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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2)

상서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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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河旣道하며
[傳]河水分爲九道 在此州界하니 平原以北
○九河 徒駭一이요 太史二 馬頰三이요 覆釜四 胡蘇五 簡六이요 絜七이요 鉤盤八이요 鬲津九 出爾雅
[疏]傳‘河水’至‘北是’
○正義曰:河自大陸之北, 敷爲九河, 謂大陸在冀州, 嫌九河亦在冀州, 故云‘在此州界’也.
河從大陸東畔北行, 而東北入海. 冀州之東境, 至河之西畔, 水分大河, 東爲九道, 故知在兗州界, 平原以北是也.
釋水載九河之名云 “徒駭‧太史‧馬頰‧覆釜‧胡蘇‧簡‧絜‧鉤盤‧鬲津.”
李巡曰 “徒駭, 禹疏九河, 以徒衆起, 故云 ‘徒駭’. 太史, 禹大使徒衆通其水道, 故曰 ‘太史’.
馬頰, 河勢上廣下狹, 狀如馬頰也. 覆釜, 水中多渚, 往往而處, 形如覆釜.
胡蘇, 其水下流, 故曰 ‘胡蘇’. 胡, 下也. 蘇, 流也. 簡, 大也, 河水深而大也.
絜, 言河水多山石, 治之苦絜. 絜, 苦也. 鉤盤, 言河水曲如鉤, 屈折如盤也. 鬲津, 河水狹小, 可鬲以爲津也.”
孫炎曰 “徒駭, 禹疏九河, 用功雖廣, 衆懼不成, 故曰 ‘徒駭’. 胡蘇, 水流多散胡蘇然.” 其餘同李巡.
郭璞云 “徒駭今在成平, 東光縣今有胡蘇亭.” 覆釜之名 同李巡, 餘名皆云其義未詳.
計禹陳九河云, 復其故道, 則名應先有, 不宜徒駭‧太史因禹立名, 此郭氏所以未詳也.
[疏]或九河雖舊有名, 至禹治水, 更別立名, 卽爾雅所云是也.
漢書溝洫志成帝時, 河隄都尉許商, 上書曰 “古記九河之名, 有徒駭‧胡蘇‧鬲津, 今見在成平‧東光‧鬲縣界中,
自鬲津以北至徒駭, 其間相去二百餘里.” 是知九河所在, 徒駭最北, 鬲津最南. 蓋徒駭是河之本道, 東出分爲八枝也.
許商上言三河, 下言三縣, 則徒駭在成平, 胡蘇在東光, 鬲津在鬲縣, 其餘不復知也. 爾雅九河之次, 從北而南.
旣知三河之處, 則其餘六者, 太史‧馬頰‧覆釜在東光之北, 成平之南, 簡‧絜‧鉤盤在東光之南, 鬲縣之北也.
其河填塞, 時有故道. 鄭玄云 “周時齊桓公塞之, 同爲一河. 今河間弓高以東, 至平原鬲津, 往往有其遺處.”
春秋緯寶乾圖云 “移河爲界在齊呂, 填閼八流以自廣.” 鄭玄蓋據此文, 爲齊桓公塞之也.
言閼八流拓境, 則塞其東流八枝, 竝使歸於徒駭也.


아홉 갈래의 黃河가 이미 예전의 물길을 회복하였으며,
황하의 물이 아홉 길로 나뉜 곳이 이 州(兗州)의 地界에 있으니, 平原 북쪽이 이곳이다.
○아홉 갈래의 황하는 徒駭가 하나요, 太史가 둘이요, 馬頰이 셋이요, 覆釜가 넷이요, 胡蘇가 다섯이요, 簡이 여섯이요, 絜이 일곱이요, 鉤盤이 여덟이요, 鬲津이 아홉이니, ≪爾雅≫에 나온다.
傳의 [河水]에서 [北是]까지
○正義曰:황하가 大陸의 북쪽으로부터 나뉘어 九河가 되었지만, 大陸이 冀州에 있다고 한다면 九河 또한 冀州에 있다는 의심을 살까 싶었기 때문에 “이 州(兗州)의 경계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황하는 大陸의 동쪽 변두리로부터 북쪽으로 흘러가서 동북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冀州의 동쪽 지경에서 황하의 서쪽 변두리에 이르러 물이 大河에서 갈라져 동쪽으로 아홉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兗州의 地界에 있으니, 平原 이북이 이것이란 점을 알았던 모양이다.
≪爾雅≫ 〈釋水〉에 아홉 갈래의 황하 이름이 실려 있는데, “徒駭‧太史‧馬頰‧覆釜‧胡蘇‧簡‧絜‧鉤盤‧鬲津”이다.
李巡이 말하기를 “徒駭는 禹가 아홉 갈래의 황하를 소통시킬 때 여러 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일으켰기 때문에 ‘徒駭’라고 한 것이다. 太史는 禹가 대대적으로 여러 사람을 시켜서 그 물길을 소통시켰기 때문에 ‘太史’라고 한 것이다.
馬頰은 河水의 형세가 위는 넓고 아래는 좁아서 형상이 마치 말[馬]의 볼과 같은 것이다. 覆釜는 물 가운데 작은 섬이 많아 이따금 놓인 형상이 마치 엎어놓은 가마솥과 같은 것이다.
胡蘇는 그 물이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胡蘇’라고 한 것이다. 胡는 下의 뜻이요, 蘇는 流의 뜻이다. 簡은 大의 뜻이니, 河水가 깊고 큰 것이다.
絜은 河水에 山石이 많아서 다스리기 힘듦을 말한 것이다. 絜은 苦의 뜻이다. 鉤盤은 河水가 마치 갈고리처럼 굽고 소반처럼 굴절된 점을 말한 것이다. 鬲津은 河水가 협소하여 막아서 나루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孫炎은 “徒駭는 禹가 아홉 갈래의 황하를 소통시킬 때 힘은 많이 들였으나 여러 사람이 두려워해서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徒駭’라고 한 것이다. 胡蘇는 물의 흐름이 이리저리 많이 흩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 나머지는 李巡과 같다.
郭璞은 “徒駭는 지금 成平에 있고, 東光縣에 지금 胡蘇亭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覆釜의 이름은 李巡과 같고, 나머지 이름에 대해서는 모두 “그 뜻이 상세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禹가 아홉 갈래의 황하에 대해 진술할 때 “그 예전의 물길을 회복했다.”라고 한 것을 감안하면, 물 이름이 응당 먼저 있었을 것이고, 의당 徒駭와 太史가 禹로 인해서 命名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郭氏가 “상세하지 않다.”고 한 이유이다.
혹 아홉 갈래의 황하가 비록 예전에 이름이 있었으나 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에 와서 다시 별도로 命名하였다면 곧 ≪爾雅≫에서 이른 것이 이것일 수 있다.
≪漢書≫ 〈溝洫志〉에 의하면 成帝 때에 河隄都尉 許商이 上書하기를 “옛날 아홉 갈래 황하의 이름을 기재한 데에 徒駭‧胡蘇‧鬲津이 있으니, 지금 보면 成平‧東光‧鬲縣의 경계 가운데 있습니다.
鬲津 이북으로부터 徒駭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상거가 200여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아홉 갈래 황하의 소재를 알 수 있으니, 徒駭가 가장 북쪽에 위치해있고 鬲津이 가장 남쪽에 위치해있었다. 아마 徒駭는 바로 황하의 본길이고 동쪽으로 나가 나뉘어 여덟 갈래가 된 것 같다.
許商이 위에서 세 황하를 말하고 아래에서 세 고을을 말하였으니, 徒駭는 成平에 있고, 胡蘇는 東光에 있고, 鬲津은 鬲縣에 있으며, 그 나머지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爾雅≫에 있는 ‘아홉 갈래 황하’의 차례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배열되어 있다.
세 황하의 소재지를 이미 알았으면 그 나머지 여섯 중에 太史‧馬頰‧覆釜는 東光의 북쪽, 成平의 남쪽에 있고, 簡‧絜‧鉤盤은 東光의 남쪽, 鬲縣의 북쪽에 있을 것이다.
황하가 막혔지만 당시 예전의 물길은 있었을 것이다. 鄭玄은 “周나라 시대에 齊 桓公이 막아서 모두 한 황하로 만들었다. 지금 河間 弓高縣 이동에서 平原 鬲津에 이르기까지 이따금 남아 있는 곳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春秋緯≫ 〈寶乾圖〉에 “황하를 옮겨 경계를 만든 일이 齊呂에 있었으니, 八流를 막아 저절로 넓어지게 했다.”라고 하였으니, 鄭玄이 아마 이 글에 의거하여 “齊 桓公이 막았다.”라고 한 것 같다.
“八流를 막아 지경을 개척했다.”라고 말하였으니, 동쪽으로 흐르는 여덟 갈래를 막아 아울러 徒駭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爲] : 문의에 의해 보충하였다.

상서정의(2)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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