡上護軍曲 부현개국자阜縣開國子 공영달孔穎達 등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하였다.
原注
尙書序
尙書序
釋文 此孔氏所作이니 述尙書起之時代하고 幷敍爲注之由
경전석문經典釋文》에 “이는 공안국孔安國이 지은 것이니, 《상서尙書》가 생겨난 시대를 서술하고, 아울러 를 달게 된 이유를 서술하였다.
相承講之니라
그러므로 서로 이어서 강론하였다.
今依舊爲音이라
지금 구본舊本에 의하여 을 단다.”라고 하였다.
[疏]正義曰:道本沖寂, 非有名言.
정의왈正義曰:‘’는 본래 공허하고 고요하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旣形以道生, 物由名擧, 則凡諸經史, 因物立名.
그러나 일단 형태가 로써 생기고 사물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거론되었다면 모든 는 사물로 인하여 이름을 설립한 것이다.
物有本形, 形從事著, 聖賢闡敎, 事顯於言, 言愜群心.
사물에는 본래의 형태가 있고 형태는 사물에 따라 나타나니, 성현聖賢이 가르침을 천명함에 일이 말에 드러나고 말이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였다.
書而示法, 旣書有法, 因號曰書.
적어서 법을 보였고 일단 적는 데에 이 있으므로 따라서 부르기를 ‘’라고 한 것이다.
後人見其久遠, 自於上世.
후세 사람이 그 구원久遠의 연대가 상세上世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尙者上也, 言此上代以來之書,
’은 ‘’의 뜻을 가진 글자이니, 이는 상대上代 이래의 를 말한 것이다.
故曰尙書.
그러므로 ‘상서尙書’라고 한 것이다.
且言者, 意之聲, 書者, 言之記, 是故存言以聲意, 立書以記言,
또한 말[言]은 뜻의 소리이고, 글[書]은 말의 기록이니, 이러므로 말을 두어서 뜻을 소리로 내고, 글을 설립하여 말을 기록하였다.
故易曰 “書不盡言, 言不盡意.”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글은 말을 다 적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말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是言者, 意之筌蹄, 書言相生者也.
이 ‘말’이란 것은 뜻의 전제筌蹄이니, 글과 말이 서로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書者, 舒也.
’는 펼치다라는 뜻이다.
云 “書者, 如也.” 則書者, 寫其言, 如其意, 情得展舒也.
서위書緯인 《선기검璿璣鈐》에 “‘’는 같다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는 그 말을 베끼기를 그 뜻과 같이하여 이 펼쳐지게 하는 것이다.
又劉熙釋名云 “書者, 庶也, 以記庶物, 又爲著.” 言事得彰著.
유희劉熙의 《석명釋名》에 “‘’는 여럿[庶]의 뜻을 가졌으니, 서물庶物을 기록한 것이고, 또 나타나다라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일이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疏]五經, 皆是筆書, 此獨稱書者, 以彼五經者, 非是君口出言.
오경五經육적六籍이 모두 붓에 의해 적히거늘 여기서만 유독 ‘’라고 칭한 것은 저 오경五經은 임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卽書爲法, 所書之事, 各有云爲, 遂以所爲, 別立其稱,
써서 으로 삼은 것은 적는 일에 각각 말과 행동이 있으니, 드디어 행한 바를 가지고 별도로 그 호칭을 설립한 것이다.
稱以事立,
호칭은 일을 가지고 설립한다.
故不名書.
그러므로 ‘’라고 명칭하지 않는다.
至於此書者, 本書君事, 事雖有別, 正是君言.
이 ‘’에 이르러서는 본래 임금의 일을 적었으니, 일은 비록 특별한 것이 있으나 그것이 바로 임금의 말이다.
言而見書, 因而立號.
말을 하면 쓰이게 되고 따라서 호칭이 설립된다.
以此之故, 名異諸部.
이 때문에 명칭이 여러 부처마다 다르다.
但諸部之書, 隨事立名, 名以事擧, 要名立之後, 亦是筆書, 故百氏六經總曰書也.
다만 여러 부처의 책은 일에 따라 이름을 설립하고 이름은 일로써 거행되니, 요컨대 이름이 설립된 뒤에도 역시 붓으로 적기 때문에 백씨百氏(諸子百家)와 육경六經을 총칭하여 책이라고 한 것이다.
論讖所謂 “題意別名, 各自載耳.”
논참論讖》에 이른바 “제의題意별명別名이 각각 그대로 실렸을 뿐이다.”라는 것이다.
昭二年左傳曰 “晉韓起適魯, 觀書於太史氏, 見易象與魯春秋.” 此總名書也.
소공昭公 2년 조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라 한기韓起나라에 가서 태사씨太史氏에게서 책을 빌려볼 때 역상易象나라의 《춘추春秋》를 보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책을 총칭한 것이다.
[疏]‘序’者, 言序述尙書起存亡注說之由, 序爲尙書而作, 故曰尙書序.
[序] 《상서尙書》의 기흘起訖(始終)과 존망存亡 그리고 주설注說의 이유에 대하여 서술함을 말한 것이니, ‘’는 《상서尙書》를 위해 지은 것이기 때문에 ‘상서서尙書序’라고 한 것이다.
周頌曰 “繼序思不忘.” 毛傳云 “序者, 緖也.” 則緖述其事, 使理相胤續, 若繭之抽緖.
시경詩經》 〈주송周頌〉에 “를 이을 것을 생각하여 잊지 못하리로다.”라고 하였고, 《모시전毛詩傳》에 “‘’는 실마리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일을 서술하여 이치가 서로 이어지기를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 하게 하였다.
但易有序卦, 子夏作詩序, 孔子亦作尙書序,
다만 《》에는 서괘序卦가 있으며, 자하子夏는 〈시서詩序〉를 짓고, 공자孔子 또한 〈상서서尙書序〉를 지었다.
因此作序名也.
그러므로 공안국孔安國이 이로 인하여 서명序名을 지었다.
鄭玄謂之者, 以序不分散, 避其序名, 故謂之贊.
정현鄭玄이 ‘’이라 이른 것은 〈공자孔子가 지은 《상서尙書》의〉 가 〈아직 각 편으로〉 분산되지 않아서, 그 서명序名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이라 이른 것이다.
贊者, 明也, 佐也. 佐成序義, 明以注解故也.
’은 밝힌다는 뜻이고 돕는다는 뜻을 가진 것이니, 의 뜻을 도와 이루어 주해注解로써 밝혔기 때문이다.
安國以孔子之序, 分附篇端, 故己之總述, 亦謂之序. 事不煩重 義無所嫌故也.
공안국孔安國공자孔子 끝에 나누어 붙였기 때문에 자기의 총술總述을 또한 ‘’라고 하였으니, 일이 번중煩重하지 않고 뜻에 혐의할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原注
古者 伏犧氏之王天下也 始畫八卦하고 造書契하여 以代하니 由是文籍 生焉이니라
옛날 복희씨伏犧氏가 천하에 왕 노릇을 할 때에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어서 결승結繩의 정치를 대신하니, 이로부터 문적文籍이 생겨났다.
原注
○伏犧氏 伏古作虙이니라
○‘복희씨伏犧氏’의 ‘’을 옛적에는 ‘’으로 적었다.
犧本又作羲 亦作戲니라
’는 어떤 본에는 또 ‘’로도 적고 또한 ‘’로도 적었다.
說文云 賈侍中說此犧 非古字라하고 張揖字詁云 羲 古字 今字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가시중賈侍中(賈嘉)이 ‘이 고자古字가 아니다.’고 했다.”라고 하였고, 장읍張揖의 《자고字詁》에는 “‘’는 고자古字이고 ‘’는 금자今字이다.”라고 하였다.
一號包羲氏 之最先이니 風姓이요 母曰華胥 以木德王하니 卽太皞也니라
다른 호칭은 ‘포희씨包羲氏’로서 삼황三皇 중에 가장 먼저 나타난 제왕帝王인데, 이고 모친은 ‘화서華胥’라고 하며, 목덕木德으로 왕 노릇을 하였는데, 곧 ‘태호太皡’이다.
書者 文字 契者 刻木而書其側이라
’라는 것은 문자文字요, ‘’라는 것은 나무를 깎아서 그 측면에 적는 것이다.
故曰書契也니라
그러므로 ‘서계書契’라고 한다.
一云 以書契約其事也
일설一說에는 “서계書契를 가지고 그 일을 약속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鄭玄云 以書書木邊하여 言其事하니 刻其木 謂之書契也
정현鄭玄은 “글씨로 나무 가장자리에 적어서 그 일을 말하였으니, 그 나무에 새긴 것을 ‘서계書契’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結繩 易繫辭 上古 結繩而治러니 後世 聖人易之以書契
결승結繩’에 대하여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상고시대에 노끈을 맺어서 정치를 하였는데, 후세에 와서 성인聖人서계書契를 가지고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文字也 籍書니라
문자文字요, 서적書籍이다.
[疏]‘古者’至‘生焉’
상서서尙書序〉의 [古者]에서 [生焉]까지
○正義曰:‘代結繩’者, 言前世之政用結繩, 今有書契以代之.
정의왈正義曰:[代結繩]전세前世의 정치에서는 결승結繩의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지금 서계書契를 가지고 그를 대신함을 말한다.
則伏犧時, 始有文字以書事,
복희伏犧 때에 비로소 문자文字를 가지고 일을 적었다.
故曰“由是文籍生焉.”
그러므로 “이로부터 문적文籍이 생겼다.”라고 한 것이다.
自今本昔曰古.
지금으로부터 옛적을 추본推本하는 것을 ‘’라고 한다.
古者以聖德伏物, 敎人取犧牲, 故曰伏犧.
옛적에 성덕聖德을 가지고 만물을 복종시키고 사람들에게 희생犧牲을 취하는 방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복희伏犧’라고 했다.
字或作宓犧, 音亦同.
글자를 더러 ‘복희宓犧’라고 적기도 하는데, 은 역시 같다.
律曆志曰 “結作網罟 以取犧牲, 故曰伏犧.”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그물을 맺어서 희생犧牲을 잡았기 때문에 ‘복희伏犧’라 했다.”라고 하였다.
或曰包犧, 言取犧而包之.
더러는 ‘포희包犧’라고 하는데, 희생犧牲을 잡아서 싸는 것을 말한다.
顧氏讀包爲庖, 取其犧牲, 以供庖廚.
고표顧彪는 ‘’를 ‘’로 읽었으니, 희생犧牲포주庖廚에 제공함을 취한 것이다.
顧氏又引云 “伏犧母曰華胥,
고표顧彪는 또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복희伏犧의 어머니는 ‘화서華胥’라고 한다.
有巨人跡, 出於雷澤, 華胥以足履之, 有娠, 生伏犧於成紀, 蛇身人首.”
뇌택雷澤에서 걸어 나온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발로 밟고 임신하여 성기成紀에서 복희伏犧를 낳았는데, 몸은 뱀의 몸이고 머리는 사람의 머리였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月令云 “其帝太昊.” 繫辭云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 是直變包言伏耳, 則伏犧是皇.
예기禮記》 〈월령月令〉에는 “그 는 ‘태호太皡’이다.”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계사繫辭〉에는 “옛적에 포희씨包犧氏천하天下에 왕 노릇을 할 때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만 ‘’를 변개하여 ‘’으로 말했을 뿐이니, 복희伏犧가 바로 ‘’이다.
言‘王天下’者, 以皇與帝‧王, 據跡爲優劣, 通亦爲王.
[王天下] 그리고 은 자취에 의거하여 우열을 삼으나 통틀어서 또한 ‘’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故禮運云 “昔者先王.” 亦謂上代爲王.
그러므로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옛적 선왕先王이다.” 하였으니, 또한 상대上代에 왕 노릇함을 이른 것이다.
但自下言之, 則以上身爲王, 據王身於下, 謂之王天下也.
다만 아랫사람들로부터 말하면 윗사람의 몸을 ‘’이라고 하고, 의 몸이 아랫사람들에게 군림하면 천하에 왕 노릇을 한다고 이를 뿐이다.
[疏]知伏犧始畫八卦者, 以繫辭云 “包犧氏之王天下也.” 後乃云 “始畫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故知之也.
복희伏犧가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은 《주역周易》 〈계사繫辭〉에서 “포희씨包犧氏가 천하에 왕 노릇을 할 때이다.”라고 하였고, 뒤이어서 곧 “비로소 팔괘八卦를 그려서 신명神明을 통하고 만물萬物을 분류하였다.”라고 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知時造書契以代結繩之政者, 亦以繫辭云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 易之以書契, 蓋取諸夬.”
이때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의 정치를 대신했음을 알 수 있는 것도 또한 〈계사繫辭〉에서 “상고上古에 노끈을 맺어서 정치를 하였는데, 후세 성인이 서계書契를 가지고 바꾸었으니, 그는 아마도 쾌괘夬卦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是造書契, 可以代結繩也.
이에 서계書契를 만들었으니, 결승結繩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彼直言後世聖人, 知是伏犧者, 以理比況而知.
저기에서 단지 ‘후세 성인’이라고만 말했으나 그가 바로 ‘복희伏犧’란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치로 견주어 보아서 아는 것이다.
何則. 八卦畫萬物之象, 文字書百事之名,
왜냐하면 팔괘八卦는 만물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고, 문자文字는 온갖 일을 적는 명칭이다.
故繫辭曰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觀鳥獸之文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始畫八卦.” 是萬象見於卦.
그러므로 〈계사繫辭〉에서 “위로는 하늘에서 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에서 을 관찰하며, 조수鳥獸의 문채와 천지의 알맞은 것을 관찰하며, 가까이는 자신에게서 취하고 멀리는 외물에게서 취하여 비로소 팔괘八卦를 그렸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만상萬象에 나타낸 것이다.
然畫亦書也, 與卦相類,
그러나 그리는 것 또한 쓰는 것이니, 와 더불어 같다.
故知書契, 亦伏犧時也.
그러므로 서계書契 또한 복희伏犧시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由此孔意, 正欲須言伏犧時有書契, 本不取於八卦.
이로 말미암아 공안국孔安國의 생각은 복희伏犧시대에 이미 서계書契가 있었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고 본래 팔괘八卦에서 취한 것은 아니었다.
今云八卦者, 明書‧卦相類, 據繫辭有畫八卦之成文而言, 明伏犧造書契也.
지금 ‘팔괘八卦’라고 한 것은 문자와 가 서로 같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고,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있는 팔괘八卦를 그려 문채를 이루었다고 한 것에 의거해서 말한 것은 복희伏犧서계書契를 만든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言‘結繩’者, 當如鄭注云 “爲約, 事大大其繩, 事小小其繩.”
[結繩]정주鄭注에서 “약속을 하되 일이 클 경우는 그 노끈을 크게 맺고 일이 작을 경우는 그 노끈을 작게 맺었다.”라는 것과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王肅亦曰 “結繩, 識其政事” 是也.
왕숙王肅도 “노끈을 맺어 그 정사를 기록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言‘書契’者, 鄭云 “書之於木, 刻其側爲契, 各持其一, 後以相考合, 若結繩之爲治.”
[書契]정현鄭玄이 “나무에 적어서 그 측면을 새겨 ‘’를 만들어 각각 그 하나씩을 가졌다가 뒤에 서로 상고해 맞추어보기를 마치 노끈을 맺어 정치를 하는 것처럼 했다.”라고 하였다.
孔無明說, 義或當然.
공안국孔安國이 분명히 말한 것이 없으나 뜻은 혹 그러했을 것이다.
說文云 “文者, 物象之本也.”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은 물상物象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籍者, 借也, 借此簡書以記錄政事, 故曰籍.
’은 빌리다라는 뜻이니, 이 간서簡書를 빌어서 정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라 했다.
蓋取諸夬, 夬者, 決也, 言文籍所以決斷, 宣揚王政,
“아마도 쾌괘夬卦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한 ‘’는 결단決斷하다라는 뜻이니, 문적文籍결단決斷하여 왕정王政선양宣揚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是以夬繇曰 “揚于王庭.” 繫辭云 “包犧氏之王天下.”
이 때문에 쾌괘夬卦의 괘사에 “왕의 조정에서 드러냈다.”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포희씨包犧氏가 천하에 노릇 할 때에”라고 한 것이다.
又云 “作結繩而爲罔罟, 蓋取諸離.” 彼謂結罔罟之繩, 與結爲政之繩異也.
계사繫辭〉에 또 “노끈을 맺어 그물을 만든 것은 아마도 이괘離卦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저기서 ‘그물을 맺었다.’는 노끈은 ‘맺어서 정사를 하였다.’는 노끈과 다르다.
若然, 尙書緯及孝經讖皆云 “三皇無文字.” 又班固‧馬融‧鄭玄‧王肅諸儒, 皆以爲“文籍初自五帝.”
만일 그렇다면 《상서위尙書緯》와 《효경참孝經讖》에서 모두 “삼황三皇시대에는 문자文字가 없었다.”라고 하고, 또 반고班固마융馬融정현鄭玄왕숙王肅 제유諸儒도 모두 “문적文籍오제五帝시대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고,
亦云 “三皇未有文字.” 與此說不同, 何也.
또한 “삼황三皇시대에는 문자文字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과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疏]又蒼頡造書, 出於, 蒼頡豈伏犧時乎.
창힐蒼頡이 글을 만든 사실이 《세본世本》에 나오니, 창힐蒼頡은 아마 복희伏犧시대 사람이었던가?
且繫辭云黃帝‧堯‧舜爲之目, 末乃云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또 《주역周易》 〈계사繫辭〉에는 황제黃帝이 아홉 가지 일의 조목을 만들었다고 하고서 끝에 가서는 곧 “상고上古시대에는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서 정치를 하였는데, 후세後世성인聖人서계書契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是後世聖人, 卽黃帝‧堯‧舜, 何得爲伏犧哉.
여기의 ‘후세의 성인’은 곧 황제黃帝인데, 어떻게 복희伏犧가 될 수 있겠는가?
孔何所據而更與繫辭相反, 如此不同者.
공안국孔安國은 어디에 근거했기에 다시 〈계사繫辭〉와 상반되어 이처럼 같지 않은 것인가?
藝文志曰 “仲尼沒而微言絶, 七十子喪而大義乖.”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중니仲尼가 작고하자 미언微言이 끊어지고, 70명의 제자가 죽으니 대의大義가 무너졌다.”라고 하였다.
況遭秦焚書之後, 群言競出,
하물며 시황始皇이 서적을 불태운 불행을 만난 뒤에는 여러 사람의 말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았던가?
鄙近, 不出聖人, 前賢共疑, 有所不取.
위서緯書의 글은 뜻이 천근淺近하여 성인聖人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전현前賢들이 다 같이 의심하고 취하지 않았다.
通人考正, 僞起哀‧平, 則孔君之時, 未有此緯, 何可引以爲難乎.
박람강기한 사람이 고정考正한 결과 위서僞書나라 애제哀帝평제平帝 연간에 생겼으니, 공안국孔安國 때에는 이와 같은 위서緯書가 없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끌어다 힐난할 수 있겠는가?
[疏]其馬‧鄭諸儒, 以據文立說, 見後世聖人在九事之科, 便謂書起五帝, 自所見有異, 亦不可難孔也.
마융馬融정현鄭玄제유諸儒문적文籍에 의거하여 입설立說했기 때문에 후세後世성인聖人이 아홉 가지 일의 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문적은 오제五帝시대에 생겼다고 하였으므로 자연 소견이 다른 것이니, 또한 공안국孔安國을 힐난할 수 없다.
而繫辭云 後世聖人, 在九事之下者, 有以而然.
계사繫辭〉에서 후세後世성인聖人을 아홉 가지 일의 아래에 둔 것은 까닭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案彼文先歷說伏犧‧神農蓋取, 下乃云 “黃帝‧堯‧舜, 垂衣裳而天下治, 蓋取諸乾坤.” 是黃帝‧堯‧舜之事也.
상고하건대 저 〈계사繫辭〉의 글에서 먼저 복희伏犧신농神農은 아마도 무엇에서 취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일일이 말하고는 아래에서 “황제黃帝의상衣裳을 드리우고 있음에 천하天下가 다스려졌으니, 아마도 건괘乾卦곤괘坤卦에서 법을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황제黃帝의 일이다.
又舟楫取渙, 服牛取隨, 重門取豫, 臼杵取小過, 弧矢取睽, 此五者, 時無所繫, 在黃帝‧堯‧舜時, 以否皆可以通也.
주즙舟楫환괘渙卦에서 취하고, 복우服牛수괘隨卦에서 취하고, 중문重門예괘豫卦에서 취하고, 구저臼杵소과괘小過卦에서 취하고, 호시弧矢규괘睽卦에서 취하였다는 이 다섯 가지에는 시대를 달지 않고 황제黃帝의 시대에 두었으니, 그것은 비색한 것이 다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至於宮室‧葬與書契, 皆先言‘上古’‧‘古者’, 乃言後世聖人易之, 則別起事之端, 不指黃帝‧堯‧舜時.
궁실宮室장사葬事서계書契에 대해서는 모두 먼저 ‘상고上古’와 ‘고자古者’를 말하고, 이에 후세後世성인聖人이 무엇으로 바꾸었다고 하였으니, 별도로 일의 단서를 일으킨 것이고 황제黃帝의 시대를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以此葬事, 云古者, 不云上古, 而云易之以棺槨.
이 때문에 장사葬事에서는 ‘고자古者’라 이르고 ‘상고上古’라 이르지 않았으며, ‘관곽棺槨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棺槨自殷湯而然, 非是彼時之驗, 則上古結繩, 何廢伏犧前也.
관곽棺槨은탕殷湯으로부터 그렇게 한 것이고 저 시대를 징험한 것이 아닌데, 상고上古에 노끈 맺는 일이 어떻게 복희伏犧 이전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疏]其蒼頡, 則說者不同,
창힐蒼頡에 대해서는 설자說者가 동일하지 않다.
故世本云 “蒼頡作書.” 司馬遷‧班固‧韋誕‧宋忠‧傅玄皆云 “蒼頡, 黃帝之史官也.”
그러므로 《세본世本》에는 “창힐蒼頡이 글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며,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위탄韋誕송충宋忠부현傅玄은 모두 “창힐蒼頡황제黃帝사관史官이었다.”라고 하고,
崔瑗‧曹植‧蔡邕‧索靖皆直云 “古之王也.”
최원崔瑗조식曹植채옹蔡邕색정索靖은 모두 단지 “옛적의 이었다.”라고만 하고,
徐整云 “在神農‧黃帝之間.” 譙周云 “在炎帝之世.”
서정徐整은 “신농神農황제黃帝의 중간에 존재했다.”라고 하고, 초주譙周는 “염제炎帝의 세대 사람이었다.”라고 하고,
衛氏云 “當在庖犧‧蒼帝之世.” 愼到云 “在庖犧之前.”
위포衛包는 “당연히 포희庖犧창제蒼帝의 세대에 존재했다.”라고 하고, 신도愼到는 “포희庖犧 이전에 존재했다.”라고 하였다.
張揖云 “蒼頡爲帝王, 生於禪通之紀.”
장읍張揖은 “창힐蒼頡제왕帝王을 지낸 사람으로 선통기禪通紀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廣雅曰 “自開闢至獲麟二百七十六萬歲, 分爲十紀, 則大率一紀二十七萬六千年,
광아廣雅》에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부터 획린獲麟에 이르기까지 276만 년을 10로 나누면 대충 1가 27만 6천년이고,
十紀者, 九頭一也, 五龍二也, 攝提三也, 合雒四也, 連通五也, 序命六也, 循飛七也, 因提八也, 禪通九也, 流訖十也.”
10구두기九頭紀가 1, 오룡기五龍紀가 2, 섭제기攝提紀가 3, 합락기合雒紀가 4, 연통기連通紀가 5, 서명기序命紀가 6, 순비기循飛紀가 7, 인제기因提紀가 8, 선통기禪通紀가 9, 유흘기流訖紀가 10이다.”라고 하였다.
如揖此言, 則蒼頡在前二十七萬六千餘年.
장읍張揖의 이 말과 같다면, 창힐蒼頡획린獲麟 전 27만 6천여 년에 존재하였다.
是說蒼頡其年代莫能有定, 亦不可以難孔也.
이는 창힐蒼頡의 연대를 추정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니, 또한 공안국孔安國을 힐난할 수 없다.
然紀自燧人而下, 揖以爲自開闢而設,
그러나 수인燧人으로부터 내려갔는데, 장읍張揖개벽開闢으로부터 베풀어간 것으로 여겼다.
又伏犧前六紀後三紀, 亦爲據張揖‧愼到‧徐整等說, 亦不可以年斷.
복희伏犧 이전이 6이고 이후가 3이지만, 또한 장읍張揖신도愼到서정徐整 등의 에 의거하면 역시 연도로 단정할 수 없다.
訖之紀, 似自黃帝爲始耳.
유흘기流訖紀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疏]又依易緯通卦驗, 燧人在伏犧前, 表計寘其刻曰 “蒼牙通靈昌之成孔演命明道經.”
또 《역위易緯》 〈통괘험通卦驗〉에 의하면, 수인燧人복희伏犧 이전에 존재하였고, 〈표계表計〉에는 “창아통령창지성공연명명도경蒼牙通靈昌之成孔演命明道經”이라고 새겨놓았다.
鄭玄注云 “刻謂刻石而記識之.”
정현鄭玄이 여기에 를 달기를 “‘’은 돌에 새겨서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거하면 복희伏犧 이전에 이미 문자文字가 있었던 것이다.
又陰陽書稱 “天老對黃帝云 ‘鳳皇之象, 首戴德, 背負仁, 頸荷義, 膺抱信, 足履政, 尾繫武.’”
또 《음양서陰陽書》에 일컫기를 “천로天老(黃帝의 신하)가 황제黃帝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봉황鳳凰은 머리에 을 이고, 등에 을 지고, 목에 를 메고, 가슴에 을 안고, 발로 을 밟고, 꼬리에 를 매답니다.’ 했다.”라고 하였고,
又山海經云 “鳳皇首文曰德, 背文曰義, 翼文曰順, 膺文曰仁, 腹文曰信.”
또 《산해경山海經》에 “봉황鳳凰수문首文을 ‘’이라 하고, 배문背文을 ‘’라 하고, 익문翼文을 ‘’이라 하고, 응문膺文을 ‘’이라 하고, 복문腹文을 ‘’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又易繫辭云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 是文字與天地竝興焉.
또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하수河水에서 (河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洛書)가 나오니, 성인聖人이 그것을 본받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문자文字천지天地와 아울러 일어났음을 의미한 것이다.
又韓詩外傳稱 “古封太山, 禪梁甫者萬餘人, 仲尼觀焉, 不能盡識.”
또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 일컫기를 “옛날 태산太山에 흙을 쌓아 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양보梁甫(梁父)의 땅을 깨끗하게 하여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낸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지만, 중니仲尼가 관찰하여 다 식별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고,
又管子書稱 “管仲對齊桓公曰 ‘古之封太山者七十二家, 夷吾所識而已. 首有無懷氏封太山, 禪云云.’”
관자서管子書》에서 일컫기를 “관중管仲 환공桓公에게 고하기를 ‘옛날 태산太山에 흙을 쌓아 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자가 72였지만, 이오夷吾(管仲)가 식별한 것은 12뿐이었는데, 첫머리에 무회씨無懷氏태산太山에 흙을 쌓아 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땅을 깨끗하게 하여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라고 운운했다.”라고 하였다.
其登封者, 皆刻石紀號, 但遠者字有彫毁,
그들이 올라가서 흙을 쌓아 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경우는 모두 돌에 이름을 새겨 기록한 것인데, 다만 연대가 멀어서 글자가 마모되었을 뿐이다.
故不可識, 則夷吾所不識者六十家, 又在無懷氏前.
그러므로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니, 이오夷吾가 식별하지 못한 것은 60였고, 그것도 또 무회씨無懷氏 전에 있는 자들이었다.
孔子覩而不識, 又多於夷吾,
공자孔子가 관찰하고 식별하지 못한 것도 이오夷吾가 식별하지 못한 것보다 더 많았다.
是文字在伏犧之前, 已自久遠, 何怪伏犧而有書契乎.
이것은 문자文字복희伏犧 이전에 있었다는 증거인데, 다만 연대가 오래되어서 알 수 없을 뿐이니, 복희伏犧시대에 서계書契가 있었다는 것이 무어 괴상할 게 있겠는가?
如此者, 蓋文字在三皇之前, 未用之敎世,
이와 같은 것은 아마 문자文字삼황三皇 이전에 존재하였으나 그것을 이용해서 세상을 교화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至伏犧乃用造書契, 以代結繩之政, 是敎世之用, 猶燧人有火, 中古用以燔黍捭豚, 後聖乃修其利相似.
복희伏犧시대에 와서 곧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의 정사를 대신하였으니, 이것은 세상을 교화하는 용도가, 마치 수인씨燧人氏가 불을 마련하자 중고中古에 그 불을 이용하여 기장쌀을 돌 위에 얹고 그 돌을 불로 달구어 익히고, 돼지의 날고기를 찢어서 뜨겁게 단 돌 위에 놓아 익혔기 때문에 후세後世 성인聖人이 곧 그 이익을 본 것과 서로 같은 격이다.
[疏]文字理本有之, 用否隨世而漸也.
문자文字는 이치상 본래 있는 것이나, 쓰이고 안 쓰이는 것은 세대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지는 것이다.
若然, 惟繫辭至神農始有噬嗑與益, 則伏犧時其卦未重, 當無雜卦, 而得有取諸夬者.
만일 그렇다면 《주역周易》 〈계사繫辭〉에는 신농씨神農氏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서합괘噬嗑卦익괘益卦에서 취한 것으로 되어있으니, 복희伏犧시대에는 그 들이 아직 중괘重卦가 못 되었으므로 응당 잡괘雜卦가 없어야 할 텐데 쾌괘夬卦에서 취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此自鄭玄等說耳.
이것은 정현鄭玄 등으로부터 한 말일 뿐이다.
案說卦曰 “昔者聖人幽贊於神明而生蓍.” 繫辭曰 “天生神物, 聖人則之.” 則伏犧用蓍而筮矣.
상고하건대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에 “옛날 성인聖人이 〈을 지을 적에〉 그윽이 신명神明을 도와 시초蓍草를 내었다.”라고 하였고, 〈계사繫辭〉에 “하늘이 신물神物(河圖와 낙서洛書)을 내니, 성인聖人이 그것을 본받았다.”라고 하였으니, 복희伏犧시초蓍草를 사용하여 점을 쳤을 것이다.
故鄭注說卦亦曰 “昔者聖人, 謂伏犧‧文王也.”
그러므로 정현鄭玄이 〈설괘전說卦傳〉에 주를 달 때에도 “‘석자성인昔者聖人’은 복희伏犧문왕文王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繫辭又曰 “十有八變而成卦.”
계사繫辭〉에 또 “18번 변하여 를 이룬다.”라고 하였다.
是言爻皆三歸奇爲三變, 十八變則六爻明矣.
이것은 가 모두 3번 세고 난 나머지 수가 돌아가는 것이 3이 됨을 말한 것이니, 18번 변한다면 6가 분명하다.
점치는 것은 모두 6로 하니, 복희伏犧가 점을 친 일이 있었다면 6가 있었을 것인데, 어찌 중괘重卦가 아니라 하며 쾌괘夬卦가 있는 것을 괴상하게 여겼는가?
原注
伏犧神農黃帝之書 謂之三墳이니 言大道也 少昊顓頊高辛唐虞之書 謂之五典이니 言常道也니라
복희伏犧신농神農황제黃帝의 글을 《삼분三墳》이라 이르니 대도大道를 말한 것이고, 소호少皞전욱顓頊고신高辛의 글을 《오전五典》이라 이르니 상도常道를 말한 것이다.
原注
○少昊 金天氏 靑陽이요 一曰玄囂이며 己姓이니 黃帝之子 母曰女節이니라
소호少皞금천씨金天氏로 이름은 이고, 청양靑陽이고 다른 하나는 현효玄囂라 하며, 기성己姓인데, 황제黃帝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여절女節’이라 한다.
以金德王이니 五帝之最先이니라
금덕金德으로 노릇을 하였는데, 오제五帝의 첫 번째이다.
顓頊 高陽氏 姬姓이니 黃帝之孫이요 昌意之子 母曰景僕이니 謂之女樞니라
전욱顓頊고양씨高陽氏희성姬姓인데, 황제黃帝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경복景僕’이라 하는데, 그를 ‘여추女樞’라고 이른다.
以水德王이니 五帝之二也니라
수덕水德으로 노릇을 하였는데, 오제五帝의 두 번째이다.
高辛 帝嚳也 姬姓이요 母名不見이니라
고신高辛제곡帝嚳인데 희성姬姓이며, 어머니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以木德王이니 五帝之三也니라
목덕木德으로 노릇을 하였는데, 오제五帝의 세 번째이다.
帝堯也 姓伊耆氏니라
제요帝堯로서 이기씨伊耆氏이다.
堯初爲唐侯라가 後爲天子하여 都陶
는 처음에 당후唐侯가 되었다가, 뒤에 천자天子가 되어 에 도읍을 세웠다.
故號陶唐氏니라
그러므로 ‘도당씨陶唐氏’라 불렀다.
帝嚳之子 帝摯之弟 母曰慶都니라
제곡帝嚳의 아들이자 제지帝摯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경도慶都’라 한다.
以火德王이니 五帝之四也니라
화덕火德으로 노릇을 하였는데, 오제五帝의 네 번째이다.
帝舜也 姓姚氏 國號有虞니라 顓頊六世孫이요 瞽瞍之子 母曰握登이니라
제순帝舜으로서 요씨姚氏이고 국호國號를 ‘유우有虞’라 하였는데, 전욱顓頊의 6세손世孫이자 고수瞽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악등握登’이라 한다.
以土德王이니 五帝之五也니라
토덕土德으로 노릇을 하였는데, 오제五帝의 다섯 번째이다.
先儒解三皇五帝 與孔이니 竝見發題니라
선유先儒삼황三皇오제五帝를 해석한 것은 공안국孔安國과 같은데, 모두 발제發題(序頭)에 보인다.
[疏]‘伏犧’至‘常道也’
상서서尙書序〉의 [伏犧]에서 [常道也]까지
○正義曰:墳, 大也.
정의왈正義曰:‘’은 크다는 뜻이다.
以所論三皇之事, 其道至大, 故曰 “言大道也.”
논한바 ‘삼황三皇의 일’이 그 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대도大道를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以典者, 常也, 言五帝之道, 可以百代常行, 故曰 “言常道也.”
’은 항상이란 뜻이니, 오제五帝백대百代토록 항상 행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에 “상도常道를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此三皇‧五帝, 或擧德號, 或擧地名, 或直指其人, 言及, 不爲義例.
삼황三皇오제五帝에 대해서는 혹은 덕호德號를 들기도 하고, 혹은 지명地名을 들기도 하고, 혹은 곧바로 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니, 말하기 편하게 칭하였고 의례義例를 정하지 않았다.
顧氏引帝王世紀云 “神農母曰女登, 有神龍首感女登而生炎帝, 人身牛首.
고표顧彪는 《제왕세기帝王世紀》를 인용하여 “신농神農의 어머니는 ‘여등女登’이라 하는데, 신룡神龍의 머리가 여등女登을 감동시켜서 염제炎帝를 낳았으니, 몸은 사람의 몸이고 머리는 소의 머리였다.
黃帝母曰附寶, 見大電光繞北斗樞星, 附寶感而懷孕, 二十四月而生黃帝, 日角龍顔.
황제黃帝의 어머니는 ‘부보附寶’라 하는데, 거대한 번갯빛이 북두추성北斗樞星을 두르는 것을 보고 부보附寶가 감응하여 임신해서 24개월 만에 황제黃帝를 낳았는데, 일각日角용안龍顔이었다.
少昊金天氏, 母曰女節, 有星如虹下流, 意感而生少昊.
소호少皞금천씨金天氏로서 그 어머니는 ‘여절女節’이라 하는데, 별이 무지개처럼 하류下流한 것을 보고 감응하여 소호少皞를 낳았다.
顓頊母曰景僕, 昌意正妃, 謂之女樞,
전욱顓頊의 어머니는 ‘경복景僕’이라 하는데, 창의昌意정비正妃이며, ‘여추女樞’라고 이른다.
有星貫月如虹, 感女樞於幽房之宮而生顓頊.
별이 달을 꿰어 무지개처럼 생겨 여추女樞유방궁幽房宮에서 감응시켜 전욱顓頊을 낳았다.
堯母曰慶都, 觀河遇赤龍, 晻然陰風, 感而有孕, 十四月而生堯.” 又云 “舜母曰握登, 見大虹感而生舜.”
의 어머니는 ‘경도慶都’라 하는데, 하수河水적룡赤龍을 만나, 날은 침침하고 바람은 음산하게 부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임신해서 14개월 만에 를 낳았다.”라고 하였고, 또 “의 어머니는 ‘악등握登’이라 하는데, 큰 무지개를 보고 감응하여 을 낳았다.”라고 하였다.
[疏]此言‘謂之三墳’‧‘謂之五典’者, 因左傳有三墳五典之文, 故指而謂之.
[謂之三墳]‧[謂之五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삼분三墳》‧《오전五典》에 대한 글이 있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然五帝之書, 皆謂之典, 則虞書皐陶謨‧益稷之屬, 亦應稱典.
그러나 오제五帝의 글을 모두 ‘’이라 일렀다면 〈우서虞書〉의 〈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 등도 응당 ‘’이라고 칭했어야 할 것이다.
所以別立名者,
그런데 별도로 명칭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若主論帝德, 則以典爲名, 其臣下所爲, 隨義立稱.
만일 제덕帝德을 주로 논했다면, ‘’으로 이름을 붙이고, 그 신하臣下가 한 일은 뜻에 따라 명칭을 달리 세웠기 때문이다.
其三墳, 直云言大道也, 五典, 直云言常道也, 不訓墳‧典之名者, 以墳大典常, 常訓可知,
삼분三墳’에 대해서는 단지 “대도大道를 말한 것이다.”라고만 하고, ‘오전五典’에 대해서는 단지 “상도常道를 말한 것이다.”라고만 하였으며, ‘’과 ‘’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풀이하지 않은 것은 ‘’은 ‘’의 뜻을 가졌고 ‘’은 ‘’의 뜻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이란 뜻으로 풀이한 것을 알 수 있다.
故略之也.
그러므로 생략한 것이다.
常道所以與大道爲異者, 以帝者公平天下, 其道可以常行,
상도常道’가 ‘대도大道’와 다른 까닭은 ‘’라는 임금은 천하天下를 공평하게 다스리기 때문에 그 는 항상 행할 수 있다.
故以典言之.
그러므로 ‘’을 가지고 말했다.
而皇優於帝, 其道不但可常行而已. 又更大於常,
’이란 임금은 ‘’라는 임금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그 가 단지 항상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항상 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故言墳也.
그러므로 ‘’이라고 말한 것이다.
此爲對例耳.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례對例가 될 뿐이다.
雖少有優劣, 皆是大道, 竝可常行.
비록 조금은 우열優劣이 있지만, 모두가 바로 대도大道이니, 아울러 항상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어孔子家語》 〈예운禮運〉에서 대도大道가 행해진 시대를 오제五帝의 시대로 여겼다.
然帝號同天, 名所莫加, 優而稱皇者, 以皇是美大之名, 言大於帝也.
그러나 제호帝號는 하늘과 같은 것이므로 이름이 여기에서 더 높을 수가 없으며, 이보다 더 우위優位여서 ‘’이라고 칭한 것은, ‘’이 바로 아름답고 큼을 이르는 명칭이니, ‘’보다 크다는 것을 말한다.
故後代措廟立主, 尊之曰皇, 生者莫敢稱焉.
그러므로 후대後代사당祠堂을 짓고 신주神主를 봉안하여 그를 높이기를 ‘’이라 하니, 살아 있는 사람은 감히 ‘’이라 칭하지 못한다.
而士庶祖父稱曰皇者, 以取美名, 可以通稱故也.
사서인의 조부를 ‘’이라 칭하는 것은 그 아름다운 이름을 취한 것이니, 통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案左傳有三墳‧五典, 不言墳是三皇之書, 典是五帝之書. 孔知然者.
상고하건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삼분三墳》과 《오전五典》이라고만 하고, ‘’은 바로 삼황三皇의 글이고 ‘’은 바로 오제五帝의 글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으나, 공안국孔安國은 그렇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案今堯典‧舜典, 是二帝二典, 推此二典而上, 則五帝當五典, 是五典, 爲五帝之書.
상고하건대 지금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바로 이제二帝이전二典이니, 이 이전二典을 미루어 올라가면 오제五帝오전五典에 해당하므로 여기서는 《오전五典》을 오제五帝의 글로 본 것이다.
今三墳之書, 在五典之上, 數與三皇相當, 墳又大名, 與皇義相類,
그리고 지금 《삼분三墳》의 글은 《오전五典》의 위에 놓여 있어 그 숫자가 삼황三皇과 서로 맞고, ‘’은 크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어서 ‘’의 뜻과 서로 같다.
故云三皇之書爲三墳.
그러므로 ‘삼황三皇의 글이 《삼분三墳》이 된다.’는 것이다.
孔君必知三皇有書者,
공안국孔安國은 반드시 삼황三皇에게 서적이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案周禮史職 “掌三皇‧五帝之書.” 是其明文也.
상고하건대 《주례周禮》 〈춘관春官 외사직外史職〉에 “삼황三皇오제五帝의 책을 맡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것을 밝히는 글이다.
鄭玄亦云 “其書卽三墳‧五典.”
정현鄭玄도 “그 책은 곧 《삼분三墳》과 《오전五典》이다.”라고 하였다.
但鄭玄以三皇無文, 或據後錄定.
다만 정현鄭玄삼황三皇에게 글이 없었다고 한 것은 혹 후록後錄에 의거해서 단정하였을 것이다.
孔君以爲書者, 記當時之事, 不可以在後追錄,
공안국孔安國이 ‘글’이라고 한 것은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이니, 뒤에 있는 것을 추록追錄할 수 없는 것이다.
若當時無書, 後代何以得知其道也.
만일 당시에 글이 없었다면 후대後代에 어떻게 그 를 알 수 있겠는가?
此亦孔君所據三皇有文字之驗耳.
이것이 또한 공안국孔安國이 의거한바 삼황三皇에게 문자文字가 있었다는 증험이다.
[疏]鄭玄注中候, 依運斗樞, 以伏犧‧女媧‧神農爲三皇,
정현鄭玄이 《중후中候》에 를 달 때에 《운두추運斗樞》에 의하여 복희伏犧여와女媧신농神農삼황三皇으로 삼았고,
又云 “五帝, 帝鴻‧金天‧高陽‧高辛‧唐虞氏.” 知不爾者,
또 “오제五帝좌목座目제홍씨帝鴻氏금천씨金天氏고양씨高陽氏고신씨高辛氏당우씨唐虞氏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꼽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겠다.
孔君旣不依緯, 不可以緯難之.
공안국孔安國은 이미 위서緯書에 의거하지 않았으니, 위서緯書를 가지고 힐난해서는 안 된다.
, 不見有女媧, 何以輒數.
또 《주역周易》의 흥작興作 조에 여와女媧가 있는 것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갑자기 그를 꼽았는가?
又鄭玄云 “女媧修伏犧之道, 無改作.” 則已上修舊者衆, 豈皆爲皇乎.
정현鄭玄이 “여와女媧복희伏犧를 닦고, 개작改作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에서 옛것을 닦은 자가 여럿이니, 어찌 모두 ‘’이 될 수 있겠는가?
旣不數女媧, 不可不取黃帝以充三皇耳.
이미 여와女媧를 꼽지 않는다면 황제黃帝를 취하여 삼황三皇에 채우지 않을 수 없다.
又鄭玄數五帝, 何以六人.
정현鄭玄오제五帝를 꼽으면서 왜 여섯 사람을 등장시켰는가?
或爲之說云 “德協五帝, 座不限多少,
혹자는 그를 위해 설명하기를 “오제五帝와 같으면 좌목座目을 다소로 한정하지 않는다.
故六人亦名五帝.” 若六帝何有五座.
그러므로 여섯 사람도 오제五帝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라고 하지만, 만일 육제六帝였다면 어찌 다섯 좌목座目만 있겠는가?
而皇指大帝, 所謂, 止一而已.
’은 ‘대제大帝’를 가리키니, 이른바 ‘요백보耀魄寶’는 하나일 뿐이다.
本自無三皇, 何云三皇.
본래 삼황三皇이 없는 것을 어떻게 삼황三皇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豈可三皇數人, 五帝數座,
어떻게 삼황三皇이 여러 사람이고, 오제五帝가 여러 좌목座目일 수 있겠는가?
二文舛互, 自相乖阻也.
두 대문의 글이 어긋나서 저절로 서로 어그러진 것이다.
其諸儒說三皇, 或數燧人, 或數祝融以配犧‧農者, 其五帝皆自軒轅, 不數少昊, 斯亦非矣.
제유諸儒삼황三皇을 말할 때, 혹은 수인燧人을 꼽거나 혹은 축융祝融을 꼽아 복희伏犧신농神農에 배열하고, 오제五帝의 경우는 모두 헌원軒轅으로부터 꼽고 소호少皞는 꼽지 않으니, 이것 또한 잘못이다.
燧人說者以爲伏犧之前, 據易曰 “.” 震, 東方, 其帝, 太昊.
수인燧人에 대해서는 설자說者복희伏犧 이전의 사람으로 여기는데, 《주역周易》에 의거하면, “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니, 동방東方이고, 그 태호太皡(伏犧氏)이다.
又云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 言古者制作莫先於伏犧, 何以燧人厠在前乎.
또 “옛날 포희씨包犧氏가 천하에 왕 노릇할 때”라고 하였으니, 옛날에 제작하는 일이 복희伏犧 때보다 앞선 시대가 없었는데, 어떻게 수인燧人포희씨包犧氏 앞에 둘 수 있겠는가?
又祝融及顓頊以下火官之號, 金天已上百官之號.
축융祝融전욱顓頊 이하는 화관火官의 호칭이고, 금천金天 이상은 백관百官의 호칭이었다.
以其徵五經, 無云祝融爲皇者,
오경五經을 다 뒤져보아도 축융祝融이 되었다는 말은 없다.
縱有, 不過如共工氏.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공공씨共工氏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였다.
, 乃與犧‧農‧軒‧摯相類,
공공씨共工氏는 물의 상서를 받았으니, 곧 복희伏犧신농神農헌원軒轅(帝嚳의 아들 소호少皞)와 서로 같은 점이 있다.
尙云霸其九州,
더구나 구주九州를 제패했다는 인물이 아닌가?
祝融本無此瑞, 何可數之乎.
축융祝融에게는 본래 이런 상서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를 꼽을 수 있겠는가?
[疏]左傳曰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소호少皞가 즉위할 때 마침 봉조鳳鳥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於月令, 又在秋享食, 所謂, 何爲獨非帝乎.
그리고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또 가을에 향사享祀를 거행한 것은 이른바 ‘백제白帝(少皞)의 방’에서 한 것이었는데, 어찌 그분만 ‘’가 아니겠는가?
故孔君以黃帝上數爲皇, 少昊爲五帝之首耳.
그러므로 공안국孔安國황제黃帝 이상은 ‘’으로 꼽고, 소호少皞오제五帝의 우두머리로 삼은 것이다.
若然, 案今世本帝繫及大戴禮五帝德幷家語宰我問, 太史公五帝本紀, 皆以黃帝爲五帝, 此乃史籍明文, 而孔君不從之者.
만일 그렇다면 상고해볼 때, 지금 《세본世本》 〈제계帝繫〉 및 《대대례大戴禮》 〈오제덕五帝德〉,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아문宰我問〉, 그리고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모두 황제黃帝오제五帝로 삼았으니, 이것은 바로 사적史籍의 증명된 글인데도 공안국孔安國은 그것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孟軻曰 “信書, 不如其無書,
맹가孟軻가 “글이란 글을 다 믿는다면 차라리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
吾於武成取二三策而已.” 言書以漸染之濫也.
나는 〈무성武成〉에서 두세 만 취할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글이 지나치게 세속에 점염漸染된 점을 말한 것이다.
孟軻已然, 況後之說者乎.
맹가孟軻가 이미 그러하였거늘, 하물며 후세에 말하는 자야 오죽하겠는가?
又帝繫‧本紀‧家語五帝德皆云少昊卽黃帝子靑陽, 是也.
또 〈제계帝繫〉‧〈오제본기五帝本紀〉‧《공자가어孔子家語》 〈오제덕五帝德〉에 모두 소호少皞가 곧 황제黃帝의 아들 청양靑陽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顓頊黃帝孫, 昌意子, 帝嚳高辛氏爲黃帝曾孫, 玄囂孫, 僑極子, 堯爲帝嚳子, 舜爲顓頊七世孫.
전욱顓頊황제黃帝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고,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황제黃帝증손曾孫현효玄囂의 손자이자 교극僑極의 아들이며, 제곡帝嚳의 아들이고, 전욱顓頊의 7세손世孫으로 되어있다.
此等之書, 說五帝而以黃帝爲首者, 原由世本. 經於暴秦, 爲儒者所亂.
이 같은 글들이 오제五帝를 말하면서 황제黃帝를 우두머리로 삼은 것은, 《세본世本》에서 연유되었는데, 포악한 나라를 거치면서 유자儒者들에 의해 혼란해졌다.
家語則王肅多私定, 大戴禮‧本紀出於世本, 以此而同.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경우는 왕숙王肅이 대부분 사적으로 정한 것이고, 《대대례大戴禮》와 〈오제본기五帝本紀〉의 기록은 《세본世本》에서 나온 것이라 이렇게 동일한 것이다.
蓋以少昊而下, 皆出黃帝, 故不得不先說黃帝,
대개 소호少皞 이하는 모두 황제黃帝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부득불 먼저 황제黃帝를 말한 것이다.
因此謬爲五帝耳.
이로 인하여 잘못 오제五帝를 삼았을 뿐이다.
亦由繫辭以黃帝與堯‧舜同事, 故儒者共數之焉.
또한 《주역周易》 〈계사繫辭〉에서 황제黃帝과 더불어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 유자儒者가 함께 꼽은 것이다.
[疏]孔君今者意以月令春曰太昊, 夏曰炎帝, 中央曰黃帝, 依次以爲三皇.
공안국孔安國은 지금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봄을 주재하는 제왕帝王을 ‘태호太皡’라 하고, 여름을 주재하는 제왕帝王을 ‘염제炎帝’라 하고, 중앙中央을 주재하는 제왕帝王을 ‘황제黃帝’라 한 것을 의중에 두고 그 차례에 의하여 ‘삼황三皇’을 삼았다.
又依繫辭, “先包犧氏王.
또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먼저 포희씨包犧氏가 왕 노릇을 하였다.
沒, 神農氏作.
그가 죽으니, 신농씨神農氏가 나왔다.
又沒, 黃帝氏作.” 亦文相次, 皆著作見於易, 此三皇之明文也.
또 그가 죽으니, 황제씨黃帝氏가 나왔다.”라는 식으로 말한 것에 의거하면 또한 글이 서로 차례를 이루고, 모두 저작著作한 일이 《주역周易》에 보이니, 이것이 ‘삼황三皇’의 증명된 글이다.
月令秋曰少昊, 冬曰顓頊, 自此爲五帝.
월령月令〉에서 가을을 주재하는 제왕帝王을 ‘소호少皞’라 하고, 겨울을 주재하는 제왕帝王을 ‘전욱顓頊’이라 하였으니, 이로부터 ‘오제五帝’가 되었다.
然皇帝是皇, 今言帝不云皇者, 以皇亦帝也, 別其美名耳.
그러나 황제黃帝는 바로 ‘’인데, 지금 ‘’라고 말하고 ‘’이라 이르지 않은 것은 ‘’도 역시 ‘’인데, 그 아름다운 이름을 구별했을 뿐이다.
太昊爲皇, 月令亦曰 “其帝太昊.”‧易曰 “帝出於震.” 是也.
태호太昊는 ‘’이 되었지만, 〈월령月令〉에서 또한 “그 태호太皡이다.”라고 하고, 《주역周易》에서 “진방震方에서 나왔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又軒轅之稱黃帝, 猶神農之云炎帝, 神農於月令爲炎帝, 不怪炎帝爲皇, 何怪軒轅稱帝.
헌원軒轅을 ‘황제黃帝’라 칭한 것은 신농神農을 ‘염제炎帝’라고 한 것과 같은데, 신농神農이 〈월령月令〉에서 염제炎帝가 되었으니, 염제炎帝가 ‘’이 되는 것이 괴이하지 않은데, 어찌 헌원軒轅이 ‘’로 칭해진 것을 괴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而梁主云 “書起軒轅, 同以燧人爲皇, 其五帝自黃帝至堯而止, 知帝不可以過五,
무제武帝가 “‘’는 헌원씨軒轅氏에서 시작하였으니 수인씨燧人氏와 함께 ‘’으로 꼽아야 하고, 오제五帝황제黃帝로부터 까지만 꼽아야 하니, 는 다섯이란 숫자를 넘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황三皇도 아니고 오제五帝도 아니니, 그저 삼왕三王과 함께 사대四代가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其言與詩之爲體, 不雅則風,
그의 말은 마치 《》의 체재體裁와 같아서 ‘’가 아니면 곧 ‘’인 격이다.
除皇已下不王則帝, 何有非王非帝, 以爲何人乎.
’을 제외한 이하는 ‘’이 아니면 ‘’인데, ‘’도 아니고 ‘’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되는 그러한 일이 어찌 있겠는가?
典‧謨皆云帝曰, 非帝如何.
에서 모두 ‘제왈帝曰’이라고 하였는데, 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原注
至于夏商周之書 雖設敎不倫이나 雅誥奧義 其歸一揆니라
의 서적에 이르러서는 비록 베푼 가르침은 과 같지 않지만, 아정雅正사고辭誥로서 심오深奧한 뜻이 담겨져 있으니, 그 귀취歸趣과 동일한 도리道理이다.
우천하호야禹天下號也
○‘’는 임금이 다스리던 나라 이름이다.
이금덕왕以金德王하니 삼왕지최선三王之最先이니라
금덕金德으로 노릇을 하였으니 삼왕三王의 가장 먼저였다.
탕천하호야湯天下號也
’은 탕왕湯王이 다스리던 나라 이름이다.
역호은亦號殷이니라
또한 ‘’이라고도 불렀다.
이수덕왕以水德王하니 삼왕지이야三王之二也니라
수덕水德으로 왕 노릇을 하였으니 삼왕三王의 두 번째이다.
문왕무왕유천하호야文王武王有天下號也
’는 문왕文王무왕武王이 다스리던 나라 이름이다.
이목덕왕以木德王하니 삼왕지삼야三王之三也니라
목덕木德으로 왕 노릇을 하였으니 삼왕三王의 세 번째이다.
고야告也 시야示也 심야深也 도야度也
의 뜻이고 의 뜻이며, ‘’는 깊다는 뜻이고, ‘’는 도리道理라는 뜻이다.
[疏]‘至于’至‘一揆’
상서서尙書序〉의 [至于]에서 [一揆]까지
○正義曰:旣皇書稱墳, 帝書稱典, 除皇與帝墳典之外, 以次累陳,
정의왈正義曰:이미 황서皇書를 ‘’이라고 칭하고, 제서帝書를 ‘’이라고 칭하였으니, 의 ‘’과 ‘’을 제외하고는 차례대로 누차 베풀어졌다.
故言‘至于’.
그러므로 ‘지우至于’라고 말한 것이다.
夏‧商‧周三代之書, 雖復當時所設之敎, 與皇及帝墳‧典之等不相倫類, 要其言皆是雅正辭誥, 有深奧之義, 其所歸趣與墳‧典一揆.
삼대三代의 서적에 이르러서는 비록 다시는 당시 베푼 가르침이 등과는 서로 같지 않지만, 요컨대 그 말은 모두 아정雅正사고辭誥로서 심오深奧한 뜻이 담겨져 있으니, 그 귀취歸趣과 동일한 도리道理이다.
明雖事異墳‧典而理趣終同, 故所以同入尙書, 共爲世敎也.
일은 비록 과 다르나, 이취理趣는 끝내 동일하므로 함께 《상서尙書》에 들어가 다같이 세교世敎가 된 까닭을 밝힌 것이다.
孔君之意, 以墳‧典亦是尙書, 故此因墳‧典而及三代.
공안국孔安國의 생각은, 도 역시 《상서尙書》라고 여겼기 때문에 여기에서 을 인하여 삼대三代에까지 언급하였을 것이다.
下云 “討論墳‧典, 斷自唐‧虞以下.” 是墳‧典亦是尙書之內, 而(小)[外]史偏掌之者, 以其遠代故也.
아래에서 “토론討論하되 에서부터 시작하여”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역시 《상서尙書》의 범위 안에 속하기 때문인데, 외사外史만을 맡은 것은 그 세대가 워낙 멀기 때문이었다.
此旣言墳‧典, 不依外文連類, 解八索‧九丘, 而言三代之書厠於其間者, 孔意以墳‧典是尙書, 丘‧索是尙書外物, 欲先說尙書事訖, 然後及其外物,
여기서 이미 이라 말하여, 외문外文에 의해 를 연결하지 않고, 《팔색八索》‧《구구九丘》를 해석하면서 삼대三代의 서적이 그 사이에 끼었다고 말한 것은, 공안국孔安國의 생각에 은 바로 《상서尙書》이고, 은 바로 《상서尙書》의 외물外物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먼저 《상서尙書》에 대한 일을 말하고 나서 그 외물外物을 언급하려고 한 것이다.
故先言之也.
그러므로 먼저 말한 것이다.
夏‧商‧周之書, 皆訓‧誥‧誓‧命之事, 言設敎者, 以此訓‧誥‧誓‧命, 卽爲敎而設, 故云設敎也.
의 서적은 모두 의 일에 대한 것인데, ‘설교設敎’라고 말한 것은 이 을 곧 가르침으로 삼아 베풀었기 때문에 ‘설교設敎’라고 이른 것이다.
[疏]言‘不倫’者, 倫, 類也.
[不倫] ‘’은 같은 부류라는 뜻이다.
三代戰爭, 不與皇帝等類.
삼대三代전쟁戰爭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니, 삼황三皇오제五帝와 격이 같지 않다.
若然, 五帝稱典, 三王劣而不倫, 不得稱典, 則三代非典, 不可常行, 何以垂法乎.
만일 그렇다면 오제五帝의 서적은 ‘’이라 칭할 수 있지만, 삼왕三王은 열약하여 오제五帝와 격이 같지 않아서 ‘’이라 칭할 수 없으니 삼대三代의 서적은 ‘’이 아니므로 항상 행할 수 없는데, 어떻게 법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然三王世澆, 不如上代, 故隨事立名,
그러나 삼왕三王의 세대는 효박淆薄하여 상대上代와 격이 같지 않기 때문에 일에 따라 이름을 세웠다.
雖篇不目典, 理實是典,
그래서 비록 은 ‘’으로 지목할 수 없지만, 가 충실한 것은 바로 ‘’이다.
故曰 “雅誥奧義, 其歸一揆.” 卽爲典之謂也.
그러므로 “아정雅正사고辭誥로서 심오深奧한 뜻이 담겨져 있으니 그 귀취歸趣과 동일한 도리道理이다.”라고 한 것이니, 곧 ‘’이 됨을 이른 것이다.
然三王之書, 惟無典‧謨,
그러나 삼왕三王의 서적에는 오직 는이 없을 뿐이다.
以外訓‧誥‧誓‧命‧歌‧貢‧征‧範, 類猶有八, 獨言‘誥’者, 以別而言之.
그 밖에 과 같은 여덟 가지 종류가 오히려 있지만, 유독 ‘’만을 말한 것은 구별해서 말하기 위한 것이다.
其類有八, 文從要約, 一誥兼焉.
그 종류가 여덟 가지나 있지만, 글이 요약된 것은 하나의 ‘’가 모두를 겸하기 때문이다.
何者. 以此八事, 皆有言以誥示,
왜냐하면 이 여덟 가지 일을 모두 말로 고시誥示할 수 있기 때문이다.
故總謂之誥.
그러므로 총칭하여 ‘’라 이른 것이다.
又言‘奧義’者, 指其言謂之誥, 論其理謂之義, 故以義配焉.
[奧義] 그 말을 가리켜 ‘’라고 이르고, 그 이치를 논하여 ‘’라고 이르기 때문에 ‘’로써 배정한 것이다.
言‘其歸一揆’, 見三代自歸於一, 亦與墳‧典爲一揆者, 況喩之義.
[其歸一揆]삼대三代가 스스로 귀일歸一함을 보이기 위한 것이고, 또한 과 더불어 동일한 도리라는 것은 비유하는 의미이다.
假譬人射, 莫不皆發, 志揆度於的, 猶如聖人立敎, 亦同揆度於至理,
사람들이 활 쏘는 것에 비유하면, 모두 발사하여 과녁을 맞히는 것을 목표로 삼으니, 이것은 마치 성인聖人입교立敎가 또한 지리至理에 귀착함을 목표로 삼는 것과 같다.
故云‘一揆’.
그러므로 ‘일규一揆’라고 한 것이다.
原注
是故 歷代寶之하여 以爲大訓이니라
이 때문에 역대에 보배로 여겨 대훈大訓을 삼은 것이다.
[疏]正義曰:顧命云 “越玉五重, 陳寶.”
정의왈正義曰:《상서尙書》 〈주서周書 고명顧命〉에 “오중五重으로 진열하고, 보물寶物을 진열하다.”라고 하였다.
卽以赤刀‧大訓在西序, 是寶之, 以爲大訓之文.
적도赤刀대훈大訓서서西序(서쪽 행랑)에 진열해놓고, 이것을 보배로 여겨 대훈大訓의 글로 삼았다.
저 〈고명顧命〉에서는 〈대훈大訓에 대하여〉 ‘’‧‘’를 가지고 주를 달았으니, 이 〈상서서尙書序〉와 서로 어금지금하다.
要六藝皆是, 此直爲書者指而言之,
요컨대 육예六藝(六經)가 다 이러한데, 이 〈상서서尙書序〉에서는 단지 ‘’만을 가리켜 말하였다.
故彼注亦然也.
그러므로 저 〈고명顧命〉의 또한 그렇게 단 것이다.
彼直周時寶之, 此知歷代者, 以墳‧典久遠, 周尙寶之, 前代可知,
저 〈고명顧命〉에서 단지 나라 때만 보배로 여겼을 뿐이나, 이 〈상서서尙書序〉에서 역대歷代라는 것을 앎은, 이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오히려 보배로 여긴 것이니, 전대前代라는 것을 알 수 있다.
故言歷代耳.
그러므로 ‘역대歷代’라고 말한 것이다.
原注
八卦之說 謂之八索이니 求其義也니라
팔괘설八卦說을 《팔색八索》이라 이르니, 그 뜻을 구하는 것이다.
九州之志 謂之九丘니라
구주지九州志를 《구구九丘》라 이른다.
聚也 言九州所有 土地所生 風氣所宜 皆聚此書也니라
’는 모으다라는 뜻이니, 구주九州가 소유한 토지土地의 생산과 풍기風氣의 알맞은 것을 모두 이 책에 모아놓았음을 말한다.
[疏]‘八卦’至‘此書也’
상서서尙書序〉의 [八卦]에서 [此書也]까지
○正義曰:以墳‧典因外文, 而知其丘‧索, 與墳‧典文連, 故連而說之,
정의왈正義曰:외문外文으로 인하여 의 글과 이어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어서 말하였다.
故總引傳文以充足己意, 且爲於下見與墳‧典俱被黜削, 故說而以爲首引.
그래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글을 모두 끌어다가 자기의 뜻을 충족시켰고, 또 아래에서 과 함께 삭출削黜당한 일을 보았기 때문에 설명을 하면서 맨 먼저 그 일을 끌어내게 된 것이다.
言爲論八卦事義之說者, 其書謂之八索. 其論九州之事所有志記者, 其書謂之九丘.
말하자면 팔괘八卦사의事義에 대해 논한 이 적힌 책은 《팔색八索》이라고 이르고, 구주九州의 일을 논할 때 기록을 남긴 책은 《구구九丘》라고 한 것이다.
所以名丘者, 以丘, 聚也, 言於九州當有土地所生之物, 風氣所宜之事, 莫不皆聚見於此書, 故謂之九丘焉.
’라고 이름을 붙인 까닭은 ‘’가 모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구주九州에는 응당 토지土地에서 생산되는 물자가 있고, 풍기風氣에는 알맞은 일이 있어서, 모두 이 책에 모아놓았기 때문에 《구구九丘》라고 한 것이다.
然八卦言之說, 九州言之志, 不同者, 以八卦交互相說其理, 九州當州有所志識, 以此而不同.
그러나 팔괘八卦에 대해서는 ‘’이라고 말하고, 구주九州에 대해서는 ‘’라고 말하여 동일하게 다루지 않은 것은, 팔괘八卦의 경우는 교대로 그 이치를 말하였고, 구주九州의 경우는 해당 마다 기록한 바가 있으니, 이 때문에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此索謂求索, 亦爲搜索.
이 ‘’은 ‘구색求索’을 이르니, 또한 ‘수색搜索’의 뜻으로 본 것이다.
以易八卦爲主,
그것은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위주로 했기 때문이다.
故易曰 “八卦成列, 象在其中矣. 因而重之, 爻在其中矣.” 又曰 “八卦相盪.”
그러므로 《주역周易》에서 “팔괘八卦을 이루니 이 그 가운데 있고, 각각 한 로 인하여 팔괘八卦를 차례로 거듭하니 가 그 가운에 있다.”라고 하고, 또 “팔괘八卦가 서로 섞여서”라고 하였다.
是六十四卦, 三百八十四爻, 皆出於八卦, 就八卦而求其理, 則萬有一千五百二十策, 天下之事得,
이는 64, 384가 모두 팔괘八卦에서 나오는 것이니, 팔괘八卦에 입각하여 그 이치를 구한다면 책수策數가 11,520이니, 천하의 모든 일이 얻어진다.
故謂之索, 非一索再索而已.
그러므로 ‘’이라고 이르는데, 한두 번만 구색할 뿐이 아니다.
此索, 於左傳, 亦或謂之, 說有不同, 皆後人失其眞理, 妄穿鑿耳.
이 ‘’자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또한 더러 ‘’라고 말하기도 하여 말에 동일하지 않은 점이 있으니, 모두 후인들이 그 진리眞理를 잃고 망령되이 천착한 탓이다.
[疏]其九丘, 取名於聚義, 多如山丘, 故爲聚.
구구九丘’는 ‘’자의 뜻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니, 많기가 산구山丘와 같기 때문에 의 뜻으로 본 것이다.
左傳或謂之九區, 得爲說當九州之區域, 義亦通也.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더러 구구九區라고 말한 것이 구주九州구역區域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 뜻이 또한 통한다.
又言‘九州所有’, 此一句與下爲總, 卽土地所生, 風氣所宜, 是所有也.
[九州所有] 이 한 는 아래에 있는 들과 한 문단을 이루니, 곧 ‘토지소생土地所生’과 ‘풍기소의風氣所宜’가 바로 〈구주九州의〉 ‘소유所有’인 것이다.
言‘土地所生’, 卽其動物‧植物, 大率土之所生, 不出此二者.
[土地所生] 곧 동물動物식물植物을 말하니, 대체적으로 토지土地소생所生은 이 두 가지(동물‧식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又云‘風氣所宜’者, 亦與土地所生大同.
[風氣所宜] 또한 토지소생土地所生과 대체로 같다.
何者. 以九州各有土地, 有生與不生, 由風氣所宜與不宜.
왜냐하면 구주九州에는 각각 토지土地가 있고, 생산함과 생산하지 못함은 풍기風氣의 알맞음과 알맞지 못한 바에 따르기 때문이다.
此亦職方‧禹貢之類.
이 또한 《주례周禮》 〈하관夏官 직방職方〉과 《상서尙書》 〈하서夏書 우공禹貢〉의 따위인 것이다.
別而言之, 土地所生, 若禹貢之厥貢‧厥篚也, 風氣所宜, 若職方其畜宜若干‧其民若干男‧若干女是也.
구별해서 말하면, ‘토지소생土地所生’은 이를테면 〈우공禹貢〉의 ‘궐공厥貢’‧‘궐비厥篚’와 같은 것이고, ‘풍기소의風氣所宜’는 이를테면 〈직방職方〉의 “그 축산畜産에 알맞은 것이 약간이고, 그 백성에 약간 명의 남자와 약간 명의 여자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上墳‧典及索, 不別訓之, 以可知, 故略之.
위에서 ‘’‧‘’ 및 ‘’에 대하여 따로 뜻풀이를 하지 않았으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뜻풀이를 생략한 것이다.
丘訓旣難, 又須別言九州所有已下, 故先訓之, 於下結義, 故云皆聚此書也.
’에 대한 뜻풀이는 일단 어려우니, 또한 모름지기 별도로 ‘구주소유九州所有’ 이하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뜻풀이를 하였고, 아래에서 뜻을 맺기 때문에 “모두 이 책에 모았다.”라고 한 것이다.
原注
春秋左氏傳曰 卽謂上世帝王遺書也니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나라 좌사左史 의상倚相은 《삼분三墳》‧《오전五典》‧《팔색八索》‧《구구九丘》를 읽을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상세上世 제왕帝王유서遺書를 이른 것이다.
좌사左史사관재좌史官在左니라 의상倚相 초영왕시사관야楚靈王時史官也니라
좌사左史는 임금의 왼쪽에 있는 사관史官이고, 의상倚相 영왕靈王 때의 사관史官이다.
[疏]‘春秋’至‘遺書也’
상서서尙書序〉의 [春秋]에서 [遺書也]까지
○正義曰:以上因有外文言墳‧典‧丘‧索而謂之, 故引成文以證結之.
정의왈正義曰:위에서 외문外文에 대해 말한 것이 있음을 인하여 일렀기 때문에 성문成文을 이끌어서 증거를 대며 문단을 맺은 것이다.
此昭十二年左傳楚靈王見倚相趨過, 告右尹子革以此辭. 知倚相是其名字, 蓋爲太史, 而主記左動之事, 謂之左史.
이것이 소공昭公 12년 조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영왕靈王의상倚相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우윤右尹 자혁子革에게 이 말을 가지고 알렸으니, 의상倚相은 바로 그의 이름자임을 알겠으며, 아마 그는 태사太史가 되어 주로 임금이 왼쪽에서 움직이는 일을 기록하므로 ‘좌사左史’라고 일렀을 것이다.
不然, 或楚俗與諸國不同, 官多以左右爲名, 或別有此左史乎.
그렇지 않으면 혹시 나라 풍속이 제국諸國의 풍속과 달라, 벼슬이 많아서 를 가지고 이름했는지, 혹은 별도로 이와 같은 좌사左史를 두었는지 모르겠다.
彼子革答王云 “倚相, 臣問祈招之詩而不知, 若問遠焉, 其焉能知之.” 彼以爲倚相不能讀之.
자혁子革에게 답하기를 “의상倚相이 〈기초祈招〉의 에 대해 물었더니 알지 못하였는데, 만일 더 먼 시대의 것을 물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저 자혁子革의상倚相이 읽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此云能者, 以此據左傳成文, 因王言而引之.
그런데 여기서 읽을 수 있다[能]라고 한 것은 이것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성문成文으로 증거를 댔는가 하면, 그것도 이 읽을 수 있다고 한 말을 인하여 끌어댄 것이다.
假不能讀, 事亦無妨,
가령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일에는 역시 해로울 것이 없다.
況子革欲開諫王之路,
더구나 자혁子革에게 간하는 길을 열어놓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던가?
倚相未必不能讀也.
의상倚相은 반드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言此墳‧典‧丘‧索, 卽此書是謂上世帝王遺餘之書也.
이때 을 말하였으니, 곧 이 글은 바로 상세上世 제왕帝王이 남긴 글을 이른 것이다.
以楚王論時, 已在三王之末, 故云遺書.
초왕楚王이 논한 시기는 이미 삼왕三王의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유서遺書’라고 한 것이다.
其丘‧索知是前事, 亦不知在何代,
은 곧 예전의 일이란 것은 알겠지만, 역시 어느 세대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故直總言帝王耳.
그러므로 단지 총체적으로 ‘제왕帝王’이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原注
先君孔子 生於周末하사 覩史籍之煩文하고 懼覽不一이시니라
선군先君 공자孔子께서 나라 말기에 태어나 사적史籍번문煩文을 살펴보고 보는 사람들이 동일하지 않게 볼까 두려워하셨다.
遂乃定禮樂하시고 明舊章하시고 刪詩爲三百篇하시고 約史記而修春秋하시고 讚易道하여 以黜八索하시고 述職方하여 以除九丘하시다
그래서 결국 을 정하고 구장舊章을 밝히고 산삭刪削하여 3백 편으로 만들고 사기史記를 요약하여 《춘추春秋》를 수찬하고 역도易道찬좌讚佐하여 《팔색八索》을 내치고 〈직방職方〉을 술명述明하여 《구구九丘》를 제거하셨다.
[疏]‘先君’至‘九丘’
상서서尙書序〉의 [先君]에서 [九丘]까지
○正義曰:旣結申帝王遺書, 欲言孔子就而刊定.
정의왈正義曰:이미 끝을 맺고 나서 ‘제왕帝王유서遺書’라고 거듭 거론한 것은, 공자孔子께서 거기에 입각하여 간정刊定하신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孔子世家云 “安國是孔子十一世孫而上尊先祖, 故曰先君.”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안국孔安國은 바로 공자孔子의 11세손世孫인데 선조先祖를 높이기 때문에 ‘선군先君’이라 했다.”라고 하였다.
穀梁以爲 “魯襄公二十一年冬庚子孔子生.”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는 “ 양공襄公 21년(B.C. 552) 겨울 10월 경자일庚子日공자孔子가 태어났다.”라고 하였고,
左傳 “哀公十六年夏四月己丑孔子卒.” 計以周靈王時生, 敬王時卒,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애공哀公 16년(B.C. 479) 여름 4월 기축일己丑日공자孔子가 작고했다.”라고 하였으니, 나라 영왕靈王 때에 태어나고 경왕敬王 때에 작고하신 것으로 계산하였다.
故爲周末.
그러므로 나라 말기에 해당된다.
上云文籍, 下云滅先代典籍, 此言史籍.
위에서는 ‘문적文籍’이라 하고, 아래에서는 선대先代전적典籍을 없앴다고 하고, 여기서는 ‘사적史籍’이라고 하였다.
籍者, 古書之大名.
’이란 고서古書의 대체적인 명칭이다.
由文而有籍, 謂之文籍, 因史所書, 謂之史籍, 可以爲常故, 曰典籍, 義亦相通也.
으로 말미암아 ‘’을 둔 것이면 ‘문적文籍’이라 이르고, 로 말미암아 적은 것이면 ‘사적史籍’이라 이르며, 항상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에 ‘전적典籍’이라 이른다고 하니, 뜻이 또한 서로 통한다.
但上因書契而言文, 下傷秦滅道以稱典.
다만 위에서는 서계書契를 인하여 ‘’이라 말하였고, 아래에서는 나라가 를 멸한 것을 상심하여 ‘’이라고 칭하였을 뿐이다.
於此言史者, 不但義通上下, 又以此史籍, 不必是先王正史, 是後代好事者作,
그런데 여기에서 ‘’라고 말한 것은 다만 뜻이 위아래로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이 ‘사적史籍’은 반드시 선왕先王정사正史가 아니고 바로 후대後代호사자好事者가 지은 것이다.
以此懼其不一,
그래서 그것이 동일하지 않은 점을 두려워하셨다.
故曰 “蓋有不知而作之者,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혹시라도 알지 못하면서 잘못 행동하는 이가 있는가?
我無是也.”
나는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신 것이다.
先言‘定禮‧樂’者, 欲明孔子欲反於聖道以歸於一,
먼저 “을 정했다.”라고 말함은 공자孔子께서 성도聖道로 돌이켜 귀일歸一시키고자 하신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故先言其舊行可從者.
그러므로 그 따를 만한 구행舊行을 먼저 말하였다.
修而不改曰定, 就而減削曰刪, 準依其事曰約, 因而佐成曰贊, 顯而明之曰述, 各從義理而言.
수찬만 하고 고치지 않는 것을 ‘’이라 하고, 그에 입각해서 감삭減削하는 것을 ‘’이라 하고, 그 일에 준의準依하는 것을 ‘’이라 하고, 따라서 도와 이루는 것을 ‘’이라 하고, 드러내 밝히는 것을 ‘’이라 하니, 각각 의리義理를 따라 말한 것이다.
獨禮‧樂不改者, 以禮‧樂聖人制作, 己無貴位, 故因而定之.
유독 만을 고치지 않은 것은, 성인聖人이 제작한 것일 뿐더러, 자기에게 〈을 제작할 만한〉 귀위貴位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정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疏]又云‘明舊章’者, 卽禮‧樂‧詩‧易‧春秋是也.
[明舊章] 곧 《》‧《》‧《》‧《》‧《춘추春秋》가 바로 이것이다.
以易道‧職方與黜八索‧除九丘相對, 其約史記, 以刪詩‧書爲偶, 其定禮‧樂文孤, 故以明舊章配之, 作文之體也.
역도易道’와 〈직방職方〉은 《팔색八索》을 내침이랑 《구구九丘》를 제거함과 서로 를 하였고, 사기史記를 요약함은 《》‧《》를 산삭刪削함을 가지고 대우對偶를 하였으나, 을 정한 것은 글이 짝이 없기 때문에 구장舊章을 밝힌 것을 가지고 짝을 지었으니, 작문作文체례體例인 것이다.
易亦是聖人所作, 不言定者, 以易非如禮‧樂, 人之行事, 不須云定.
》 또한 성인聖人의 저작인데 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은 처럼 사람의 행사가 아니므로 모름지기 했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又因而爲作十翼, 故云贊耳.
또 인하여 십익十翼을 지었기 때문에 했다고 했을 뿐이다.
易文在下者, 亦爲黜八索與除九丘相近故也.
》에 대한 글을 아래에 둔 것은 또한 《팔색八索》을 내침이 《구구九丘》를 제거함과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爲文之便, 不爲義例.
글을 편리하게 쓰기 위한 것이지, 의례義例를 삼은 것은 아니다.
孔子之修六藝年月, 孔無明說.
공자孔子께서 육예六藝를 기술하신 연월年月에 대해서는 공안국孔安國이 분명하게 말한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