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文王功業稍高, 王兆漸著, 殷之朝廷之臣, 始畏惡周家. 所以畏惡之者, 以周人伐而勝黎邑故也.
殷臣祖伊見周克黎國之易, 恐其終必伐殷, 奔走告受, 言殷將滅. 史敍其事, 作西伯戡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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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易繫辭云 “無咎者, 善補過也.” 則‘咎’是過之別名. 以彼過而憎惡之, 故‘咎’爲惡也.
“以其勝黎, 所以見惡.” 釋其見惡之由, 是周人勝黎之後始惡之. 詩毛傳云 “乘, 陵也.” 乘駕是加陵之意, 故‘乘’爲勝也.
鄭玄云 “紂聞文王斷虞芮之訟, 又三伐皆勝, 而始畏惡之.” 所言據書傳爲說,
伏生書傳云 “文王受命, 一年斷虞芮之質, 二年伐邘, 三年伐密須, 四年伐犬夷, 五年伐耆, 六年伐崇, 七年而崩.”
耆, 卽黎也. 乘黎之前, 始言惡周, 故鄭以伐邘‧伐密須‧伐犬夷三伐皆勝, 始畏惡之.
武成篇文王‘誕膺天命’, 九年乃崩, 則伐國之年, 不得如書傳所說, 未必見三伐皆勝始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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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經云“奔告于王.” 王無謚號, 故序言‘受’以明之. 此及泰誓‧武成皆呼此君爲‘受’, 自外書傳皆呼爲‘紂’.
受卽紂也, 音相亂, 故字改易耳. 殷本紀云 “帝乙崩, 子辛立, 是爲帝辛, 天下謂之紂.”
鄭玄云 “紂, 帝乙之少子, 名辛. 帝乙愛而欲立焉, 號曰受德, 時人傳聲轉作紂也.”
史掌書, 知其本, 故曰‘受’, 與孔大同. 謚法云 “殘義損善曰紂.” 殷時未有謚法, 後人見其惡, 爲作惡義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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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鄭玄云 “西伯, 周文王也. 時國於岐, 封爲雍州伯也. 國在西, 故曰西伯.”
王肅云 “王者中分天下, 爲二公總治之. 謂之二伯, 得專行征伐. 文王爲西伯, 黎侯無道, 文王伐而勝之.”
兩說不同, 孔無明解. 下傳云 “文王率諸侯以事紂.” 非獨率一州之諸侯也.
論語稱‘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謂文王也. 終乃三分有二, 豈獨一州牧乎.
且言‘西
’對東爲名, 不得以國在西而稱‘西伯’也, 蓋同王肅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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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黎國, 漢之上黨郡壺關所治黎亭是也. 紂都朝歌, 王圻千里, 黎在朝歌之西, 故爲‘近王圻之諸侯’也.
鄭云 “入紂圻內.” 文王猶尚事紂, 不可伐其圻內. 所言‘圻內’, 亦無文也.
傳
受가 바로 紂이니, 음이 서로 어지럽혀진 것이다. 帝乙의 아들로서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는데, 暴虐無道하였다.
○傳에는 “受는 바로 紂이니, 음이 서로 어지럽혀진 것이다.”라고 하고, 馬融은 “受는 읽기를 ‘紂’라 한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婦人의 말을 잘 받아들이기(듣기) 때문에 號를 ‘受’라 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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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周易≫ 〈繫辭傳 上〉에 “‘無咎’란 허물로 〈결손이 된 부분을〉 잘 보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은즉 ‘咎’는 바로 過(허물)의 딴 이름이다. 저 사람의 허물로 인하여 미워했기 때문에 ‘咎’를 惡의 뜻으로 여긴 것이다.
‘〈周나라가〉 黎나라를 쳐서 승리했기 때문에 〈殷나라에게〉 밉보이게 된 것이다.”라고 한 것은 그 밉보인 이유를 풀이한 것이니, 이는 周나라 사람이 黎나라를 쳐서 승리한 뒤에 비로소 미워한 것이다. ≪詩經≫의 毛傳에 “乘은 陵(능멸)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乘駕’는 바로 능멸을 가하는 뜻이기 때문에 乘을 勝의 뜻으로 여긴 것이다.
鄭玄은 “紂는 文王이 虞나라와 芮나라의 송사를 결단하고, 또 세 번 쳐서 모두 승리한 것을 듣고서 비로소 두려워하고 미워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은 ≪書傳≫에 의거해서 말한 것인데,
伏生의 ≪書傳≫에 “文王이 천명을 받은 지 1년 만에 虞나라와 芮나라의 송사를 결단하고, 2년 만에 邘나라를 치고, 3년 만에 密須國을 치고, 4년 만에 犬夷國을 치고, 5년 만에 耆나라를 치고, 6년 만에 崇나라를 치고, 7년 만에 서거했다.”라고 하였으니,
耆나라는 곧 黎나라이다. 黎나라를 쳐서 승리하기 전에 비로소 周나라를 미워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鄭玄이 ‘邘나라를 치고 密須國을 치고 犬夷國을 쳐서 세 번의 정벌에서 모두 승리한 것을 가지고 비로소 두려워하고 미워했다.’라고 한 것이다.
〈武成〉편에 “〈文王이〉 ‘크게 天命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문왕이〉 9년 만에 서거하였다. 그렇다면 나라를 친 연도가 ≪書傳≫에서 말한 바와 같지 않으니, 반드시 세 번 쳐서 모두 승리한 것을 보고 비로소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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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經에 “달려가 王에게 고하였다.”라고 했으니, 王에게 謚號가 없었기 때문에 書序에서 ‘受’라고 말해서 밝힌 것이다. 여기의 書序 및 〈泰誓〉‧〈武成〉에서는 모두 이 임금을 ‘受’라고 불렀고, 이 밖의 書傳에서는 모두 ‘紂’라고 불렀다.
受가 곧 紂인데, 音이 서로 어지럽혀졌기 때문에 글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史記≫ 〈殷本紀〉에 “帝乙이 서거하자 아들 辛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帝辛인데, 천하에서 그를 ‘紂’라 일렀다.”라고 하였다.
鄭玄은 “紂는 帝乙의 少子로 이름은 辛이다. 帝乙이 그를 아끼어 왕으로 세우려고 하여 號를 ‘受德’이라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전하면서 聲音이 변하여 ‘紂’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官은 서적을 관장하니, 그 〈號의〉 기원을 알았기 때문에 ‘受’라고 한 것이니, 孔安國과 대체로 같다. ≪謚法≫에 “義를 잔해하고 善을 손상하는 것을 ‘紂’라 한다.”라고 하였지만, 〈諡法은 周나라에서 만든 것이고〉 殷나라 때에는 아직 謚法이 없었으니, 후세 사람이 그의 惡을 보고 惡의 뜻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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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鄭玄은 “西伯은 周나라 文王이다. 이때 岐山에 國都를 두고 雍州伯에 봉해졌다. 나라가 서쪽에 있기 때문에 ‘西伯’이라 했다.”라고 하였고,
王肅은 “王者가 天下를 둘로 똑같게 나누어 二公을 삼아 총괄해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二伯’이라 이르는데, 征伐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文王이 西伯이 되었을 때, 黎나라 제후가 무도하였기 때문에 文王이 쳐서 승리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두 사람의 말이 같지 않고, 孔安國은 분명한 해설이 없다. 아래 傳에서 “文王이 諸侯를 거느리고 紂를 섬겼다.”라고 하였으니, 한 州의 諸侯만을 거느린 것이 아니었다.
≪論語≫ 〈泰伯〉에 “천하의 3분의 2를 가졌으면서도 殷나라를 복종하여 섬겼다.”라고 하였으니, 文王을 이른다. 끝내 3분의 2를 가졌는데 어찌 유독 한 州牧일 뿐이겠는가.
‘西伯’이란 말은 동쪽을 상대해서 명명한 것이고, 나라가 서쪽에 있다고 해서 ‘西伯’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아마 王肅의 말과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