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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3)

상서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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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 제9권 商書
盤庚上 第九
孔氏 傳 孔穎達 疏
盤庚五遷하니 將治亳殷이라
盤庚이 다섯 번째 도읍을 옮겼는데, 장차 〈거주지를 옮기려고〉 亳殷 〈땅을〉 닦았다.
[傳]自湯至盤庚 凡五遷都 盤庚治亳殷이라
湯임금으로부터 盤庚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번 도읍을 옮겼는데, 盤庚이 亳의 殷 땅을 닦았다.
○盤 本又作般이라
○盤은 어떤 本에는 또 般으로 되어 있다.
民咨胥怨이라
백성들이 슬퍼하며 서로 윗사람을 원망하였다.
[傳]胥 相也 民不欲徙하여 乃咨嗟憂愁하여 相與怨上이라
胥는 相(서로)의 뜻이다. 백성들이 옮겨가고 싶지 않아 한탄하고 걱정하며 서로 더불어 윗사람을 원망하였다.
作盤庚三篇이라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盤庚〉 3편을 지었다.
[疏]‘盤庚’至‘三篇’
書序의 [盤庚]에서 [三篇]까지
○正義曰:商自成湯以來, 屢遷都邑, 仲丁‧河亶甲‧祖乙, 皆有言, 歷載於篇.
○正義曰:商나라는 成湯 이후로 여러 차례 都邑을 옮겼는데, 仲丁‧河亶甲‧祖乙이 모두 言辭로써 誥諭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차례로 篇에 기재하였다.
盤庚最在其後, 故序總之, “自湯至盤庚, 凡五遷都.” 今盤庚將欲遷居, 而治於亳之殷,
盤庚이 가장 뒤에 있기 때문에 書序에서 총괄하여 “湯임금으로부터 盤庚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번 도읍을 옮겼다.”라고 하였다. 지금 盤庚이 장차 거주지를 옮기려고 亳의 殷 땅을 닦았는데,
民皆戀其故居, 不欲移徙, 咨嗟憂愁, 相與怨上, 盤庚以言辭誥之. 史敍其事, 作盤庚三篇.
백성들이 모두 오래도록 살던 거주지를 아쉬워하여 이사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탄하고 걱정하며 서로 더불어 윗사람을 원망하니, 盤庚이 言辭로써 誥諭하였다.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盤庚〉 3편을 지었다.
[疏]○傳‘自湯’至‘亳
○傳의 [自湯]에서 [亳殷]까지
○正義曰:經言“不常厥邑, 于今五邦.” 故序言‘盤庚五遷’. 傳嫌一身五遷, 故辨之云 ‘自湯至盤庚, 凡五遷都’也.
○正義曰:經文에서 “일정한 도읍을 갖지 못하고 옮긴 곳이 지금까지 다섯 군데나 된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書序에서 ‘盤庚이 다섯 번째 도읍을 옮겼다.’라고 말하였는데, 傳에서 ‘한 사람이 다섯 번 옮겼는가.’ 하고 의심할까 염려했기 때문에, 변별하기를 “湯임금으로부터 盤庚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번 도읍을 옮겼다.”라고 한 것이다.
上文言‘自契至於成湯八遷’, 竝數湯爲八, 此言‘盤庚五遷’, 又竝數湯爲五,
윗글에서 말한 ‘契에서부터 成湯에 이르기까지 여덟 번 옮겼다.’라고 한 것은 湯까지 아울러 세어서 여덟 번이 된 것이고, 여기서 말한 ‘盤庚이 다섯 번째 옮겼다.’라고 한 것은 또 湯임금까지 아울러 세어서 다섯 번이 된 것이니,
湯一人再數, 故 其實正十二也.
湯임금 한 사람을 두 번 세었기 때문에 張衡이 “殷나라 사람은 자주 도읍을 옮겨서, 契로부터 湯임금에 이르기까지 여덟 번 옮기고, 湯임금으로부터 祖乙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 옮겼다.”라고 하였으니, 실은 딱 열두 번 옮긴 것이다.
此序云 “盤庚, 將治亳殷.” 下傳云 “殷, 亳之別名.” 則‘亳殷’卽是一都, 湯遷還從先王居也.
이 書序에서 “盤庚이 장차 〈거주지를 옮기려고〉 亳의 殷 땅을 닦았다.”라고 하였고, 아래 傳에서 “殷은 亳의 딴 이름이다.”라고 하였으니, ‘亳殷’은 바로 한 도읍이었고, 湯임금이 옮긴 것은 도로 先王의 거주지를 따른 것이었다.
汲冢古文云 “盤庚自奄遷於殷, 殷在鄴南三十里.” 束晳云 “尙書序 ‘盤庚五遷, 將治亳殷’, 舊說以爲居亳, 亳殷在河南.
≪汲冢古文≫에 “盤庚이 奄으로부터 殷으로 옮겼으니, 殷은 鄴城 남쪽 30리 지점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束晳은 “〈尙書序〉에는 ‘盤庚이 다섯 번째 옮겼는데, 장차 〈거주지를 옮기려고〉 亳의 殷 땅을 닦았다.’라고 하였고, 舊說에는 ‘亳에 거주했다.’라고 하였으니, 亳殷은 황하 남쪽에 있었다.
孔子壁中尙書云 ‘將始宅殷’, 是與古文不同也. 漢書項羽傳云 ‘洹水南殷墟上’, 今安陽西有殷.”
孔子가 살던 집의 벽 속에서 나온 ≪尙書≫에는 ‘비로소 殷에 거주하려 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古文과 동일하지 않다. ≪漢書≫ 〈項羽傳〉에 ‘洹水의 남쪽 殷의 터[墟] 위’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安陽 서쪽에 殷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束晳. 然孔子壁內之書, 安國先得其本, 此‘將治亳殷’ 不可作‘將始宅殷’. ‘亳’字摩滅, 容或爲‘宅’.
束晳이 殷이 황하의 북쪽에 있었다고 한 것은 亳과 다른 것이다. 그러나 孔子가 살던 집의 벽 속에 있던 ≪尙書≫는 孔安國이 먼저 그 本을 얻은 것이니, 이 ‘將治亳殷’이 ‘將始宅殷’이 될 수는 없으나, ‘亳’자가 마멸되어 혹 ‘宅’자가 될 수는 있다.
壁內之書, 安國先得, , 無緣誤作‘始’字,
벽 속의 ≪尙書≫를 孔安國이 먼저 얻어서 ‘治’자를 모두 ‘亂’자로 적었는데, 그 글자(治)가 ‘始’자와 같지 않으니 잘못 ‘始’자로 적을 까닭이 없다.
知束晳不見壁內之書, 妄爲說耳. 若洹水南有殷墟, 或當餘王居之, 非盤庚也.
束晳이 벽 속의 ≪尙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망령되이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洹水 남쪽에 殷의 터가 있었다면 혹 다른 왕이 거주하였지 盤庚은 아니었다.
盤庚治於亳殷, 紂滅在於朝歌, 則盤庚以後, 遷於河北, 蓋盤庚後王, 有從河亳地, 遷於洹水之南, 後又遷於朝歌.
盤庚은 亳의 殷 땅을 닦았고, 紂의 멸망은 朝歌에 있었으니, 그렇다면 盤庚 이후에 황하 북쪽으로 옮겼을 것이니, 아마 盤庚 이후의 왕 중에 황하 남쪽의 亳 땅으로부터 洹水의 남쪽으로 옮겼다가 뒤에 또 朝歌로 옮긴 일이 있었을 것이다.
[疏]○傳‘胥相’至‘怨上’
○傳의 [胥相]에서 [怨上]까지
○正義曰:釋詁云 “胥, 皆也.” 相亦是皆義, 故通訓胥爲相也.
○正義曰:≪爾雅≫ 〈釋詁〉에 “胥는 皆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相’ 역시 皆의 뜻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胥를 相의 뜻으로 풀이한다.
‘民不欲徙 乃咨嗟憂愁 相與怨上’, 經云 “民不適有居.” 是怨上之事也.
[民不欲徙 乃咨嗟憂愁 相與怨上] 經文에서 “백성들이 새 거주지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 바로 윗사람을 원망한 일이었다.
仲丁‧祖乙亦是遷都, 序無民怨之言, 此獨有怨者, 盤庚, 祖乙之曾孫也.
仲丁과 祖乙 역시 도읍을 옮겼지만 書序에 백성들이 원망했다는 말이 없고, 여기서만 유독 원망했다는 말이 있는 것은, 盤庚은 祖乙의 曾孫이기 때문이다.
祖乙遷都於此, 至今多歷年世, 民居已久, 戀舊情深, 前王三徙, 誥令則行, 曉喩之易,
祖乙이 여기에 도읍을 옮기고 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대가 많이 지나서, 백성들의 거주 기간이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옛 거주지에 대한 연정이 깊고, 전대의 왕들이 세 번 이사할 때는 誥令하면 즉시 행했으므로 曉喩하기 쉬웠다.
故無此言, 此則民怨之深, 故序獨有此事. 彼各一篇, 而此獨三篇者, 謂民怨上, 故勸誘之難也.
그래서 이런 말이 없었지만, 여기서는 백성들의 원망이 깊기 때문에 書序에 유독 이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저기는 각각 1편씩이고 여기만 유독 3편인 것은 백성들이 윗사람을 원망하였기 때문에 권유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民不欲遷, 而盤庚必遷者, 鄭玄云 “祖乙居耿後, 奢侈逾禮, 土地近山川, 嘗圮焉.
백성들은 옮기려고 하지 않는데 盤庚이 필히 옮기려고 한 것에 대하여 鄭玄은 “祖乙이 耿에 거주한 뒤로 奢侈가 禮를 벗어났고, 土地가 山川에 바짝 붙어있어서 일찍부터 무너졌다.
至陽甲立, 盤庚爲之臣, 乃謀徙居湯舊都.” 又序注云 “民居耿久, 奢淫成俗, 故不樂徙.”
그래서 陽甲이 즉위했을 때에 盤庚은 신하로 있으면서 湯임금의 옛 도읍지로 옮겨 거주할 것을 도모했다.”라고 하였고, 또 序의 注에서는 “백성들이 耿에 거주한 지 오래여서 奢淫이 풍속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주하는 것을 싫어했다.”라고 하였다.
王肅云 “自祖乙五世至盤庚, 元兄陽甲, 宮室奢侈, 下民邑居墊隘, 水泉瀉鹵, 不可以行政化, 故徙都於殷.”
그리고 王肅은 “祖乙로부터 5世를 거쳐 盤庚에 이르렀는데, 元兄(長兄) 陽甲의 宮室은 사치스러웠고, 백성들의 거주지는 낮고 좁은데다 물이 스며들어서 정치교화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殷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하였고,
皇甫謐云 “耿在河北, 迫近山川, 自祖辛已來, 民皆奢侈, 故盤庚遷於殷.”
皇甫謐은 “耿이 황하 북쪽에 위치해 있어 山川에 바짝 붙었으며, 祖辛 이후로 백성들이 모두 사치를 부리기 때문에 盤庚이 殷으로 옮겼다.”라고 하였다.
此三者之說, 皆言奢侈, 鄭玄旣言君奢, 又言民奢, 王肅專謂君奢, 皇甫謐專謂民奢.
이 세 사람의 말은 모두 사치에 대해 말하였는데, 鄭玄은 이미 임금의 사치를 말하고 또 백성의 사치를 말하였으며, 王肅은 전적으로 임금의 사치만을 말하였고, 皇甫謐은 전적으로 백성의 사치만을 말하였다.
言君奢者, 以天子宮室奢侈, 侵奪下民, 言民奢者, 以豪民室宇過度, 逼迫貧乏,
임금의 사치에 대해 말한 사람은 天子의 宮室이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백성들을 침탈했다고 보았고, 백성의 사치에 대해 말한 사람은 豪民의 가옥이 정도에 지나쳤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였다고 보았는데,
皆爲細民弱劣無所容居, 欲遷都改制以寬之. 富民戀舊, 故違上意, 不欲遷也. 案檢孔傳無奢侈之語,
모두 거주할 곳 없는 힘없는 백성들을 위하여 도읍을 옮기고 제도를 고쳐서 주거생활을 넉넉하게 해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富民은 옛 거주지에 연연하기 때문에 윗사람의 뜻을 어기고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孔傳을 살펴보면, 사치에 대한 말은 없고
惟下篇云 “今我民用蕩析離居, 罔有定極.” 傳云 “水泉沈溺, 故蕩析離居, 無安定之極, 徙以爲之極.”
오직 下篇의 “지금 우리 백성들이 침수피해로 흩어져 살고 있어 주거환경이 몹시 불안정하건만”에 대한 傳에서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살고 있어 안정된 極中(常性)을 잃었으니, 옮겨서 極中을 회복하게 한 것이다.”라고만 하였을 뿐이다.
孔意蓋以地勢洿下, 又久居水變, 水泉瀉鹵, 不可行化, 故欲遷都, 不必爲奢侈也.
孔安國의 생각은 아마 地勢가 낮고 또 오래 거주해 오는 동안 물길이 변하여 물이 스며들어서 정사를 제대로 펼칠 수 없기 때문에 도읍을 옮기려 한 것이지, 꼭 사치를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여긴 것이다.
此以君名名篇, 必是爲君時事, 而鄭玄以爲上篇是盤庚爲臣時事, 何得專輒謬妄也.
여기서 임금의 이름을 가지고 편명을 한 것은 필시 임금이 되었을 때의 일일 것인데, 鄭玄은 上篇이 바로 盤庚이 신하로 있을 때의 일이라고 여기었으니 어찌하여 제멋대로 황당무계한 말을 하였는가.
盤庚
[傳]盤庚 殷王名이라 殷質하여 以名篇이라
盤庚은 殷나라 王의 이름이다. 殷나라는 질박했기 때문에 〈임금 이름을〉 편명으로 하였다.
○盤庚 殷王名이라 馬云 祖乙曾孫이요 祖丁之子 不言盤庚誥
○盤庚은 殷나라 王의 이름이다. 馬融은 “祖乙의 증손이자 祖丁의 아들이다. ‘盤庚誥’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非但錄其誥也 取其徙而立功이라 以盤庚으로 名篇이라하니라
그 誥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이주해서 공을 세운 것을 취했기 때문에 ‘盤庚’으로 편명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疏]‘盤庚’
題篇의 [盤庚]
○正義曰:此三篇皆以民不樂遷, 開解民意, 告以不遷之害, 遷都之善也. 二篇, 未遷時事, 下篇旣遷後事.
○正義曰:이 3篇은 모두 백성들이 도읍을 옮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주어 옮기지 않았을 때의 해로운 점과 도읍을 옮겼을 때의 좋은 점을 가지고 고유한 것이다. 上‧中 두 편은 아직 옮기기 이전의 일이고, 下篇은 이미 옮긴 뒤의 일이다.
上篇人皆怨上, 初啓民心, 故其辭尤切. 中篇民已少悟, 故其辭稍緩. 下篇民旣從遷, 故辭復益緩.
上篇은 사람들이 모두 윗사람을 원망하여 갓 민심을 개유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 말이 더욱 절실하였고, 中篇은 백성이 이미 조금 깨우쳤기 때문에 그 말이 조금 느슨하였고, 下篇은 백성이 이미 옮겼기 때문에 말이 다시 더욱 느슨하였다.
哀十一年左傳引此篇云 ‘盤庚之誥’, 則此篇皆誥辭也. 題篇不曰‘盤庚誥’者, 王肅云 “取其徙而立功, 故但以‘盤庚’名篇.”
≪春秋左氏傳≫ 哀公 11년 조에서 이 편을 인용하여 ‘盤庚의 誥에’라고 하였으니, 이 편은 모두 고유한 말이다. 題篇에서 ‘盤庚誥’라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王肅은 “그가 이주해서 공을 세운 점을 취했기 때문에 단지 ‘盤庚’만을 가지고 편명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然仲丁‧祖乙‧河亶甲等皆以王名篇, 則是史意異耳, 未必見他義.
그러나 〈仲丁〉‧〈祖乙〉‧〈河亶甲〉 등은 모두 王을 가지고 편명을 하였으니, 이는 史官의 생각이 달랐을 뿐, 꼭 다른 뜻을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疏]○傳‘殷質, 以名篇’
○傳의 [殷質 以名篇]
○正義曰:周書謚法成王時作, 故桓六年左傳云 “周人以諱事神.” 殷時質, 未諱君名, 故以王名篇也.
○正義曰:≪周書≫의 〈謚法〉은 成王 때에 지어졌기 때문에 ≪春秋左氏傳≫ 桓公 6년 조에 “周나라 사람은 諱로써 神을 섬겼다.”라고 하였다. 殷나라 때에는 질박하여 임금의 이름을 忌諱하지 않았기 때문에 王의 이름으로 편명을 한 것이다.
上仲丁‧祖乙亦是王名, 於此始作傳者, 以上篇經亡, 此經稱盤庚, 故就此解之.
위의 仲丁‧祖乙 역시 王의 이름이었지만, 여기에 처음 傳을 지은 자가 上篇에는 經이 망실되고 이 經에는 〈盤庚〉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풀이한 것이다.
≪史記≫ 〈殷本紀〉에 “盤庚이 승하하자 아우 小辛이 즉위하였다. 殷나라가 다시 쇠퇴하자 백성들이 盤庚을 사모하여 이에 〈盤庚〉 3편을 지었다.”라고 하여 이 書序와 어긋나니 잘못이다.
鄭玄云 “盤庚, 湯十世孫, 祖乙之曾孫, 以五遷繼湯, 篇次祖乙, 故繼之.
鄭玄이 “盤庚은 湯임금의 10世孫이자 祖乙의 曾孫으로서 다섯 번째 도읍을 옮기어 湯임금을 이었고, 篇次가 〈祖乙〉 다음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어댄 것이다.
於上累之, 祖乙爲湯玄孫, 七世也, 又加祖乙, 復其祖父, 通盤庚, 故十世.”
위로 세어 올라가면 祖乙이 湯임금의 玄孫이 되므로 7世인 것이며, 또 祖乙을 더하고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태서 盤庚을 통했기 때문에 10世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本紀云 “祖乙崩, 子祖辛立. 崩, 子甲立. 崩, 弟祖丁立. 崩, (門)[開]甲之子南庚立.
〈殷本紀〉에는 “祖乙이 승하하자 아들 祖辛이 즉위하였다. 祖辛이 승하하자 아들 開甲이 즉위하였다. 開甲이 승하하자 아우 祖丁이 즉위하였다. 祖丁이 승하하자 開甲의 아들 南庚이 즉위하였다.
崩, 祖丁子陽甲立. 崩, 弟盤庚立.” 是祖乙生祖辛, 祖辛生祖丁, 祖丁生盤庚, 故爲曾孫.
南庚이 승하하자 祖丁의 아들 陽甲이 즉위하였다. 陽甲이 승하하자 아우 盤庚이 즉위했다.”라고 하였다. 이 祖乙이 祖辛을 낳았고 祖辛이 祖丁을 낳았고 祖丁이 盤庚을 낳았기 때문에 曾孫이 된 것이다.
盤庚 遷于殷할새
盤庚이 殷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할 적에
[傳]亳之別名이라
〈殷은〉 亳의 딴 이름이다.
民不適有居어늘
백성들이 〈殷으로〉 가서 거주지를 가지려고 하지 않자,
[傳]適 之也 不欲之殷有邑居
適은 之(가다)의 뜻이니, 殷으로 가서 거주지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러 근심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화합하기 위하여 정직한 말로 효유하였다.
[傳]籲 和也 率和衆憂之人하여 出正直之言이라
籲는 和의 뜻이다. 여러 걱정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화합하기 위하여 정직한 말로 효유하였다는 것이다.
역주
역주1 (語)[誥] : 저본에는 ‘語’로 되어 있으나, 諸本 및 文義에 근거하여 ‘誥’로 바로잡았다.
역주2 (治)[地]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盧文弨의 ≪群書拾補≫와 “宋板에는 ‘殷地’로 되어 있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地’로 바로잡았다.
역주3 (怨)[殷] : 저본에는 ‘怨’으로 되어 있으나, 앞의 傳文에 의거하여 ‘殷’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班固)[張衡] : 저본에는 ‘班固’로 되어 있으나, ≪文選≫에 의거하여 ‘張衡’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殷人屢遷 前八後五 : 張衡의 〈西京賦〉에 있는 말이다.
역주6 以殷在河北 與亳異也 : 束晳은 ‘亳殷在河南’이라고 하였는데, 혹시 河北이 河南의 잘못이 아닌지 모르겠다.
역주7 (始皆作亂其字與治不類)[治皆作亂其字與始不類] : 저본에는 ‘始皆作亂其字與治不類’로 되어 있으나, “宋板에는 ‘治皆作亂其字與始不類’로 되어 있으니, 살펴보건대 宋板이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始’자와 ‘治’자의 위치가 바뀐 것을 바로잡았다.
역주8 (有)[南] : 저본에는 ‘有’로 되어 있으나, “宋本에는 ‘河有’가 ‘河南’으로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南’자가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南’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追)[迫] : 저본에는 ‘追’로 되어 있으나, 文義 및 諸本에 의거하여 ‘迫’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中上)[上中] : 저본에는 ‘中上’으로 되어 있으나, ≪纂傳≫에 의거하여 ‘上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名] : 저본에는 ‘名’이 없으나, “宋板에는 ‘名’자가 중복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下文에 ‘故以王名名篇也’라고 하였고, 諸本에 모두 ‘名’자가 중복되어 있으니, 이 句는 마땅히 宋板을 따라야 한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名’를 보충하였다.
역주12 史記……乃作盤庚三篇 : ≪史記≫ 索隱에서도 “≪尙書≫에 ‘盤庚이 장차 〈거주지를 옮기려고〉 亳의 殷 땅을 닦자 백성들이 한탄하고 걱정하므로 〈盤庚〉을 지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盤庚이 승하하자 아우 小辛이 즉위하니, 백성들이 盤庚을 사모하여 〈盤庚〉을 지었다고 한 것은 古文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書序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역주13 (門)[開] : 저본에는 ‘門’으로 되어 있으나, “諸本에는 ‘門’이 모두 ‘開’로 되어 있으니, ‘門’자는 오자이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開’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14 率籲衆慼出矢言 : 蔡傳에서는 籲를 呼의 뜻으로 보아 “여러 근심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맹세하는 말을 하여 깨우쳤다.[率呼衆憂之人 出誓言以喩之]”라고 풀이하여, 蘇軾이 “籲는 呼의 뜻이고, 矢는 誓의 뜻이니, 盤庚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 걱정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고유하여 맹세하였다.”라고 한 것을 따랐다. 林之奇는 蘇軾의 풀이가 孔傳보다 나은 것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矢를 陳의 뜻으로 보아 “아마 도읍을 옮기게 된 뜻에 대해 진술하여 고했을 것이다. 先儒(孔安國)가 ‘정직한 말을 했다.’고 한 것은 그 뜻을 잃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夏僎도 矢를 陳의 뜻으로 보았다. 宋代 胡士行(≪尙書詳解≫)은 率을 皆의 뜻으로 보았다.

상서정의(3)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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