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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正義(6)

상서정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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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五月丁亥 하사 至于宗周하시다
[傳]周公歸政之明年 淮夷奄又叛하니 魯征淮夷하여 作費誓하고 王親征奄하여 滅其國하고 五月還至鎬京이라
[疏]○傳‘周公’至‘鎬京’
○正義曰:以洛誥言歸政之事, 多士之篇次之, 多士是歸政明年之事, 故知此篇亦歸政明年之事. 事猶不明, 故取費誓爲證.
以成政之序言 “成王東伐淮夷.” 費誓之篇言 “淮夷․徐戎竝興.”
俱言‘淮夷’, 明是一事, 故言“魯征淮夷, 作費誓, 王親征奄, 滅其國.” 以明二者爲一時之事也.
上序言“成王伐淮夷”, 而此傳言 “魯征淮夷”者, 當時淮夷徐戎竝起爲亂.
魯與二國相近, 發意欲竝征二國, 故以二國誓眾.
但成王恐魯不能獨平二國, 故復親往征之.
所以成王政之序與費誓之經, 竝言‘淮夷’, 爲此故也.
傳言 “五月還至鎬京”, 明此‘宗周’, 即鎬京也. 禮記祭統 衛孔悝之鼎銘云 “即宮於宗周.” 彼‘宗周’, 謂洛邑也.
是洛邑亦名宗周, 知此是鎬京者. 成王以周公歸政之時, 暫至洛邑, 還歸處西都, 鎬京是王常居, 知“至于宗周”, 至鎬京也.
且此與周官同時事也.周官序云 “還歸在豐.” 經云 “歸于宗周.” 豐․鎬相近, 即此‘宗周’, 是鎬京也.


5월 정해일丁亥日성왕成王나라로부터 와서 종주宗周(호경鎬京)에 이르시었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정권을 돌려준 이듬해에 회이淮夷나라가 또 반역을 하니, 노후魯侯회이淮夷를 정벌하여 〈비서費誓〉를 짓고, 은 친히 나라를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5월에 돌아와 호경鎬京에 이르렀다.
의 [주공周公]에서 [호경鎬京]까지
정의왈正義曰:〈낙고洛誥〉가 정권을 돌려준 일을 말하였고, 〈다사多士〉편이 다음에 놓였는데 〈다사多士〉가 바로 정권을 돌려준 다음해의 일이기 때문에 이 편 또한 정권을 돌려준 이듬해의 일이란 점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일이 오히려 분명치 않기 때문에 〈비서費誓〉를 취해서 입증을 한 것이다.
성이정成以政〉의 서서書序에 “성왕成王이 동쪽으로 회이淮夷를 쳤다.”라고 말하고, 〈비서費誓〉편에 “회이淮夷서융徐戎이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여
모두 ‘회이淮夷’를 말한 것이 이 한 가지 일을 밝혔기 때문에 “노후魯侯회이淮夷를 정벌하여 〈비서費誓〉를 짓고, 은 친히 나라를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했다.”라고 말하여 두 가지는 한 때의 일임을 밝혔다.
윗 서문에서 “성왕成王회이淮夷를 쳤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에서는 “노후魯侯회이淮夷를 정벌했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에 회이淮夷서융徐戎이 함께 일어나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나라가 두 나라와 서로 가까웠으므로 생각을 짜내어 두 나라를 함께 치려고 했기 때문에 두 나라를 〈칠 것을〉 가지고 군사들에게 맹서하였던 것이다.
다만 성왕成王노후魯侯가 능히 홀로 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할까 싶었기 때문에 다시 친히 가서 정벌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성왕정成王政〉의 서문과 〈비서費誓〉의 경문經文이 함께 ‘회이淮夷’를 말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에서 “5월에 돌아와 호경鎬京에 이르렀다.”라고 말한 것은 이 ‘종주宗周’가 곧 호경鎬京임을 밝힌 것이다.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나라 공회孔悝정명鼎銘에 ‘종주宗周의 거처에도 수행하여’라 했다.”라고 하였는데, 저 종주宗周낙읍洛邑을 이른 것이다.
낙읍洛邑 또한 종주宗周를 명칭한 것이니, 여기가 바로 호경鎬京이란 점을 〈공안국이〉 알았던 것이다. 성왕成王주공周公이 정권을 돌려줄 때에 잠시 낙읍洛邑에 이르렀다가 돌아와 서도西都에 처하였으니, 호경鎬京이 바로 이 항시 거처한 곳이었으므로 “〈돌아와〉 종주宗周에 이르렀다.”라는 것은 호경鎬京에 이르렀음을 〈공안국이〉 알았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주관周官〉과 더불어 동시의 일이다. 〈주관周官〉의 서서書序에 “돌아와 풍읍豐邑에 계셨다.”라고 하고, 경문經文에 “종주宗周로 돌아왔다.”라고 하였는데, 풍읍豐邑호경鎬京은 서로 가까웠으니, 곧 여기의 ‘종주宗周’는 바로 호경鎬京인 것이다.


역주
역주1 王來自奄 : 蔡傳에서 “成王이 집정한 다음해에 商나라와 奄나라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므로 成王이 정벌하여 멸망시킨 것이다.[成王卽政之明年 商奄又叛 成王征滅之]”라고 풀이한 데 대하여 袁仁(≪尙書砭蔡編≫)은 “蔡傳의 풀이가 잘못된 것이다. 武王 때에 周公이 紂를 誅伐하고 奄나라를 정벌한 지 3년 만에 奄나라 임금을 토죄하고 그 땅에 곧 伯禽을 봉하여 魯나라를 삼았다. 成王 初年에 奄나라에 이르게 된 까닭은 武庚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周公은 殷나라의 遺民이 淮夷․徐戎과 합세할까 염려했기 때문에 成王을 받들고 奄나라에 가서 전략을 편 지 3년 만에 東方이 비로소 평정되었다. 이것은 곧 周公이 東征한 일이니, 〈東山詩〉에서 ‘3년을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多士〉에서 일컬은 ‘‘옛날 朕이 奄나라로부터 올 적에 당신들 네 나라의 백성들 목숨에 대한 형벌을 크게 낮추어 〈살려주었다.〉’는 것은 대개 管․蔡․霍 및 殷나라만을 가리켰을 뿐, 奄나라는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당시 奄나라가 이미 魯나라가 되었거늘, 어떻게 다시 반역을 할 수 있겠는가.[非也 武王時 周公誅紂伐奄 三年討其君 而其地即封伯禽爲魯國矣 成王初年 所以至奄者 爲武庚叛也 周公懼殷遺民與淮夷徐戎合勢 故奉成王至奄 經略三年而東方始定 即周公東征事 而東山詩稱三年不歸者是也 多士所稱昔朕来自奄 大降爾四國民命者 蓋指管蔡霍及殷耳 非兼奄也 當時奄已爲魯 安得復叛乎]”라고 하였고, 顧炎武(≪日知錄≫ 〈王來自奄〉)는 “孔傳에서 ‘奄나라가 재차 배반했다.’고 한 것은 篇의 先後에 얽매어 억지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至于再 至于三’에 대한 풀이는 마땅히 蔡氏의 説을 따라야 한다.[孔傳以爲奄再叛者 拘於篇之先後 而强爲之説 至于再至于三 當從蔡氏説]”라고 하였다.
역주2 (以)[王] : 저본에는 ‘以’로 되어 있으나, 宋刊 單疏本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之) : 저본에는 있으나, “毛本에는 ‘之’자가 없다. 살펴보건대 ‘之’자는 衍文이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之’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상서정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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