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成王既崩, 事皆聽於冢宰, 自非召公無由發命, 知‘伯相’, 即召公也.
上言‘太保命仲桓’, 此改言‘伯相’者, 於此所命
多, 非是國相, 不得大命諸侯, 故改言‘伯相’, 以見政皆在焉.
‘於丁卯七日癸酉’, 則王乙丑崩, 於
矣. 於九日始傳顧命, 不知其所由也.
鄭
大夫已上
, 皆以死之來日數, 天子七日而殯, 於死日爲八日, 故以癸酉爲殯之明日.
今所命者, 皆爲喪
, 知‘命士須材’者, “召公命士致材木, 須待以供喪用”, 謂椁與明器, 是喪之雜用也.
案士喪禮將葬, 筮宅之後, 始作椁及明器. 此既殯, 即須材木者, 以天子禮大, 當須預營之.
故禮記云 “
, 可爲棺椁者斬之.” 是與士禮不同.
疏
○正義曰:禮記祭統云 “
, 樂吏之賤者也.” 是賤官有名爲狄者, 故以狄爲下士.
喪大記復魄之禮云 “狄人設階”, 是喪事使狄, 與此同也.
釋宮云 “牖戶之間, 謂之扆.” 李巡曰 “謂牖之東戶之西爲扆.” 郭璞曰 “窗東戶西也. 禮云 ‘斧, 扆者’, 以其所在處名之.”
郭璞又云 “禮有斧扆, 形如屏風, 畫爲斧文, 置於扆地, 因名爲扆.”
是先儒相傳, 黼扆者, 屏風, 畫爲斧文, 在於戶牖之間.
考工記云 “畫繢之事, 白與黑謂之黼.” 是用白黑畫屏風置之於扆地, 故名此物爲‘黼扆’.
上文言“出綴衣於庭”, 此復設黼扆
幄帳者, 象王平生時所爲也.
經於四坐之上言 “設黼扆․綴衣”, 則四坐皆設之.
不言‘命’者, 上云‘命士’, 此蒙‘命’文. 設四坐及陳寶玉․兵器與輅車, 各有所司, 皆是相命, 不言所命之人, 從上省文也.
疏
○정의왈正義曰:여기서부터 이하 ‘상용喪用을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장차 고명을 전하기 위하여 〈병풍이나 자리 등을〉 포설布設하는 일이다.
네 좌석은 왕王이 거처하던 곳이고, 기물器物은 나라의 보배로운 것이고, 거로車輅는 왕王이 타던 것인데, 이를 진열하는 것은 나라를 빛내기 위한 것이고, 또한 고명顧命을 중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병기兵器를 가지고 문 안의 당堂 계단에 선 것은 예측 못할 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국가의 위용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성왕成王이 이미 승하함에 일들을 모두 총재冢宰에게 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자연 소공召公이 아니면 명령을 낼 데가 없으므로, ‘백상伯相’이 곧 소공召公이란 점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왕숙王肅은 “소공召公이 두 백伯 〈중 한 백伯이〉 되어 왕실王室을 도왔기 때문에 ‘백상伯相’이라 했다.”라고 하였다.
위에서는 ‘백상伯相’으로 고쳐서 말한 것은, 여기에서 명할 일이 많으니, 국상國相이 아니면 크게 제후諸侯에게 명할 수 없기 때문에 ‘백상伯相’으로 고쳐 말해서 정사政事가 모두 〈이 백상伯相에게〉 있음을 보인 것이다.
‘왕王이 을축일乙丑日에 승하하였으니, 오늘이 벌써 9일째다. 9일 만에 비로소 고명顧命을 전하는 꼴이 되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정현鄭玄은 “계유일癸酉日은 아마 대렴大斂을 한 그 이튿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은, 대부大夫 이상의 빈렴殯斂은 모두 죽은 다음날을 헤아려 천자天子는 7일 만에 빈렴殯斂하여 죽은 날에서 8일째가 되기 때문에 계유일癸酉日을 빈렴殯斂한 그 다음 날로 여긴 것이다.
공안국孔安國은 전傳을 달지 않았지만 꼭 정현鄭玄의 설說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須’는 대待(대기)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지금 명한 바는 모두 상사喪事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공召公이 사士에게 명하여 재목材木을 구해와 대기했다가 상용喪用에 제공하도록 했다.”라는 점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니, 곽槨과 명기明器가 바로 상사喪事의 잡용雜用임을 이른 것이다.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를 상고하면, 장차 장사 지내려 하거든 무덤자리를 점쳐서 〈좋은 자리를 잡은〉 뒤에 비로소 곽槨과 명기明器를 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이미 빈렴殯斂을 하고 나서 곧 재목材木을 구해 대기하는 것이니, 천자天子의 장례는 방대하기 때문에 마땅히 미리 경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기禮記≫ 〈단궁檀弓 하下〉에 “우인虞人이 백사百祀의 나무로서 관곽棺槨을 만들 만한 것을 베어서 올리게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례士禮(의례儀禮)≫와 같지 않다.
고씨顧氏(고표顧彪)도 “사士에게 명하여 장사 지낼 곽槨의 재목을 이바지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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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예기禮記≫ 〈제통祭統〉에 “‘적狄’이란 것은 악리樂吏의 천賤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천관賤官 중에 이름이 ‘적狄’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적狄을 하사下士로 삼은 것이다.
〈상대기喪大記〉의 복백復魄(초혼招魂)하는 예禮에 “적인狄人이 사다리를 설치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상사喪事에서 적인狄人을 부리는 것이 여기서와 같다.
≪이아爾雅≫ 〈석궁釋宮〉에 “들창과 지게문 사이를 ‘의扆’라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이순李巡은 “들창의 동쪽과 지게문의 서쪽을 ‘의扆’라 이른다.”라고 하고, 곽박郭璞은 “창문의 동쪽과 지게문의 서쪽이다. ≪예禮≫에서 말한 ‘부의斧扆’란 그 소재처를 가지고 이름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곽박郭璞은 또 “≪예禮≫에 ‘부의斧扆’란 것이 있어 형상이 병풍과 같은데, 도끼무늬를 그려 의지할 곳에 두고 따라서 이름을 ‘의扆’라 했다.”라고 하였다.
이는 선유先儒가 서로 전하는 것이고, ‘보의黼扆’란 것은 병풍屏風인데 도끼무늬를 그려 지게문과 들창 사이에 두었던 것이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그림 그리는 일은 백색과 흑색을 ‘보黼’라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백색과 흑색으로 병풍을 그려서 의지할 곳에 두었기 때문에 이 물건을 명명하여 ‘보의黼扆’라 한 것이다.
윗글에서 “철의綴衣를 뜰에 내놓는다.”라고 말하였으니, 여기에서 다시 보의黼扆와 악장幄帳을 설치한 것은 왕이 평소 때 하던 것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경문經文에서 네 자리의 위에 “보의黼扆와 철의綴衣를 설치했다.”라고 말하였으니, 네 자리에 모두 〈보의黼扆와 철의綴衣를〉 설치한 것이다.
이 경문經文에서 이른바 ‘백상伯相이 적狄에게 명하여 설치하게 한 것이다.
‘명命’을 말하지 않은 것은 위에서 ‘명사命士’라 말하였으니, 여기서는 그 ‘명命’자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네 자리를 설치하고 보옥寶玉과 병기兵器와 노거輅車를 진열하는 데는 각각 맡는 기관이 있지만 모두 상相이 명하므로 명한 사람을 말하지 않은 것이니, 위를 따라서 글을 생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